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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 번째 연재지만 사실 기획의 첫 시간을 열면서 무슨 차를 꺼내올지 고민이 많았습니다. 세상에 존재하는 수 천 가지의 차를 다 소개할 수도 없고,
어느 범주에 들어가는 차를 ‘가장’ 혹은 ‘최고의’그도 아니면 ‘우선적으로 말해야 하는’ 식의 수식어로 포장할 필요도 없다는 생각을 했습니다.
여러분들께서 이 포스팅을 보시고 오늘 혹은 이 주엔 차를 한 잔 즐겨보고 싶다는 생각을 하신다면 그것으로 마냥 기쁘고 족할 듯 하네요.
차를 선정하는 기준이 순전히 저의 취향에 의존하다 보니 짧은 식견과 모자란 경험이 약간의 문제를 불러일으킬 수도 있습니다. 하지만 그보다 더
불편한 문제는 사전에 막을 수 있겠지요. 타인의 목적이나 의도에 휘둘리지 않아도 된다는 사실입니다. 그러다보니 애써 희귀하거나 값비싼 차에
목맬 필요 없이 담담하게 글을 써 보기로 마음 먹었습니다. 오늘 첫 시간에, 차 경험이 생소하거나 익숙하거나 상관없이 누구나 즐길 수 있을 만큼
무난하지만 동시에 기품도 느껴지는 차를 가지고 나왔습니다.
이 차는 중국에서 건너 왔습니다. 현재 세계에 유통되고 있는 다양한 차종의 절반 이상을 가뿐히 뛰어 넘는 것이 중국차입니다. 우리가 흔히
농수산물이나 공산품을 두고 이야기할 때 메이드 인 차이나를 괄시하는 경향이 두드러집니다만, 물론 저도 그렇습니다. 차의 경우에는 적어도
예외라고 말하지 않을 수는 없을 듯 합니다. 이건 한국인으로서, 그리고 차를 만드는 작업자의 입장에서 여러 모로 아쉽고 부러운 일이지만
객관적인 입장에서 보면 그럴 만 한 역사와 그 결과물들이 존재하기 때문에 덮어 놓고 부정할 수는 없죠. 수 백이 넘는 중국의 차 가문과
수 천 종이 넘는 차들 중 이 차는 중국의 남부, 안후이 성 혹자는 안휘성이라고도 부르는 지역을 대표하고 있습니다. 기문, 중국어로는 키먼이라
부르는 지역에서 재배되고 생산된 차들을 일컬어 우리는 기문홍차 혹은 기홍차라고 부릅니다. 세계인들이 가장 즐겨마시는 세 가지 홍차
다즐링, 우바와 함께 3대 홍차라 일컬어지기도 하죠.
직접 우려내서 그대로 마시는 방식을 서양에서는 스트레이트 티라고 부르는데 그 색깔이 연하게 우려낼 경우 밝은 오렌지 빛깔을 띕니다. 조금
진하게 부려내면 적갈색을 띄게 되죠. 많은 사람들이 이 차를 이야기하며 향을 그 특색으로 꼽습니다. 와인향이 난다는 사람도 있고 훈연향이
두드러진다고도 하지만 역시 이 차의 재미난 부분은 기문향이라 따로 부르는 복합미묘한 향기 때문입니다. 무슨 과일인지는 알 수가 없으나
딱히 어떤 다른 식물이나 동물의 향기가 떠오르지는 않습니다. 그냥 ‘아 과일이구나’ 라는 생각이 들죠. 혹시 잎에 꽃을 피우기 직전의 난초가
있다면 그 잎에 코를 가까이 대고 두세 번 크게 들이마셔 보세요. 난초의 향도 은은하게 흐릅니다. 바나나도 사과도 포도도 복숭아도 아니고
그저 이 모두를 합하여 부르는 ‘과일’이라는 애매모호한 단어가 잘 떠오를수록 질 좋은 기문차를 선택한 것이 되겠네요.
