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통수 맞았다는 미국 CEO 뉴욕타임즈 기사 전문 번역해봤습니다
게시물ID : economy_14040짧은주소 복사하기
작성자 : 당근매니아
추천 : 10
조회수 : 1499회
댓글수 : 25개
등록시간 : 2015/08/04 17:49:20
번역 전문가도 아니고 원어민도 아니다 보니 오역이 있을 수 있습니다.
제가 번역하고 좀 확신이 들지 않는 부분은 (?) 표시를 해놨습니다.
오역 지적해주시면 감사하게 받아들이겠습니다:)

볼드처리는 제가 인상 깊었던 부분들입니다. 미국인들의 사고를 조금 엿볼 수 있는 측면이 있어서 강조해봤습니다.
자신의 급여 인상에 죄책감에 가까운 감정을 느끼는 게 특히 인상적이었네요.
전 이게 교육이 가지고 있는, 그리고 행사하는 권력의 결과물이라고 봅니다.




댄 프라이스는 자신이 거리 한복판을 행진행렬의 맨 앞에서 깃발을 들고 비틀대는 것처럼 느껴질 때가 몇번 있었다.

세 달 전 프라이스 씨(31세)는 자신이 시애틀에서 운영하는 신용카드 처리 회사 '그래비티 페이먼츠'의 최저 연봉을 7만 달러로 인상하는 대신, 자신의 연봉을 반토막냈다. 프라이스는 딱히 지나치게 낮은 임금에 대한, 또는 부자와 빈자 간의 격차에 대한 정치적 불만을 염두에 두지 않았다고 한다. 프라이스는 그저 자신을 위해 일하는 120명을 생각했을 뿐이고, 솔직히 말해 약간의 홍보 효과도 기대했다. 프라이스의 친구 중 하나가 자신의 월세와 학자금 대출을 4만 달러의 연봉으로 메꾸는 것의 지난함을 토로했을 때 이 아이디어가 스쳐지나갔다. 프라이스는 자신이 부리는 피고용인 중 다수가 그 정도 연봉을 받거나 혹은 더 낮은 금액을 받는다는 걸 깨달았다.

하룻밤이 지나기도 전에, 이 나라 왼쪽 귀퉁이(시애틀의 위치)의 소규모 업체 사장이 내린 결정은 임금 불평등 상황에 대한 영웅담이 되었다.

잠시 세계로 시선을 돌려보면 ㅡ 이게 사회주의적이라는 러시 림보 같은 보수주의자와, 우려를 나타내는 회의주의자들이 있지만 ㅡ 대부분의 반응은 열광적이었다. 토크쇼 진행자들이 프라이스 씨를 인터뷰했다. 수천명의 구직자들이 그 요약본을 돌려봤다.(?) 프라이스는 '생각의 리더'로 불렸다. 하버드 경영학 교수들은 사례 조사를 위해 비행기에 올랐다. 3학년들이 프라이스에게 고맙다는 인사를 전했다. 미혼 여성들은 프라이스와 데이트하기를 바랐다.

몇몇 소수가 깨달았듯이, 이러한 소동은 해당 회사 내에선 대소동으로 번졌다. 일단, 그래비티는 그러한 이메일과 페이스북 피드와 전화의 맹공에 대처할 준비가 되어 있지 않았다. 그런 관심은 신나는 동시에 매우 지치고 산만한 일이었다. 또한 너무 많은 눈이 회사를 바라봤고, 그 중 일부는 실패를 기대했으며, 그런 압력들도 긴장을 늦추지 못하게 했다.

다른 문제도 있었는데, 몇몇 고객들은 이러한 정치적 성향에 경악했다면서 거래를 끊었다. 또다른 몇몇은 ㅡ 그런 일이 없을 거라고 몇번이나 반복해 말했음에도 ㅡ 가격 인상을 걱정하며 떠나갔다. 프라이스 씨의 정책에 감명 받은 새로운 고객들이 수십 명 새로 계약했지만, 이 고객들은 최소 내년이 되어야 성과로 이어질 터이다. 이러한 과부하를 감당하기 위해, 프라이스는 이미 십여명의 ㅡ 확실히 높은 급여를 받아갈 ㅡ 새 직원을 뽑았고, 이 성황이 언제까지 이어질 지 확실치 않은 탓에 사람이 얼마나 더 필요하게 될 지도 알 수 없는 상황이다.

