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테렌의 편력기사, 죽기를 자청하다.
게시물ID : freeboard_1687010짧은주소 복사하기
작성자 : 눈팅만8년
추천 : 3
조회수 : 366회
댓글수 : 1개
등록시간 : 2017/12/20 08:59:4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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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색 바람이 거칠게 숨을 몰아쉬었다나는 녀석의 갈기를 부드럽게 쓰다듬고고개를 숙여서 녀석의 귓가에 쉿쉿 소리를 내었다놈은 내게는 너무 과분한 말이었다나 같은 반푼어치기사라고 부를 수도 없는 놈에겐너무 과분한 놈이었다녀석은 지쳐있는게 아니었다녀석은 분노하고 있었다그러나 무엇에? ‘백색 바람은 명마였지만그렇다고 해도 이 아이가 우리의 고뇌를 십분 이해하고 있을까아니아니야나 조차도 우리를 둘러싼이 브레토니아라는 허울 뿐인 허상을 둘러싼 고뇌를 이해하고 있지 못한단 말이야그러나 과연 누가 그것을 이해할까원정대의 누구도 그것을 이해하고 있진 못할 것이다하지만 빌어먹을우리는 이 산맥을 가로지르고 있다누군가 이유를 묻는다면나는 이렇게 대답하리라.

테렌의 편력 기사가 기적을 행했을 때나도 그곳에 있었다.


이 쓰레기반푼어치 기사농노들의 약탈꾼인 이 몸에게도 유년기의 순수했던 시절이 있었다나는 귀족 자제 누구나 그렇듯 기사를 꿈꿨고특히나 고행 끝에 성배를 마셔 초인이 된 민초들의 수호자그런 성배기사를 꿈꿨다호수의 여인에게 젋음과 용맹을 바치고영원히 남는 명예를 택하는 삶을.

그런 장래를 꿈꾸게 된 것은 내 가문의 사정이 어느정도 얽혀있었다나는 지방 소귀족의 자제였고작위 계승 서열로는 아득하게 뒤 쪽이었다농노들은 늘 그렇듯 내게 머리를 조아렸지만내 시선은 아득하게 위로 향해있었고내가 서있는 이 땅이 내게는 어울리지 않다고 느꼈다유년기의 나에게 삶은 마치 음모에 희생된 위대한 기사의 비극적인 유배지 정도로 느껴졌다.

그건 사실이 아니었다나는 위를 바라볼 자격이 없는 놈이었고내 검세와 인품이 그것을 증명했다곧잘 농노들을 기분대로 괴롭히는게 내 일과였고대련에서는 죽을 쑤기 일쑤였다그럼에도 나는 여정을 떠났다솔직히 말해 그건 여정이라고 부르기도 민망한일종의 소풍과도 같았다영지민들을 쥐어짜서 채운 두둑한 식량과 꽤 많은 호위병력.

나는 국경지대로 향했다다 죽어가는 야수인간이나 그린스킨 몇 놈을 죽이고 명성을 얻어보자나는 그렇게 생각했다테렌은 그저 지나가는 장소였을 뿐이었다테렌테렌이제는 어렴풋하게 떠오르는 그 이름.

 

테렌은 지방의 변변치 않은 마을이었다숲을 귀퉁이에 끼고 있는 곳이었는데도무지 나로서는 그런 위험한 곳에 자리를 튼 농노들이 이해가 가지 않았다놈들은 멍청해어린 나는 그렇게 생각했다나이가 조금 차고 나서야 농노들이 귀족들의 착취를 피해 그런 곳까지 도망간 것이었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테렌의 여관에서 여장을 풀었을 때나는 거적떼기를 두른 한 명의 거지 노인네를 보았다남자의 몸은 단련되어 있었고근육질인 것이 삐쩍 마른 농노로는 보이지 않았다필경 어느 귀족의 시종 출신 거지이리라나는 그렇게 생각하고 그 쪽에는 눈길도 주지 않았다.

기사나리신가?“

거지가 그렇게 물었다묘하게 빈정대는 늬앙스였다나는 눈썹을 찡그리고 거지를 쏘아보며 말했다.

네 놈들의 주인이시지.”

