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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색 바람’이 거칠게 숨을 몰아쉬었다. 나는 녀석의 갈기를 부드럽게 쓰다듬고, 고개를 숙여서 녀석의 귓가에 쉿쉿 소리를 내었다. 놈은 내게는 너무 과분한 말이었다. 나 같은 반푼어치, 기사라고 부를 수도 없는 놈에겐, 너무 과분한 놈이었다. 녀석은 지쳐있는게 아니었다. 녀석은 분노하고 있었다. 그러나 무엇에? ‘백색 바람’은 명마였지만, 그렇다고 해도 이 아이가 우리의 고뇌를 십분 이해하고 있을까? 아니, 아니야. 나 조차도 우리를 둘러싼, 이 브레토니아라는 허울 뿐인 허상을 둘러싼 고뇌를 이해하고 있지 못한단 말이야. 그러나 과연 누가 그것을 이해할까? 원정대의 누구도 그것을 이해하고 있진 못할 것이다. 하지만 빌어먹을, 우리는 이 산맥을 가로지르고 있다. 누군가 이유를 묻는다면, 나는 이렇게 대답하리라.
테렌의 편력 기사가 기적을 행했을 때, 나도 그곳에 있었다.
이 쓰레기, 반푼어치 기사, 농노들의 약탈꾼인 이 몸에게도 유년기의 순수했던 시절이 있었다. 나는 귀족 자제 누구나 그렇듯 기사를 꿈꿨고, 특히나 고행 끝에 성배를 마셔 초인이 된 민초들의 수호자, 그런 성배기사를 꿈꿨다. 호수의 여인에게 젋음과 용맹을 바치고, 영원히 남는 명예를 택하는 삶을.
그런 장래를 꿈꾸게 된 것은 내 가문의 사정이 어느정도 얽혀있었다. 나는 지방 소귀족의 자제였고, 작위 계승 서열로는 아득하게 뒤 쪽이었다. 농노들은 늘 그렇듯 내게 머리를 조아렸지만, 내 시선은 아득하게 위로 향해있었고, 내가 서있는 이 땅이 내게는 어울리지 않다고 느꼈다. 유년기의 나에게 삶은 마치 음모에 희생된 위대한 기사의 비극적인 유배지 정도로 느껴졌다.
그건 사실이 아니었다. 나는 위를 바라볼 자격이 없는 놈이었고, 내 검세와 인품이 그것을 증명했다. 곧잘 농노들을 기분대로 괴롭히는게 내 일과였고, 대련에서는 죽을 쑤기 일쑤였다. 그럼에도 나는 여정을 떠났다. 솔직히 말해 그건 여정이라고 부르기도 민망한, 일종의 소풍과도 같았다. 영지민들을 쥐어짜서 채운 두둑한 식량과 꽤 많은 호위병력.
나는 국경지대로 향했다. 다 죽어가는 야수인간이나 그린스킨 몇 놈을 죽이고 명성을 얻어보자, 나는 그렇게 생각했다. 테렌은 그저 지나가는 장소였을 뿐이었다. 테렌, 테렌. 이제는 어렴풋하게 떠오르는 그 이름.
테렌은 지방의 변변치 않은 마을이었다. 숲을 귀퉁이에 끼고 있는 곳이었는데, 도무지 나로서는 그런 위험한 곳에 자리를 튼 농노들이 이해가 가지 않았다. 놈들은 멍청해, 어린 나는 그렇게 생각했다. 나이가 조금 차고 나서야 농노들이 귀족들의 착취를 피해 그런 곳까지 도망간 것이었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테렌의 여관에서 여장을 풀었을 때, 나는 거적떼기를 두른 한 명의 거지 노인네를 보았다. 남자의 몸은 단련되어 있었고, 근육질인 것이 삐쩍 마른 농노로는 보이지 않았다. 필경 어느 귀족의 시종 출신 거지이리라. 나는 그렇게 생각하고 그 쪽에는 눈길도 주지 않았다.
“기사나리신가?“
거지가 그렇게 물었다. 묘하게 빈정대는 늬앙스였다. 나는 눈썹을 찡그리고 거지를 쏘아보며 말했다.
“네 놈들의 주인이시지.”
“나리, 제 주인은 나의 여인이요, 그리고 그 분은 변덕이 심하시지.”