프라이스의 회사에서 일하던 가장 중요한 직원 둘이 퇴사했는데, 새로 들어온 사람들이 두 배 가량의 임금 인상 혜택을 봤지만 가장 오래 일한 직원들의 임금 인상폭이 작거나 거의 없는 것은 불공평하다는 이유였다. 몇몇 친구들과 시애틀의 사업가 네크워크는, 자신들의 피고용인들이 프라이스의 이러한 움직임을 보고 자신들을 인색하다 볼 것이라며 불쾌감을 나타냈다.

이 모두를 날려버릴 정도로 가장 안 좋은 소식도 있었다: 프라이스가 정책 변경을 예고한 지 2주가 되지 않아, 프라이스의 형이자 그래비티의 공동 창업자인 루카스 프라이스가 회사 경영에 잠재적 위협을 가하고 있다는 이유로 소송을 제기했다. 지급해야 하는 임금이 급속도로 증가하여, 자신의 급료와 지난 해의 이윤금 220만 달러(약 25억원)가 직원 임금에 다 쓰이게 될 것이라는 주장이었고, 댄 프라이스는 이에 대해 "급료를 지급할 수 있다는 계산에 실수는 없다"고 반박했다.

프라이스가 그래비티의 회의실에서 그렇게 말하는 동안, 피고용인 몇몇은 주차장에 해변 의자를 설치하고 즉석 미팅을 하고 있었다. 사무실에는 발라드의 곡이 흘렀고The office is in Ballard(?), 빠르게 발전해 나가는 시애틀의 이웃 건물들은 프라이스가 다루고 싶었다던 부의 격차를 반영하고 있었다. 아랫층은 요가 교실이 자리했고, 길 건너 커피집에서는 손님들이 목재 안락의자에 앉아 벨벳 소이 라떼를 홀짝일 수 있었다. 하지만 길 모퉁이를 돌아 고가도로 아래를 보면, 노숙인 여성이 빨간 불에 멈춘 차들에 이렇게 쓰인 팻말을 들고 조용히 다가섰다: "제발 도와주세요."

프라이스는 자신의 방식대로 그 바람에 대답하려 했다.

"임금 격차는 이미 잘못된 방향으로 한참 달려왔습니다." 프라이스가 말했다. "누군가가 똑똑하고, 열심히 일하고 좋은 결과를 내야지만 중산층의 삶을 누릴 수 있다는 생각과 싸우고 싶습니다."

프라이스의 임금 인상안에 대한 반응들은, 만약 프라이스의 사업이 계속 번창해 나간다면 이러한 움직임이 어떤 결과로 이어지게 될 지에 대해 스스로 생각해보게 했다. "이러한 움직임은 확산되는 중입니다"라고 프라이스가 말했다. "제가 원하든 원치않든, 이런 일들은 점차 늘어날 거에요."

지난 주말 밤, 프라이스는 시애틀 다운타운에 위치한 파이크 플레이스 시장을 가득 메운 관광객들과 일렬로 선 꽃과 과일 다발 사이를 자신 있게 요리조리 해쳐 나갔다. 프라이스는 그래비티가, 백년 가까이 명맥을 이어온 이 오래된 시장의 점포 중 거의 70%의 신용카드 결제 처리를 위탁받고 있다고 말했다. 아직 시애틀 퍼시픽 대학에 다니던 11년 전부터 고객들을 유치해왔다고 한다. 프라이스는 가판대를 오가며 악수하고, 전화번호를 남겼었다. 맨 처음 계약한 곳은 퓨어 푸드 피쉬라는 가게였다. 이 가게는 영화 '시애틀의 잠 못 이루는 밤'의 배경으로 쓰인 적이 있었지만, 더 중요한 건 86세의 솔리 아몬 씨가 이 가게를 운영한다는 점이다. 아몬은 이 작은 점포를 아버지에게 물려받았고, "대구 아빠"라는 애칭으로 불렸다. 다른 상인들도 아몬이 댄을 신뢰한다는 걸 들었고, 그네들도 그러기로 했다.

