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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의 단편]친구의 연극
게시물ID : readers_30659짧은주소 복사하기
작성자 : 레콜이
추천 : 8
조회수 : 289회
댓글수 : 1개
등록시간 : 2017/12/19 22:17:24
오늘의 상황
http://www.todayhumor.co.kr/board/view.php?table=readers&no=30643&s_no=30643&page=1
에 댓글로 달았던 문장연습이에요.
많은 분들이 읽어주셨으면해서 게시글로 옮겨와 보았어요!





시립극장을 찾았다. 시청과 같은 부지에 있는 이 건물은 회색빛 사무색 잔뜩인 다른 청사 건물들과는 달리, 고풍스러운 램프 불빛으로 반짝거렸다. 르네상스 시절의 문화에 심취에 있었던 전임 시장의 작품이라지만 바닥에 깔려있는 카펫을 보면 너무 오버한 것이 아닌가 싶었다.

그 한줄짜리 카펫은 무대의 주연 배우들만 걸어들어갈 수 있다고 했다. 카펫은 관리가 까다로워 대단히 큰 행사가 아닌 이상에야 꺼내놓지 않는다는 모양이었다. 이번 무대는 그 유명한 연극계 거장이 참여한다며 홍보도 대대적이고도 지겹도록 했으니 그만한 공도 어지간함에 안쪽이었다.

다만 오랜만에 제 역할 다해보는 귀한 카펫은 친구가 보내준 티켓 한장 달랑 들고 들어온 나는 밟을 수 없는 것이었다. 친구는 다 같이 아직 연극학교를 다니던 시절의 패거리 모두에게 티켓을 보내왔다. 아쉽지만 일이다 뭐다 여유를 낼 수 있었던 것은 나 뿐인듯 했다. 소란스러워졌다. 시립극장의 가장 커다란 문이 열리고 주연 배우들이 걸어들어왔다.

나도 아는 얼굴. 우리가 아직 학교에 있을때에도 교과서에 실리곤 했던 그 거장이 우리 누추한 도시의 하나뿐인 시립극장안으로 걸어들어왔다. 과연, 후광이라고 해야할까 광채라고 해야할까. 전임 시장의 모든 오버스러움이 지금 저 거장이 카펫을 밟는 순간 한꺼번에 다 의미를 찾은 것 같았다.

그리고 그 광채 너머로 따라 들어오는 조연들 행렬 속에 당당한 표정의 친구가 보였다. 이럴수가. 서른 먹고 내 무대도 아닌데도 주변사람들이 이상하게 생각하지 않을까 싶을만큼 가슴이 떨리고 설렜다. 나를 발견한 친구가 그 당당한 표정을 유지하며 눈치만 살짝 보내 나를 아는체 했다.

고풍스런 시립극장. 누구나 알아주는 거장. 그리고 그와 같은 무대. 우리 패거리가 학창시절에 꿈꾸던 모든 것이 이 순간에 있었다. 비록 나는 관객석으로 가겠지만, 분명히 그 꿈이 한번 이뤄진다. 이제부터 30분 후에 연극이 시작되면.

나는 끓어오르는 고양감을 주체할수가 없어 행렬이 안으로 들어가버리고 난 후 바깥으로 뛰쳐나왔다. 그리고 행사장에는 의레있는 출장꽃집에 다가가서 돈을 쥐어주고 꽃다발 하나를 예약했다.

"연극이 끝나자마자 찾으러 올께요. 저거 따로 빼놔주세요."

주인장은 알겠다며 친절한 눈인사를 했다. 이 출장꽃집에서도, 아니 이 광장에 모인 모든 축하상품들 중에서도 가장 화려한게 분명해 보이는 꽃다발을 예약해버렸다. 주책이지 주책이야. 하지만 부려 마땅한 주책이었다. 이정도 부리지 않으면 연극 내내 이 설렘을 주체할 수 없을게 분명했다.

다시 들어서는 극장은 또 느낌이 사뭇 달랐다. 처음 이곳에서 기다릴때 떠다니던 것이 애매한 기대감이었다면, 이제 초라한 도시에서 광활한 연극의 세계로 걸어들어가는 것 같았다. 옛시절 몇번이고 읽어대던 연극의 시나리오 대본에 빗대어 설명하자면 '그것은 응원해 마지 않는 영웅이 전장으로 출정하는 모습을 바라보는 것과 같았다'라는 낯뜨거운 대사가 정확하게 들어맞는 심경이었다.