꼬부라진 혀로 거지가 대답했다. 농노에게 그런 모욕이라니! 나는 허리춤에 찬 칼에 손을 올렸다. 종자 하나가 내 팔을 붙잡고 만류했다. 나리, 술 취한 거지일 뿐 입니다. 시종이 간절히 말했다. 여관의 주인도 몸을 숙이고 지껄였다. 기사 나으리, 자비를 베푸시는게 나을 겝니다, 광인을 죽이면 살이 끼는 법입니다.
“흥.”
나는 코웃음을 한 번 치고 여관을 빠져 나왔다. 칼을 휘두르고 싶었다.
무료해하는 내게 종자 하나가 다가와 넌지시 말했다.
“별로 흥미로운 곳은 없는 것 같습니다. 그도 그럴 것이, 이 일대는 깡촌이라서요. “
“하룻밤 묵고 나서 바로 떠난다. 광인 때문에 기분을 잡쳤다.”
“예, 예. 나으리 … 그런데, 나으리, 별 소문은 아닌데, 재미있는 이야기가 돌더군요.”
나는 관심도 없다는 듯 어설프게 검을 휘두르며 대답했다.
“뭐냐.”
“숲 속에서 흰 말을 봤다는 농노가 있습니다. 장식된 안장에 아름다운 놈이었답니다.”
“마구간을 도망친 놈인가?”
“그건 모르겠습니다만, 이 일대에는 흰 말을 보는 것이 재앙의 징조라고 합니다. 근방의 부락도 흰 말을 보고 나서 야수 떼의 습격을 받았다고 합니다.”
“농노들이란, 항상 말도 안 되는 소문들을 퍼트리지.”
“그러게나 말입니다요.”
테렌의 일화는 이미 유명해졌기에 덧붙일 필요 없겠지만, 그 때의 나는 겁이 없었고, 멍청했다.
그날 밤, 야수 인간 무리가 테렌을 습격했다.
패닉은 나무꾼 하나의 잘린 머리가 방책을 넘어 날아오면서 시작되었다. 테렌은 수비병력이라고 할 만한게 없었다. 농노들은 기사들의 보호보다는 굶주림을 달래는 것을 선택했다. 나중에야 알았지만, 그 정도의 대규모 습격은 그때가 처음이었다고 한다. 겨우 산발적인 무리의 습격만을 상대하던 자경단은 그 괴수, ‘마귀 발톱’을 상대로는 철저하게 개박살이 났다.
‘마귀 발톱’은 브레토니아 남부의 이름난 야수 인간 군벌이었다. 놈의 습격은 추측할 수도, 그렇다고 반응할 수도 없기로 유명했다. 때로는 주둔한 군대를 상대로 야습을 걸기도 했으며, 때로는 전혀 약탈할 것이 없는 촌락을 대상으로 하기도 했다. 어느 날은 동부 마을에 공성을 걸다가, 또 다음날은 해안가 어촌을 약탈하기도 했다. 나는 운이 없었다. 아니, 테렌은 운이 없었다. 나는 기사라는 이름이 무색하게 검을 버리고 벌벌 떨었으며, 내 호위 병력은 그런 나를 쳐다보더니 모두 마을 밖으로 도망쳤다.
나는 여관의 구석 한 켠에 숨어 한번도 제대로 쓰지 않아 깨끗하기 짝이 없는 갑주와 무구를 두른 채 새벽이 빨리 찾아오기를 빌었다. 그것들이 나를 찾지 않길 바라며. 농노들이 비명을 지르며 여관의, 내가 숨어있던 다락방에 찾아왔을 때, 나는 그들의 비명을 막기 위해 내 칼을 그들의 목에 찔러 넣었다. 내 검, 어린 내가 야수 도살자라고 이름 붙인 검에 최초로 피가 묻은 순간이었다. 나는 쓰레기였다.
계단을 딛는 발굽소리를 느끼자, 나는 혼절할 것만 같은 공포에 사로잡혀 다락 밖으로 몸을 던졌다. 갑옷의 무게에도 불구하고, 운이 좋았는지 나빴는지 야수 인간의 육체 위로 떨어졌기에 다치지 않을 수 있었다. 엉겁결에 그들의 동료를 죽인 내게 야수 인간들이 거센 고함을 질렀다. 나는 겁에 질린 아이 같은 비명을 질렀다. 야수인간들이 창을 들고 돌진했다.
그리고, 그가 나타났다.