"그래비티는 우리에게 훌륭한 서비스를 제공하고 있습니다." 아몬이 말했다. 아몬은 자신이 쓰던 신용카드 결제기가 고장나고 3시간 만에 프라이스가 새 것을 조달해왔던 몇년 전 사건을 기억했다.

상인에게 기계와 소프트웨어를 제공하는 것에서 더 나아가, 그래비티는 소비자와 은행, 사업체 간의 안전하고 빠른 돈 거래를 보증했다. 세계구급 대형 은행들과 맘모스급 사업체들이 지배하는 시장에서, 그래비티는 지난 해 12,000명의 고객을 통해 65억 달러(약 7.5조원)의 금융 거래를 중개했고, 그 대부분은 소형 사업체에서 난 수익이었다.

아몬은 프라이스의 새로운 임금 정책을 걱정하고 있을까? "프라이스는 자신의 사업을 신경쓰면 되고, 전 제 걸 신경 쓰면 됩니다"라고 아몬이 분명한 어조로 대답했다.

가족의 성씨를 딴 레스토랑의 공동 경영인인 브라이언 칸리스도 고객 중 하나다. 칸리스는 자신이 프라이스에게 애정을 가진 이 중 하나였고, 때문에 프라이스의 행동이 더 당황스러웠다고 말했다. 칸리스는 스스로도 시애틀의 새로운 최저임금법안을 고심하는 중이었는데, 4월이 되면 시간 당 11달러를 지급해야 했고 소규모 업장의 경우 5년에 걸쳐 시간 당 15달러까지 인상될 예정이었다.

칸리스는 프라이스의 그래비티 내 임금 인상안에 대해 "다른 사람들을 더 힘겹게 만들고 있다"고 말했다.

프라이스는 당혹해 했다. "브라이언 칸리스가 그리 말하니 괴롭군요"라고 잠시 뒤 덧붙였다. "제가 가장 하기 싫은 일이 있다면 고객을 불편하게 만드는 일입니다."

하지만 어떤 계획이든지 그런 결과를 불러올 수 있고, 프라이스는 이미 "눈부신 성공을 거둬서" 몇몇 이들을 불편케 해야 하는 의무를 짊어졌다. 그래비티에서 영업 감독역을 맡고 있는 레아 바라쿠스는, 프라이스가 사회주의에 동조하여 자신들의 피고용인들의 불만을 고조시키며 공공의 유대감을 위험에 빠뜨리고 있다는 몇몇 고객들의 항의를 처리해야 했다. 바라쿠스는 "그렇게 많이 주면 열심히 일할 동기 부여는 뭘로 할 겁니까?"라는 질문이 많이 들어온다고 말했다. 발표 이후, 바라쿠스는 불신을 보내는 고객들에게 전화하고, 가게나 사무실에 들르고, 그네들을 그래비티에 초대해 피고용인들이 열심히 일하는 모습을 보여주는 데에 한주 80시간을 썼다. 바라쿠스는 대부분이 납득하고 돌아가게 했다.

프라이스와 사회적으로 알고 지내는 사업주들은, 프라이스를 영리한 전략가로 보는 의견과 그냥 또라이로 보는 쪽 양편으로 의견이 갈렸다. 프라이스를 높게 평가할수록 더 불안해했다. "이게 다른 사업들에 영향을 미치게 될까봐 걱정됩니다"라고 스티브 듀필드가 말했다. 듀필드는 DACO사의 최고책임자를 맡고 있고, 시애틀 사업자 기구를 통해 프라이스를 알고 지냈다. "우린 그럴 여유가 없습니다. 대부분의 사업체에서, 임금은 지출의 가장 큰 비중을 차지하고 살아남으려면 그 비용을 조절해야 합니다."