그리고 시작된 2시간의 연극은, 눈을 돌리는 순간 나와는 무관한 일이 되었겠지만, 나의 인생에 있어서도 너무나도 역사적이었고, 차마 자리를 뜰 수 없을만큼 비극적이었다.

나는 알고 있었다. 느낄 수 있었다. 친구는 저 무대의 누구에게도 꿀리지 않을 만큼 완벽하게 연습이 되어있고, 토씨하나 잊어버릴 수 없을 만큼 집요하게 대사를 외웠고, 그림으로 그릴 수도 있을만큼 선명하게 동선을 파악하고 있을 것이었다. 나는 알 수 있었다. 하지만 나 이외에는 아무도 알 수 없었다. 친구는 틀리고 말았다. 행동을. 대사를. 동선을. 두번, 그리고 세번에 네번을 거듭해서.

거장은 틀림없이 거장이었다. 친구의 실수에 당황해 휘말리기 시작하는 주변 조연들을 순식간에 휘어잡아, 본래의 의도와는 조금 다르겠지만 그래도 선보일 수 있는 장면을 즉석해서 연출해냈다. 덕분에 조소가 될뻔한 관객들의 웃음은 썩 밝은 느낌으로 터져나왔다. 나는 그 즐거운 분위기에 짖눌려 죽을것 같았다. 친구는 끝내 자신의 파멸해버린 속내를 숨기며 웃음기 띈 당당한 표정으로 극을 따라갔다. 실수는 잦아들었다. 원래부터 실력은 있던 녀석이었으니까. 하지만 이미 저 무대에서, 이 극장에서, 이 배우와 관객으로 이루어진 세계에서는 이미 낙인이 찍혀있었다.

'저 사람은 다시 무대에서 볼 일이 없겠네.'

나는 그 낙인이 연출진에게까지 펴져있지 않기만을 기도하는 심정으로 연극이 끝날때까지 자리를 지켰다. 다행히 뒷자리의 관객들은 즐거운 연극이었다며 긍정적인 감상을 떠들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떨려서 안도의 한숨을 내뱉을수가 없었다. 친구가 실수했던것 처럼, 나도 한숨 내뱉기를 실수할것같은 허무맹랑한 감각에 사로잡혀있었다. 그때누군가가 잊고있었다는 듯이 말했다.

"아 맞아. 나 꽃다발 예약해 놨는데. 얼른 찾아와서 줘야지!"

나도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까맣게 잊어버리고 있었다. 나는 곧장 극장 밖으로 뛰쳐나가 출장 꽃집으로 달려갔다. 사람들이 가득 차있었다. 저마다 자신의 배우에게 주고싶은 꽃다발을 골라대느라 난리였다. 그중에도 한 꽃다발은 사람들의 수요를 한몸에 받았지만, 예약되어있다는 카드가 꽂혀있을 뿐이었다. 그리고 그 속으로 걸어들어가, 나는 그 꽃다발을 받아들었다.

사람들의 꽃다발을 바라보는 아쉽다는 시선에서 나는 도망치듯이 다시 극장으로 들어왔다.

그리고 침을 삼키고 각오를 다졌다. 웃는 얼굴로. 그래 웃는 얼굴로 이 꽃다발을 전해야지. 학창시절 익혔던 모든 연기에 대한 배움을 살려서, 끝까지 웃는 표정과 떨리지 않는 목소리로 전해야지. 친구가 사투를 벌여야했던 2시간과 달리 나의 장면은 딱 한컷으로 충분했다. 심호흡을 했다. 다행히 숨을 들이쉬고 내쉬는 것에 실수를 하지는 않았다. 주연 배우들의 대기실은 출입이 통제되어있어서 배우들이 나올때까지 기다려야했지만, 조연들의 대기실은 꽃다발을 전해주고 싶은 사람이 있다면 자유롭게 출입이 가능했다.

나는 떨리는 발을 옮겼다. 그때 대기실에서 호통이 터져나왔다.

"네가 정말 제정신이냐! 제정신 박힌 놈이냐!!"