초로의 기사가, 흠집투성이 갑옷에 거적데기를 두른 기사가, 흰 수염에 기품이 서린 눈매, 그리고 무엇보다도 아름다운 후광을 두른 기사가 나타났다. 내가 거지라고 비웃던 그 광인이 눈처럼 흰 말을 타고, 빛나는 검을 들고 나타나 야수인간들을 아름다운 품세로 짓밟았다. 그것은 실로 아름다운 모습이었다. 내가 되고 싶던 모습이었다.
“기사나리신가?”
기사가 유쾌한 어조로 내게 물었다. 나는 아무런 대답을 하지 못했다. 기사가 즐거운 듯이 악의없는 미소를 지으며, 눈 앞의 야수 떼를 도륙했다. 무슨 용맹이 솟은 걸까. 그 기사를 보자 나도 모르게 가슴 한 켠이 뜨거워졌고, 어느새 나도 일어나 어설픈 몸짓으로 야수를 베어넘겼다. 겨우 하나를 쓰러트리고 숨을 몰아쉬었다. 기사가 소리내어 웃었다.
“기사나리셨군!”
뿔나팔 소리가 전장을 울렸다. 기사가 굳은 표정으로 그 방향을 노려보았다. 부러진 한쪽 뿔과 기괴하게 뒤틀린 왼손을 가진 야수 인간이 수십은 되는 거대한 무리를 이끌고 이 곳으로 다가오고 있었다. 초로의 기사가 말했다.
“마귀 발톱, 드디어 십 수년의 추적이 빛을 발하는구나! 내 오랜 친구가 죽을 자리를 찾아왔도다.”
마을 반대편의 마귀 발톱이 분노를 담은 고함소리로 화답했다. 그를 둘러싼 야수 인간들도 공명하듯이 하늘 높이 뇌성을 질렀다. 겨우 솟은 용맹이 너무나도 허무하게 무너졌다. 나는 울음을 터트리며 손에 쥔 칼을 떨어트렸다. 초로의 기사는 나를 흘긋 보더니, 자애로운 목소리로 그의 백마의 귀에 속삭였다.
“’백색 바람’, 내 형제여. 너는 할 일을 마쳤다. 내 마지막 부탁을 들어다오.”
백마는 내키지 않은 듯 고개를 휘저었으나, 곧 얌전히 땅을 쳐다보았다. 기사가 내 쪽을 돌아보며 말했다.
“젋은 기사여, 이 곳은 나의 전장. 지금은 호수의 여신께서 내게 하사한 임무를 마치기에 더 알맞을 수 없는 순간이로다. 나는 오늘 여기서 내 오랜 호적수인 마귀발톱을 죽이고, 그의 군대를 박살내 나의 여인의 이름을 드높일 생각이다.”
기사가 백마의 등에서 가볍게 내렸다.
“가라, 이 곳에서 벗어나라. 이는 이름을 버린 이 몸이 기사로서 후배에게 내리는 명이자, 성배 기사로서 브레토니아의 아들에게 하는 부탁이니라. 가서 테렌의 편력기사가 마귀발톱을 죽이고, 그 고행의 끝을 보았음을 증언하라.”
백마가 낑낑대며 나를 핥았다. 나는 울음을 삼키고 기사를 바라보았다. 그의 후광이 눈에 부셨다. 기사는 내게 여유롭게 웃어보이고는, 허리춤의 칼을 뽑아 마귀 발톱 쪽으로 고개를 돌렸다.
테렌의 편력기사는 노호를 지르며 무리를 향해 달려갔다. 수 많은 야수가 그를 향해 달려들었다. 하나 둘 편력기사의 손에 목숨을 잃었다. 무리가 그를 둘러싸서 더 이상 그와 야수 떼를 분간할 수 없었을 때 쯤, 나는 정신없이 백색 바람의 등에 올라 테렌을 벗어났다. 한참을 끅끅대며 울음을 삼켰고, 마침내 꽤 먼 거리까지 도망쳐왔다는 생각이 들 때쯤, 나는 멀리서 어느 야수 인간의 커다란 비명소리를 들었다. 그것은 보통 야수 인간의 비명이라고 하기에는 너무 크고, 거칠었다.