재산 관리 회사의 공동 소유자인 로저 레이널즈는 자신의 임금 정책이 프라이스에게 압박 당하고 있다 주장했다. "아내와 저는 칵테일 파티에서 프라이스에게 굉장히 실망했고, 말 그대로 뛰쳐나왔습니다"라고 레이널즈가 말했다. 레이널즈는 프라이스가 금전 문제에 있어서 홀로 자부심을 가지고자 하는 탓에 다른 사람들을 부당하게 망신주고 있다며 불평을 토해냈다.(?) 모든 사람은 같은 권리를 가지지만, 같은 재능이나 여얼쪙을 기울이는 것은 아니라고 레이널즈가 말했다. "전 프라이스가 정치적인 믿음이나 다른 목적을 직장 내 보상 체계 문제에 끌어들이고 있다고 봅니다."

프라이스가 영감을 얻은 19세기 사상가가 있다고 한다면, 그건 칼 마르크스가 아니라 침례교 목사이자 템플 대학의 설립자인 러셀 콘웰일 것이다. 콘웰은 기독교와 자본주의에 대한 "다이아몬드의 땅"이라는 연설로 유명하다. 콘웰은 "정직하게 돈을 버는 것이 곧 복음을 전하는 것이다"라고 청중에게 호소했다. 부자가 되는 것이 "곧 기독교인으로서의 신성한 의무"라는 것이다.

아이다호 남서쪽 시골에서 자란 프라이스는 이 연설 녹음을 종종 듣는다.

프라이스와 4명의 형제, 그리고 한명의 자매는 매일 새벽 5시에 일어나 금언과 찬송가, 구약과 신약의 복음을 암송했다. 프라이스는 12살까지 집에서 공부했고 성경을 문자 그대로 믿었는데, 러쉬 림보의 쇼도 하루 세시간씩 듣곤 했다 ㅡ 물론 림보가 자신을 주제 삼아 고래고래 소리치는 날이 올 거라고 상상하지도 못했다. 그러고 나면 어머니의 유기농 원예를 도와 퇴비를 만들 시간이었다.

다른 형제들처럼 프라이스는 경쟁심이 투철했던 탓에, 성경 암송 대회나 축구, 혹은 인생게임이나 모노폴리 같은 보드게임에서 1등을 하지 못하면 심하게 자책했었다고 아버지 론 프라이스는 말했다. 지금 투자자문업을 하는 론 프라이스는 "댄은 언제나 협상의 귀재였습니다"라고 돌이켰다.

이러한 고립 상태는 프라이스가 중학교의 복잡한 사회 상호 작용에 적응키 어렵게 했다. 프라이스는 자신의 자리가 아닌 것 같은 것 같은 느낌에 불편해했다. 아이들 사이에 끼어들면 이내 폭소가 터져 나왔고, 그게 자신을 겨냥한 조롱이라는 걸 프라이스는 나중에야 알았다.

프라이스의 경험은 독립심을 부추겼고, 십대들 사이에 껴서 어울릴 수 있게 되었을 때에도 반골 성향으로 남았다. 프라이스는 락밴드를 결성하고 여자친구를 사귀었다. 17살 때 첫 포옹을 하자, 보수적 기독교인이었던 여자친구의 아버지는 프라이스의 의사를 물어왔다. 둘은 약혼했고, 4년 뒤에 결혼했다.(둘은 2011년에 이혼했다.)

프라이스의 부모는 목적의식을 주입해왔다. 우리는 신을 영광케할 "가족으로서의 사명이 있다"는 것이었다. 가정 전체가 "가족 사업"을 위해 움직였고, 각자의 직업과 책임 영역이 표와 다이어그램으로 정해져 있었다. "형제들은 다들 그걸 싫어했지만, 전 멋지다고 생각했어요"라며 프라이스는 웃었다.

프라이스는 더 이상 종교를 믿지 않지만, 자라나면서 그 가치와 신념은 "자신의 DNA"에 각인되었다고 프라이스는 마라했다. "그건 그냥 제 일부입니다."

프라이스는 5살 손윗형인 루카스와 함께 자신의 기숙사 방에서 사업을 시작했고, 그 종교적 열정을 자신의 신용카드 사업에 쏟아냈다.