나리제 주인은 나의 여인이요그리고 그 분은 변덕이 심하시지.”

꼬부라진 혀로 거지가 대답했다농노에게 그런 모욕이라니나는 허리춤에 찬 칼에 손을 올렸다종자 하나가 내 팔을 붙잡고 만류했다나리술 취한 거지일 뿐 입니다시종이 간절히 말했다여관의 주인도 몸을 숙이고 지껄였다기사 나으리자비를 베푸시는게 나을 겝니다광인을 죽이면 살이 끼는 법입니다.

.”

나는 코웃음을 한 번 치고 여관을 빠져 나왔다칼을 휘두르고 싶었다.

 

무료해하는 내게 종자 하나가 다가와 넌지시 말했다.

별로 흥미로운 곳은 없는 것 같습니다그도 그럴 것이이 일대는 깡촌이라서요. “

하룻밤 묵고 나서 바로 떠난다광인 때문에 기분을 잡쳤다.”

나으리 … 그런데나으리별 소문은 아닌데재미있는 이야기가 돌더군요.”

나는 관심도 없다는 듯 어설프게 검을 휘두르며 대답했다.

뭐냐.”

숲 속에서 흰 말을 봤다는 농노가 있습니다장식된 안장에 아름다운 놈이었답니다.”

마구간을 도망친 놈인가?”

그건 모르겠습니다만이 일대에는 흰 말을 보는 것이 재앙의 징조라고 합니다근방의 부락도 흰 말을 보고 나서 야수 떼의 습격을 받았다고 합니다.”

농노들이란항상 말도 안 되는 소문들을 퍼트리지.”

그러게나 말입니다요.”

테렌의 일화는 이미 유명해졌기에 덧붙일 필요 없겠지만그 때의 나는 겁이 없었고멍청했다

그날 밤야수 인간 무리가 테렌을 습격했다.

 

패닉은 나무꾼 하나의 잘린 머리가 방책을 넘어 날아오면서 시작되었다테렌은 수비병력이라고 할 만한게 없었다농노들은 기사들의 보호보다는 굶주림을 달래는 것을 선택했다나중에야 알았지만그 정도의 대규모 습격은 그때가 처음이었다고 한다겨우 산발적인 무리의 습격만을 상대하던 자경단은 그 괴수, ‘마귀 발톱을 상대로는 철저하게 개박살이 났다.

마귀 발톱은 브레토니아 남부의 이름난 야수 인간 군벌이었다놈의 습격은 추측할 수도그렇다고 반응할 수도 없기로 유명했다때로는 주둔한 군대를 상대로 야습을 걸기도 했으며때로는 전혀 약탈할 것이 없는 촌락을 대상으로 하기도 했다어느 날은 동부 마을에 공성을 걸다가또 다음날은 해안가 어촌을 약탈하기도 했다나는 운이 없었다아니테렌은 운이 없었다나는 기사라는 이름이 무색하게 검을 버리고 벌벌 떨었으며내 호위 병력은 그런 나를 쳐다보더니 모두 마을 밖으로 도망쳤다.

 

나는 여관의 구석 한 켠에 숨어 한번도 제대로 쓰지 않아 깨끗하기 짝이 없는 갑주와 무구를 두른 채 새벽이 빨리 찾아오기를 빌었다그것들이 나를 찾지 않길 바라며농노들이 비명을 지르며 여관의내가 숨어있던 다락방에 찾아왔을 때나는 그들의 비명을 막기 위해 내 칼을 그들의 목에 찔러 넣었다내 검어린 내가 야수 도살자라고 이름 붙인 검에 최초로 피가 묻은 순간이었다나는 쓰레기였다.

계단을 딛는 발굽소리를 느끼자나는 혼절할 것만 같은 공포에 사로잡혀 다락 밖으로 몸을 던졌다갑옷의 무게에도 불구하고운이 좋았는지 나빴는지 야수 인간의 육체 위로 떨어졌기에 다치지 않을 수 있었다엉겁결에 그들의 동료를 죽인 내게 야수 인간들이 거센 고함을 질렀다나는 겁에 질린 아이 같은 비명을 질렀다야수인간들이 창을 들고 돌진했다.