내가 연기실에 들어서고, 나이 있어보이는 연출진, 아마도 감독인 사람이 누군가를 혼내고 있고, 그 누군가가 내 친구였다. 마치 짜맞추어진 시나리오로 연출된 장면처럼 나는 그 순간에 들어섰다. 이정도의 비극, 학교에선 읽어본적이 없다. 도망치고 싶었다. 이 숨겨질까 싶은 무식하게 화려한 꽃다발을 소매에라도 숨기고 부리나케 무대밖으로 뛰쳐나가고 싶었다. 하지만 친구는 그러지 않았다.

친구는 오늘 하루종일 그랬던 것 처럼 당당한 표정을 연기하고 있었다. 그리고 정말이지 믿을 수 없게도, 나를 보며 친근한 시선으로 아는체를 했다. 그 시선을 따라 연출진의 불똥이 나에게도 튀었다. 그는 사자처럼 콧웃음을 쳤다.

"하! 이것 좀 보라지! 네가 오늘 연극을 아주 잘 했다며, 네 지인이 꽃다발을 선물하러 온 모양이야. 보이냐? 네가 이걸 받을 자격이 있어보이냐!!"

연출은 홧김에 그렇게 내뱉었지만 순간 아무 상관없는 나에게 그런 말을 하는 것은 실례가 된다는 것을 깨달은 것인지, 살짝 주춤하며 대기실의 반대쪽 문으로 걸어나갔다.

"부끄러운줄 알아라!"

마지막 한마디를 덧붙이며.

나는 화가 났다. 친구가 오늘 무대에서 느꼈을 감정을 통감하고 있지만, 그것이 누구의 잘못인가도, 내 꽃다발이 전임시장의 카펫보다 오버스럽다는 것도, 그런것쯤 모두 알고있지만 그럼에도, 나는 이 순간 저 연출을 쫒아가 발이라도 걸어버리고 싶었다. 그리고 이 꽃다발을 얼굴에 집어던지고, 그리고는, 할말이 없을 것이었다. 나는 시나리오는 커녕 망상에도 재능이 없었다.

친구가 다가와 여태껏의 표정을 유지하며 그저 눈빛만으로 아주 정중하게 그러지 말아달라는 시선을 보냈다. 친구는 나를 과대평가했다. 그러지 말라니 뭘 하지 말라는건지. 나는 뭔가를 할만한 상상력도 행동력도 없고, 그런 장면에 대한 리허설도 해보기전에 연극을 그만둔 범재였다.

"잠깐만 기다려줄래."

"아..어."

나는 친구가 앉아있던 자리에 꽃다발을 내려두고, 친구가 짐을 챙겨 돌아오기를 기다렸다. 그리고 친구가 돌아왔을때 한번 내려둔 꽃다발을 다시 집어들어 건넬 용기가 없었다. 친구도 눈치챈 모양인지,

"거기 나둬. 내일 와서 내가 챙길게."

"응.."

우리는 극장 밖으로 나섰다. 연극에 대한 이야기를 하지 않았다. 오랜만이네, 뭐하고 살았어, 그런정도. 나는 멋진 연극이었다는 한마디를 하지 못하는 죄책감에 시달렸다. 우리는 습관처럼 아직 우리가 배우를 꿈꾸고 있던 시절에 모이곤 하던 술집으로 가서, 고기를 구으며 술잔을 따랐다.

그리고 첫 잔, 그리고 첫 마디.

나는 눈을 질끈 감았다. 같이 학교를 다녔던 패거리들. 그녀석들은 항상 첫잔을 나누고 난 후에 얘기했다.

'나 연극 그만두려고.'

나도 해본 말이었다. 그리고 나는 지금 그 말이 눈앞의 친구에게서 나오지 않기만을 광신적으로 바라고 있었다. 내 입에서 튀어나오는 것도 막지 못했으면서, 남의 입에서 튀어나오는 것을 신경을 끊어서라도 막아보려고 내 몸통 속의 알수 없는 내장에다가 죽어라 힘을 쓰고 있었다.

첫잔, 첫모금, 그리고 고기 한점.

친구가 허탈하게 웃었다. 표정이 변했다. 오늘의 연극이, 오늘의 연기가 끝났다. 이제부터 진심이 나온다. 나는 급하게 각오를 다졌다. 친구의 입술이 무대밖의 대사를 뱉었다.

"하하 실수해버렸네; 다음부터 잘해야지뭐. 짤리진 않은 모양이야. 다행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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