프라이스는 중심 상권에 좋은 품질과 낮은 가격, 맞춤형 서비스를 약속했다. 성공에 힘입어 프라이스의 선반은 경영에 관한 상들로 가득 찼고, '국가 소상공 주간'에 오바마를 직접 만날 기회를 가진 것이 겨우 25살 때의 일이었다. 비록 지금은 어깨까지 머리를 기르고 힙스터풍 턱수염을 기르고 있지만, 그 당시엔 동안인 도니 오스몬스를 닮았었고 1980년대 시트콤 "패밀리 타이"에서 마이클 J 폭스가 분했던 극성 공화당원 알렉스 P 키튼처럼 말했었다. 시애틀의 최저임금 인상안에 적극적으로 반기를 들진 않았는데, 임금 인상안을 받아들이는 것이 더 적극적인 정부 개입을 피하는 길이라 판단하고 주변 사업주들을 설득했다.

프라이스는 성공가도를 달렸고, 소 사업체들을 돕겠다는 적극적인 헌신과 까다로운 기준들은 경영마인드를 지닌 다른 이상주의자들에게 꽤나 매력적이었다. 몇몇은 연봉을 토막내 가면서 그래비티로 이직해 왔다. 프라이스는 집토끼를 유지하는 것이 다른 고객을 더 유치해오는 것보다 더 중요하다고 판단했다. 전화는 무조건 두 번 울리기 전에 받는 것이 철칙이다.

25세의 니델리스 오티즈는 페루에서 평화유지군 봉사자로 일했었는데(2010년 미스 버몬트였다는 건 말할 필요가 없을 것이다), 프라이스의 열정과 지역사회 봉사 계획에 끌렸다고 말했다. 스탠포드 공과대를 졸업하고 해병대에 복무했던 30세의 에머리 웨거는, 하버드 경영 대학원을 포기하고 프라이스와 일하기로 결정했다.(자신의 결정을 이상하게 생각했던 친구가, 수업에서 그래비티의 임금안에 관해 토론했다고 전해왔을 때 자신이 틀리지 않았음을 재확인했다고 한다.)

메이지 맥매스터 역시 그런 신봉자 중 하나였다. 지금 26세인 맥매스터는 5년 전에 입사했고, 남편과 가족 대신 회사에 대부분의 시간을 바쳐 재무 관리자 자리까지 차근차근 승진했다. "거긴 꽤 특별한 문화가 있어요. 빡세게 일하게, 빡세게 놀죠." 맥매스터가 말했다. "전 그 회사 사람들 모두를 사랑해요."

맥매스터는 회사가 3년에 걸쳐 모두의 연봉을 7만 달러까지 점차 늘려갈 상황을 계산했고, 처음엔 꽤나 괜찮게 맞아떨어지는 듯 했다. 하지만 맥매스터가 그에 대해 계속 고민할 수록 세부적인 부분들이 발목을 잡았다.

"프라이스가 임금을 인상해주는 사람들은 해당 업무에 필요한 최소한의 기술과 최소한의 준비가 되어 있는 사람들이고, 경험도 별로 없는 사람들이에요." 맥매스터가 말했다. 맥매스터가 보기에 공평한 제안은, 약간의 임금 인상안과 더불어 더 많은 경험을 쌓은 후에 인상안을 받을 권리를 주는 것이었다.

발표 이틀 뒤, 맥매스터는 프라이스에게 이야기하기로 결정했다.

"프라이스는 제가 이기적으로 굴고 자기자신만 생각한다는 것처럼 대했습니다." 맥매스터가 말했다. "그게 큰 상처였어요. 전 제 자신뿐만이 아니라 제 정도 위치에 있는 모두를 대신해 말한 거였습니다."

빠른 행보는 맥매스터를 이미 번아웃 직전으로 몰아갔고, 맥매스터는 퇴사를 결심했다.