나는 기사가 되지 못했다. 집으로 돌아온 나를 텅 빈 영지가 맞아주었다. 계승 서열 상위였던 내 형제들은 모두 여정 도중 야수밥이 되었거나, 또는 성배기사 노릇을 하겠다고 실종되었고, 오직 겁쟁이처럼 꽁무니를 뺀 나만이 살아 돌아와있었다. 나는 그날 이후로 검을 쥐지 않았다. 백색 바람을 영지에서 먼 산에 풀어주고, 테렌의 편력 기사 이야기를 인근 마을에 익명의 투서로 뿌린 뒤 모든 것을 잊었다. 아니, 잊기로 결심했다.
나는 기사가 될 수 없었고, 그 사실은 테렌에서 명확해졌다. 나는 쓰레기였고, 쓰레기는 쓰레기다운 삶을 영위해야 했다. 농노들을 착취하고, 계집들을 빼앗아갔으며, 작물에 침을 뱉었다. 밤에는 이따금 환상으로 들려오는 마귀발톱의 비명소리에 잠을 깼으며, 새벽녘 동이 틀때면 저 멀리 능선에 비치는, 나를 조용히 응시하는 백마의 형상에 욕지기를 토했다.
그 날, 우리의 여인이 누구였는지 세상에 밝혀진 그 순간, 최후의 때가 도래한 그 순간, 나는 테렌의 편력기사의 옛 목소리를 꿈 속에서 들었다. 기사나리신가? 그는 그렇게 물었다. 동이 텄는데도 지독하게 어둡던, 먹구름이 꼈던 그 날에 나는 거울을 보았다. 기사나리신가? 나는 스스로에게 그렇게 물었다. 나는 아무런 대답도 하지 않고, 먼지에 덮인 나의 갑옷과 랜스를 꺼냈다. 성 밖에 백색 바람이 기다리고 있었다.
나는 산맥을 가로지른다. 우리는 산맥을 가로지른다. 우리는 기사인가? 아니, 우리는 기사가 아니었다. 우리는 실체 없는 허상에 명예를 걸었다. 우리는 그것이 정의고, 그것이 기사도라고 믿었다. 어느 누구도 기사가 아니었다. 그러나 아무도 그것을 입 밖에 내지 않는다.
테렌의 편력 기사는 그 사실을 모르고 있었을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그는 스스로를 기사라고 믿었고, 나를 기사라고 불렀었다. 그는 바보였다. 그러나 그가 스스로를 기사라고 선언하는 순간, 그는 수 십의 야수인간과, 괴물 같은 적의 수장을 단신으로 베어 넘기는 기적을 보였다. 젠장, 그게 기사가 아니면 무엇이겠냐는 말이야. 단신으로, 스스로가 믿는 여인의 이름을 외치며 군대와 대적하는게 기사가 아니면 무엇이겠냐고.
이 곳의 누구에게나 ‘테렌의 편력기사’가 존재한다. 스스로가 그렇게 되기를 바라마지 않던 훌륭한 기사. 타의 귀감이 되는, 멋있고 강인하고 고결한. 우리는 최후의 순간에, 우리를 지탱하던 모든 것이 무너진 그 순간 그 ‘기사의 모습’을 떠올렸다. 그래서 우리는 여기 있고, 그래서 우리는 산맥을 가로지른다.
저 멀리, 군대에 포위된 성이 보였다. 하늘은 금방이라도 무너질 듯 붉었고, 괴수들의 고함소리와 인간의 비명소리가 멀리서 들려오고 있었다. 백색 바람이 푸르르하는 소리를 내었다. 나는 녀석의 목을 쓰다듬었다. 이름 모를 종자 하나가 내게 랜스를 건넸고, 굳센 목소리로 무어라 말했다. 나는 어설프게 기사의 예를 취하고 랜스를 받아들었다. 생각만큼 무겁지는 않았다.
테렌의 편력기사는 마귀 발톱을 무찌르고, 테렌을 구원했도다. 겸양의 미덕을 갖춘 그는 드높아진 명성과 그를 선망하는 자들을 피해 홀연히 사라졌다. 그러나 최후의 순간, 테렌의 편력기사가 백마를 타고 왕의 군세에 합류했도다.
명마 백색 바람은 흐르는 세월에도 변함없이 날래고 용맹했으며, 테렌의 편력기사는 마치 십 수년의 시간을 거슬러 젋어진 듯한 모습이었으니, 그의 용맹한 검과 창 날에 수 많은 악마와 그 시종들이 그 목숨을 잃었고, 우리 음유시인들의 노래가 북구의 사가보다 드높아지는 순간이더라.
- 작자 미상, 음유시인의 노래 ‘테렌의 편력기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