그리고그가 나타났다.

 

초로의 기사가흠집투성이 갑옷에 거적데기를 두른 기사가흰 수염에 기품이 서린 눈매그리고 무엇보다도 아름다운 후광을 두른 기사가 나타났다내가 거지라고 비웃던 그 광인이 눈처럼 흰 말을 타고빛나는 검을 들고 나타나 야수인간들을 아름다운 품세로 짓밟았다그것은 실로 아름다운 모습이었다내가 되고 싶던 모습이었다.

기사나리신가?”

기사가 유쾌한 어조로 내게 물었다나는 아무런 대답을 하지 못했다기사가 즐거운 듯이 악의없는 미소를 지으며눈 앞의 야수 떼를 도륙했다무슨 용맹이 솟은 걸까그 기사를 보자 나도 모르게 가슴 한 켠이 뜨거워졌고어느새 나도 일어나 어설픈 몸짓으로 야수를 베어넘겼다겨우 하나를 쓰러트리고 숨을 몰아쉬었다기사가 소리내어 웃었다.

기사나리셨군!”

뿔나팔 소리가 전장을 울렸다기사가 굳은 표정으로 그 방향을 노려보았다부러진 한쪽 뿔과 기괴하게 뒤틀린 왼손을 가진 야수 인간이 수십은 되는 거대한 무리를 이끌고 이 곳으로 다가오고 있었다초로의 기사가 말했다.

마귀 발톱드디어 십 수년의 추적이 빛을 발하는구나내 오랜 친구가 죽을 자리를 찾아왔도다.”

마을 반대편의 마귀 발톱이 분노를 담은 고함소리로 화답했다그를 둘러싼 야수 인간들도 공명하듯이 하늘 높이 뇌성을 질렀다겨우 솟은 용맹이 너무나도 허무하게 무너졌다나는 울음을 터트리며 손에 쥔 칼을 떨어트렸다초로의 기사는 나를 흘긋 보더니자애로운 목소리로 그의 백마의 귀에 속삭였다.

“’백색 바람’, 내 형제여너는 할 일을 마쳤다내 마지막 부탁을 들어다오.”

백마는 내키지 않은 듯 고개를 휘저었으나곧 얌전히 땅을 쳐다보았다기사가 내 쪽을 돌아보며 말했다.

젋은 기사여이 곳은 나의 전장지금은 호수의 여신께서 내게 하사한 임무를 마치기에 더 알맞을 수 없는 순간이로다나는 오늘 여기서 내 오랜 호적수인 마귀발톱을 죽이고그의 군대를 박살내 나의 여인의 이름을 드높일 생각이다.”

기사가 백마의 등에서 가볍게 내렸다.

가라이 곳에서 벗어나라이는 이름을 버린 이 몸이 기사로서 후배에게 내리는 명이자성배 기사로서 브레토니아의 아들에게 하는 부탁이니라가서 테렌의 편력기사가 마귀발톱을 죽이고그 고행의 끝을 보았음을 증언하라.”

백마가 낑낑대며 나를 핥았다나는 울음을 삼키고 기사를 바라보았다그의 후광이 눈에 부셨다기사는 내게 여유롭게 웃어보이고는허리춤의 칼을 뽑아 마귀 발톱 쪽으로 고개를 돌렸다.

테렌의 편력기사는 노호를 지르며 무리를 향해 달려갔다수 많은 야수가 그를 향해 달려들었다하나 둘 편력기사의 손에 목숨을 잃었다무리가 그를 둘러싸서 더 이상 그와 야수 떼를 분간할 수 없었을 때 쯤나는 정신없이 백색 바람의 등에 올라 테렌을 벗어났다한참을 끅끅대며 울음을 삼켰고마침내 꽤 먼 거리까지 도망쳐왔다는 생각이 들 때쯤나는 멀리서 어느 야수 인간의 커다란 비명소리를 들었다그것은 보통 야수 인간의 비명이라고 하기에는 너무 크고거칠었다.