새로운 연봉 기준은 이제는 퇴사한 그래비티의 웹 개발자, 그랜트 모랜(29세)에게도 압박으로 작용했다. "꽤 복잡한 감정이 들었습니다"라고 모랜이 말했다. 모랜의 연봉은 4.1만 달러에서 5만 달러(첫 해 인상폭)으로 증가했는데, 그럼에도 불구하고 새 정책은 당황스럽게 느껴졌다. "출퇴근카드나 찍고 다니는 사람들도 저랑 똑같은 연봉을 받게 됩니다"라고 모랜이 불평했다. "높은 실적을 내는 사원이 그보다 못한 팀 구성원들에게 발목이 잡히게 될 뿐이에요."

더불어 모랜은 연봉 인상 때문에 자신이 원래 계획을 포기하고 지금 자리에 안주하게 할까봐 초조했었다. 원래 모랜은 웹 관련 기술을 더 발전시킨 뒤 디지털 회사로 이직할 계획이었다.

그리고 쏟아지는 관심도 성가셨다. "제 연봉이 그렇게 대놓고 언론에 오르내리는 게 불편하고 싫었습니다"라는 모랜의 말은, 그래비티의 몇몇 직원들이 토로했던 감정과 맞닿아 있었다. "이건 주변의 시선과 기대를 바꿔놓았습니다. 그날 커피 시켜먹고 팁을 줄 때에도 그랬고, 가족이나 친구들한테 돈을 꿔달라는 연락도 옵니다."

인상안을 기쁘게 받아들이고 남기로 결정한 직원 중 몇몇도 지금 꽤 압박감을 느낀다고 말했다. "제가 이 돈을 받을 만큼 일을 잘 해내고 있는 걸까요?"라고 23세의 스테파니 브룩스가 말했다. 브룩스는 연봉 인상안 발표 2달 전에 그래비티의 행정 보조로 입사했다. "그렇게 받아본 적이 없어요."

프라이스가 7만 달러를 최종적인 연봉 인상 목표로 잡은 것은, 이 연봉이 지속적인 금전적 스트레스로 인한 삶의 질 저하를 극적으로 해소시켜주는 금액이라는 조사를 보았던 탓이다.

또한 프라이스는 마태 복음에 나온 포도밭의 일꾼들에 관한 우화도 염두에 두었다. 동틀녘부터 일하던 일꾼들이 일 끝나기 직전에 끼어든 일꾼들과 같은 금액을 받고 열 받아 하는 이야기이다. 처음부터 믿은 자와 나중에 믿기 시작한 자 모두 천국에서는 똑같이 환영 받지만, 돈으로 보상이 나가는 지상에서는 어쩔 수 없다는 의미다.

친구들이나 직원들이 보여준 반응들에서 보듯이, 프라이스는 자신이 논쟁의 대상이 될 수도 있으며, 어쩌면 비난 받을 지도 모른다는 걸 미리 인정하긴 했다. 비판은 종종 인신 공격의 형태로 날아들기도 했다. "다른 사람들이 그렇듯 저도 그럴 때 괴롭습니다"라고 프라이스가 말했다.

프라이스는 자신이 높게 평가했던 맥매스터를 비롯해, 모랜이나 러쉬 림보가 틀렸다고 생각친 않는다. "이 문제를 해결할 완벽한 방법은 없고, 직장 내에서의 복잡한 문제를 어떠한 손해나 타협도 없이 조정해나갈 순 없습니다"라고 프라이스가 말했다. 다른 사업주들이 스톡 옵션이나 이익 배분제가 더 나은 방법일 거라고 제안했지만, 프라이스는 그 방법들은 자본주의가 굴러가는 방식과 다를 게 없다고 말했다: 모두가 가장 좋은 쥐덫을 만들려고 노력하는 상황. "이게 제가 생각한 가장 나은 해결안입니다."

그리고 매스컴의 관심은 분명히 이득으로 돌아왔다. 발표 세달 전까지 회사는 매달 200개 가량의 신규 거래를 텄다. 6월에는 350개 업체가 가입했다.