생각해보면 참 신기한 일입니다. 푸른 녹색의 찻잎을 모종의 가공방법을 통하여 바짝 바른 검은 색의 찻잎으로 변신시키고, 그 검은 찻잎이 물에
우러나 선홍빛으로 변하는데 과일과 난초의 향기가 난다니 말입니다. 향이 이렇게 두드러지면 으레 가향차, 즉 완성된 차에 특별한 향을 부가하기
위해서 모아 쌓아 둔 후 그 위에 향을 덧입히는 과정을 거친 차를 떠올리게 됩니다. 그래서 기문차는 기본에 충실하고 제조과정 그 자체 이외에는
어떠한 추가 공정을 필요로하지 않는 클래식 티에 속하지 가향차의 분류에 포함시키지 않아야 한다 말하는 이들이 많습니다. 물론 반대의 경우도
있지요. 탕평책을 펴는 이들도 생겨났습니다. 그래 너희들이 말이 모두 맞구나. 그러니 그냥 기문차라고 부르자꾸나하고 말이죠. 특별한 이름으로
많은 이들의 관심과 사랑을 받게 되었습니다.
저는 기문차를 마실 때마다 이런 애매모호함의 즐거움을 생각하게 됩니다. 사실 차를 분류하는 기준은 그 자체로 과학적이라거나 체계적이라
부르기는 어렵습니다. 왜냐하면 녹차나 홍차처럼 그 우려낸 음료의 색깔로 분류하기도 하지만 홍차는 서양권에서 붉을 홍紅자가 아니라
검을 흑黑자를 써서 블랙티라고 부르니까요.백차의 경우 가공된 찻잎이 기문차와 같은 검은 빛이 아니라 보다 하얀 색에 가까워 그리 불리게
되었습니다. 물론 이건 가공의 문제지만요. 황차라는 것도 있습니다. 저는 차의 세계에 처음 발 담게 되었을 적만 해도 이 황차가 노란빛을
띄는 액체들을 말하는 것인가 궁금하기도 했습니다만 소위 황차의 클래식들을 마셔보아도 도무지 황금빛 액체를 띄거나 잎이 노란 녀석들로
계통을 통일시키기는 어려웠습니다. 이게 무슨 일인가 싶었습니다만 노란 색을 뜻하는 ‘황’자가 황제의 黃자를 상징한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을 때 차를 분류하는 세간의 기준이 참으로 제멋대로구나 하고 생각하게 되었습니다. 그렇지 않습니까? 모든 학문들은 나름의 체계적이고
타당한 근거를 바탕으로 계열을 분류합니다. 시간을 기준으로 삼아 분류하기도 하고, 담당하는 영역의 한계선을 짓고 그 안의 내용물들을
종합하여 공통점을 실로 꿰듯 서로 묶어 이름 붙이기도 하죠. 하지만 차의 세계는 명확한 분류가 선행되어 있지 않습니다. 이것이 얼마나
애매하고 모호한 선에 물려 있는 일인지를 생각해보면 찻잎의 색이 까마면서 음료의 색은 샛노란 황금빛이며 가공방식은 황차인 음료 혹은
다양한 경우의 수가 얼마든지 일어날 수 있기 때문입니다.
지적활동의 결과물이 이성적인 토대 안에서 안정적인 기반을 닦을 수 있음은 당연한 이치입니다. 하루 종일 책상에 앉아 주장이 참인지 거짓인지를
고민하고 그 오류를 증명하거나 새롭게 고치는 일은 다가올 인류의 불안정한 미래에 훌륭한 길라잡이가 됩니다. 하지만 자연을 손에 쥐고 비비거나
문지르고, 불에 쏘이거나 바람에 말리는 과정을 겪다보면 인간이 깊이 생각하고 의도한 바가 그대로 구현되지만은 않음을 알게 되죠. 저는
기문차를 놓고 벌어지는 다양한 이야기들을 들으며 그 이유를 생각해 봅니다. 그리고 그 다양한 이야기들이 가능한 까닭을 바로 이 독특한 향기가
그대로 상징하는 것이 아닐까 추측해 봅니다. 어떤 과일인지 알 수 없어 그저 과일향이라 부르고 누군가는 포도 냄새를 누군가는 말란 복숭아를
또 어떤 이는 수박이나 참외나 사과를 떠올릴지도 모릅니다. 누군가가 명시하거나 정의내리지 않았으니 상상은 날개를 답니다. 눈을 감고 향기의
날개에 몸을 맡긴 채 어느 과수원으로 날아드실지 저는 알 수가 없네요. 여러분들이 이 차를 접하고서 떠올리게 될 다양한 이야기가 몹시
궁금해지네요.
<지난 글 보기>
1. 은혜를 입다 (feat. 문산포종) http://todayhumor.com/?coffee_1260
2. 세 형제는 용감했다 I (feat. 다르질링) http://todayhumor.com/?coffee_127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