 

나는 기사가 되지 못했다집으로 돌아온 나를 텅 빈 영지가 맞아주었다계승 서열 상위였던 내 형제들은 모두 여정 도중 야수밥이 되었거나또는 성배기사 노릇을 하겠다고 실종되었고오직 겁쟁이처럼 꽁무니를 뺀 나만이 살아 돌아와있었다나는 그날 이후로 검을 쥐지 않았다백색 바람을 영지에서 먼 산에 풀어주고테렌의 편력 기사 이야기를 인근 마을에 익명의 투서로 뿌린 뒤 모든 것을 잊었다아니잊기로 결심했다.

나는 기사가 될 수 없었고그 사실은 테렌에서 명확해졌다나는 쓰레기였고쓰레기는 쓰레기다운 삶을 영위해야 했다농노들을 착취하고계집들을 빼앗아갔으며작물에 침을 뱉었다밤에는 이따금 환상으로 들려오는 마귀발톱의 비명소리에 잠을 깼으며새벽녘 동이 틀때면 저 멀리 능선에 비치는나를 조용히 응시하는 백마의 형상에 욕지기를 토했다.

 

그 날우리의 여인이 누구였는지 세상에 밝혀진 그 순간최후의 때가 도래한 그 순간나는 테렌의 편력기사의 옛 목소리를 꿈 속에서 들었다기사나리신가? 그는 그렇게 물었다동이 텄는데도 지독하게 어둡던먹구름이 꼈던 그 날에 나는 거울을 보았다기사나리신가나는 스스로에게 그렇게 물었다나는 아무런 대답도 하지 않고먼지에 덮인 나의 갑옷과 랜스를 꺼냈다성 밖에 백색 바람이 기다리고 있었다.

나는 산맥을 가로지른다우리는 산맥을 가로지른다우리는 기사인가아니우리는 기사가 아니었다우리는 실체 없는 허상에 명예를 걸었다우리는 그것이 정의고그것이 기사도라고 믿었다어느 누구도 기사가 아니었다그러나 아무도 그것을 입 밖에 내지 않는다.

테렌의 편력 기사는 그 사실을 모르고 있었을 것이다그렇기 때문에 그는 스스로를 기사라고 믿었고나를 기사라고 불렀었다그는 바보였다그러나 그가 스스로를 기사라고 선언하는 순간그는 수 십의 야수인간과괴물 같은 적의 수장을 단신으로 베어 넘기는 기적을 보였다젠장그게 기사가 아니면 무엇이겠냐는 말이야단신으로스스로가 믿는 여인의 이름을 외치며 군대와 대적하는게 기사가 아니면 무엇이겠냐고.

이 곳의 누구에게나 테렌의 편력기사가 존재한다스스로가 그렇게 되기를 바라마지 않던 훌륭한 기사타의 귀감이 되는멋있고 강인하고 고결한우리는 최후의 순간에우리를 지탱하던 모든 것이 무너진 그 순간 그 기사의 모습을 떠올렸다그래서 우리는 여기 있고그래서 우리는 산맥을 가로지른다.

 

저 멀리군대에 포위된 성이 보였다하늘은 금방이라도 무너질 듯 붉었고괴수들의 고함소리와 인간의 비명소리가 멀리서 들려오고 있었다백색 바람이 푸르르하는 소리를 내었다나는 녀석의 목을 쓰다듬었다이름 모를 종자 하나가 내게 랜스를 건넸고굳센 목소리로 무어라 말했다나는 어설프게 기사의 예를 취하고 랜스를 받아들었다생각만큼 무겁지는 않았다.

 


테렌의 편력기사는 마귀 발톱을 무찌르고테렌을 구원했도다겸양의 미덕을 갖춘 그는 드높아진 명성과 그를 선망하는 자들을 피해 홀연히 사라졌다그러나 최후의 순간테렌의 편력기사가 백마를 타고 왕의 군세에 합류했도다.

명마 백색 바람은 흐르는 세월에도 변함없이 날래고 용맹했으며테렌의 편력기사는 마치 십 수년의 시간을 거슬러 젋어진 듯한 모습이었으니그의 용맹한 검과 창 날에 수 많은 악마와 그 시종들이 그 목숨을 잃었고우리 음유시인들의 노래가 북구의 사가보다 드높아지는 순간이더라.

-      작자 미상음유시인의 노래 테렌의 편력기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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