새 거래처들은 앞으로 12~18개월 간은 실제적인 수입이 되지 못할 것이라고 프라이스가 말했다. 그 동안 프라이스는 자신의 형이 걸어온 소송에 맞서야 한다. 루카스 프라이스는 요 몇년 간 회사 경영 일선에 적극적으로 참여하지 않았지만, 어찌되었건 회사 지분의 30퍼센트를 가지고 있다. 새 계획을 발표하기 한참 전부터 둘 사이엔 갈등이 있었고, 루카스는 미정의 액수와 더불어 피해보상을 요구해왔다.

시애틀에 살고 있는 루카스는 인터뷰를 거부했지만 이메일을 보내왔다: "댄은 제 지분에 대한 이익액을 분배하지 않고 회사에서 나온 수십억을 독식했습니다. 다른 한편으로는 자신의 과반 지분을 이용해 주주로서의 제 의견을 무시해 왔습니다." 루카스는 자신의 항의가 연봉 인상안보다 앞서 있었다고 말했다.

어찌되었건 간에, 사건 결과가 둘에게 꽤나 중요한 사안이라는 건 분명해보인다. 임금안이 적용된 후 짧은 기간만 놓고 본다면, 루카스의 주식을 다 사들일 돈은 커녕, 세금을 내거나 회사의 장기적인 재무 상태를 나아지게 할 돈도 넉넉치는 않다고 댄이 말했다.

댄은 고소장이 날아왔을 때는 꽤 어리둥절하고 놀랐다면서, 루카스가 2012년부터 110만 달러(약 12억 7천만원)의 연봉과 보너스를 받는 안에 동의했었다고 말했다.

사업을 둘러싼 가족간의 싸움은 추해보일 수 있고 종종 돈 이상의 것이 되어버리곤 한다. 댄은 자신이 루카스의 공헌을 대수롭지 않게 여겼던 적이 있다고 인정했다. "첫 2년 간 루카스의 도움이 없었다면 전 이렇게 회사를 키워나갈 기회를 얻지 못했을 겁니다"라고 댄이 말했다.

루카스는 댄의 결혼식에서 다른 두 명의 친구와 들러리를 섰고, 종종 같이 산을 타고 파도타기를 하고 야구를 보러 갔었다. 끝에 가서는 "같이 사업을 시작한 게 서로 간의 관계에는 최악의 결정이었네요"라고 댄이 말했다. 소장이 접수된 후 댄은 다른 가족들에게 전화해 자신과 루카스 둘 모두를 위한 "변함없는 애정과 지지"를 부탁했다.(동생인 23세의 알렉스 역시 그래비티에서 일하고 있다.)

두 아들 간의 싸움에 대해, 론 프라이스는 "아내와 저는 밤잠을 못 이루고 걱정하고 있습니다. 문제를 잘 해결할 거라 생각해요"라고 말했다.

댄 프라이스는 자택을 비롯한 자신의 현재 순자산을 300만 달러(약 34억원) 정도로 추산했고, "자신의 개인적인 재산 전부와 차후 몇년 간 수입 전부를 내주겠다"고 제안했었다 말했다. 재판은 5월에 열렸었다.

지금을 보자면, 적어도 프라이스가 많은 직원들의 삶을 순식간에 바꿔놓은 건 의심의 여지가 없다. 장비팀을 관리하는 30세의 조세 가르시아는 시내로 이사올 여유가 생겼고 낡아빠진 타이어를 교체했다. 어릴 때 잠시 노숙자 생활도 경험했던 오티즈는 벌링턴에 사는 자신의 가족들을 방문할 여유가 생겼다. 동부 워싱턴의 집에서 떠나와 영업을 뛰고 있던 22세의 버몬트 코디 부르먼은, 드디어 경제적 압박감에서 벗어나 아내와 가정을 꾸릴 수 있게 되었다.

다른 영향도 있었다. '아빠네 피자&파스타'를 운영하는 마리오 자하리브는 프라이스가 뉴스에 나온 것을 보고 그래비티로 거래처를 옮겼다. 매달 드는 제경비가 1700달러에서 900달러로 감소했다는 걸 알고 자하리브는 "차익을 독식할 수는 없다"고 결심했다. 자하리브는 차액을 8명의 직원의 임금을 인상하는 데에 사용했다.

시애틀의 벤쳐 자본가이자 시의 15달러 최저시급 인상안을 주창했던 닉 하우어는 아빠네 피자의 케이스가 있긴 하지만, 프라이스에게 동조하기가 쉽지는 않다고 말했다. 다만 "이러한 개별적인 움직인은 어떤 것이 가능하고 어떤 것이 정의로운 것인가에 대한 새로운 인식을 불러올 수 있다"고 덧붙였다. 어쨌건 간에 2년 전에는 누구도 이 도시가 최저시급을 올린 것이 온 나라를 들쑤시게 될 거라고 예상치 못했다. "무엇이 거대한 변혁의 촉매가 될 지 누가 단언할 수 있겠어요?"

그런 측면에서, 프라이스의 시도는 임금에 대한 대중적 논란을 불러왔고, 이건 프라이스가 새로이 관심을 가지게 된 수상스키와 그다지 다르지 것 없다. 모터보드가 만들어낸 항적의 결을 타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니다. 파도에서 너무 먼곳에서 몸을 젖히거나 바로 뒤에 붙어 가로지르려 하면 고꾸라지기 마련이다. 지금 프라이스는 물마루에서 균형을 잡고 있는 상황이고, 즐겁게 달리는 동시에 최선을 다해 나아가야할 때이다.










한국경제의 엉터리 기사를 다시 한번 보실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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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역풍 맞은 미국 스타트업의 '경영 포퓰리즘'
    A급 인재들 떠나고 CEO는 재정난…집까지 내놔
지난 4월 자신의 연봉 90%를 반납해 직원들의 최저임금을 연 7만달러(약 8200만원)로 인상한 스타트업(신생 벤처기업) 창업자가 3개월 만에 우수 인재의 이탈과 자금난으로 경영난을 겪고 있다. 자신이 사는 집까지 임대를 위해 내놓는 등 곤경에 처했다.

(중략)

단기간의 급여 인상이 예상과 달리 생산성 향상이나 업무 성과 증대로도 이어지지 않았다. 회사에서 웹 개발을 맡았던 그랜트 모란은 “직원들이 단순히 출퇴근 카드에 도장을 찍기 위해 회사에 다녔고 결과적으로 뛰어난 성과를 올리던 직원들의 동기를 떨어뜨렸다”고 말했다.

회사의 영업도 어려움을 겪었다. 일부 고객은 프라이스의 최저임금 인상이 정치적 동기에서 시작된 것이라며 관계를 끊었고, 일부 고객은 프라이스가 수수료 인상을 기대했다고 실망하며 거래를 중단하기도 했다.

무엇보다 프라이스를 곤경에 빠뜨린 것은 친형이자 회사 지분 30%를 보유한 공동 창업자 루카스 프라이스가 그를 상대로 소송을 제기한 것. 최저임금 인상 결정 으로 회사를 잠재적 위험에 빠뜨렸다는 게 이유였다.

지난해 회사가 벌어들인 영업이익 220만달러는 급여 인상으로 모두 소진됐고, 소송비용이 감당할 수 없을 정도로 쌓이면서 프라이스는 자신의 집을 내놓는 상황까지 몰렸다.



애초에 11년 된 그래비티는 스타트업도 아니고, 작년에 7조 가까운 금액을 중계한 꽤 튼실한 기업으로 보입니다.
우수 인재의 퇴사 운운하고 있는데 두명 퇴사했다고 업무가 마비될 사이즈의 회사도 아닙니다-_-
원 기사는 프라이스의 결정 이후로 주변에서 일어난 다양한 변화와 의견에 대해 복합적으로 이야기하고 있는데,
한경은 진짜 악의적이라고 해야할 정도로 부정적인 반응과 의견만 쏙쏙 빼다 썼네요.

이심기 기자님. 수준 떨어지고 한심할 순 있습니다. 하지만 적어도 비열하지는 말아야죠.
출처 http://www.nytimes.com/2015/08/02/business/a-company-copes-with-backlash-against-the-raise-that-roared.html?smid=pl-shar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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