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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옛날사람 주의]사랑이 뭐예요? 4편
게시물ID : love_39743짧은주소 복사하기
작성자 : 소리조각
추천 : 14
조회수 : 924회
댓글수 : 1개
등록시간 : 2017/12/18 09:30:37

술을 마시다가 뛰쳐나와서인지 그때의 나는 제정신이 아니었긴 했다. 학교에서 지하철역까지 가는길은 대충 3갈래였다.

가장빠른 지름길이지만, 사람이 많은 길, 

골목쪽으로 돌아서 가지만 그나마 한적해서 친구들과 몰려다니기 좋은 길,

그리고 많이 돌아가긴 하지만, 한적해서 혼자걷기 좋은 길.



나는 당연하다는 듯이 3번으로 뛰어갔다. 그리고 H는 역시나 한적한 길을 따라서 걷고 있었다. 

이어폰을 끼고 워크맨을 만지작 거리던 그녀는 뒤에서 부르는 소리에 놀란 표정을 하면서 돌아보았다. 



"오ㅃ.... 아니 선배님. 어쩐 일이세요?"

"응? 어... 아니... 그게... 너 혼자 갈까봐... 그냥.. 내가 바래다 줄께... 아! 저기 지하철역까지만!"

"아 진짜요?"

그녀는 굉장히 기분좋은 듯이 웃었다. 나는 쑥스러워서 그냥 말없이 앞서서 걷기 시작했다.

"가자."

"아 같이가요 선배님."

그녀는 앞서 걷는 나를 붙잡으면서 자연스럽게 팔짱을 꼈다.



'컥!'



연애감정에 면역력이 없던 내 팔에 감긴 그녀의 팔 때문에 심폐기능이 정지하지 않을까하는 불안감이 엄습했다. H는 자연스럽게 내 팔에 팔짱을 낀채로 밝게 웃고 있었고, 나는 내가 이 상황을 어색해 하고있지 않다는 것을 어필하기 위해서 무슨 말이라도 해야 했다.



"아... 지하철역 참 머네..."

"그러게요. 어 선배님, 괜히 저 때문에 일찍 일어나신거 아니예요?"

"어? 아냐. 나도 그냥 화장실 가고 싶어서 일찍 일어났어."

"근데 화장실을 지하철역으로 가요?"

"아.. 그렇지. 좀 걸어야 이 소화기능도 활발해지고... 변비도 예방할 수 있는법이니까..."

"아 그래요? 남자들은 변비 잘 안걸린다던데?"

"아냐. 우리과처럼 매일같이 술을 퍼먹는 환경에선 남자들도 안심할 수 없지."

"아 그렇네요. 선배님도 야채 안 드시죠?"



아.. 도대체 이게 무슨 개소리냐... 

이렇게 좋은 분위기에 왜 나는 좋아하는 후배에게 변비얘기를 하고 있을까... 

머리속으로는 후회를 하고 있으면서도 내 입은 개드립을 멈출줄 몰랐다.



"화장실 갔다온 사람을 뭐라고 하게?"

"글쎄요?"

"일본사람~~"

"네? 아! 아 뭐예요!!!"

"그럼 깡패중에 제일 건강한 사람이 누구게?"

"누군데요?"

"영양갱~~"

"아 진짜요? 아웃겨 꺄하하하."



H야 넌 진짜 천사나 다름없어. 아 진짜 그때는 내 좌뇌를 꺼내서 명치를 한대 쎄게 치고 싶었다. 

그냥 이따위 개드립에 웃어주는 그녀가 한없이 고마울뿐이었다. 

그렇게 내가 개드립을 치고, 그녀가 억지로 웃어주는 사이에 갑자기 골목 귀퉁이에서 익숙한 얼굴이 튀어나왔다.



"어? S선배님."

"어라?"

"어라?"



우리 셋은 골목의 한 귀퉁이에서 서로 마주친 채로 서로를 빤히 바라보았다. 

S는 무려 남색의 정장(!!!)을 입고 나비넥타이(미친거 아니냐!!)를 맨 차림으로 왼손에는 아마도 학교 앞 꽃집에서 샀을 후리지아 꽃(아마도?)을 든 채로 신나게 걸어오던 중이었다. 

한손에 꽃을 든 채 나비넥타이를 맨 대학생이라... 

지금 생각해도 가스렌지 위에 투척된 마른 오징어처럼 손발이 오그라들어갈 지경이 차림새였지만, 

나는 그것조차도 재 자취방에서 기거하던 밥버러지 같은 친구놈들의 조언이라는 것을 직감했다...




천사가 내게 말했다.

"야 이건 솔직히 말려야 하지 않냐? 저런 차림으로 여자 후배에게 고백하면 여자후배 기분이 어떻겠냐?"



악마도 내게 말했다.

"야 니가 이 장면을 목격한건 엄청난 행운이야! 앞으로 다가올 대학생활의 즐거움을 두배로 늘려줄 특급 찬스라 이말이다. 잘생각해봐. 너랑 S가 게임비와 탕수육 세트를 건 당구를 치는 모습을!! 

너와 S가 동시에 쿠션에 들어갔지만, S에게 그만 빠져나갈 구멍조차 없는 완벽한 우라(바깥 돌리기)찬스가 떴단 말이다! 그때 넌 어떻게 할래?

빙고!!! 바로 이 상황만 옆에서 떠들고 있으면 된다 이 말이야!! S는 알아서 실수를 할거라고!! 너는 그 어떤 상황에서라고 S의 멘탈을 붕괴시킬 수 있는 가장 강력한 아이템을 획득한 것이란 말이다!!!"




아... 아마도 악마의 계략은 날 설득시키기보다는 시간을 끌려고 했던게 확실하다. 우리셋이 약간 벙쪄있는 동안 S는 하얗게 질린 얼굴로 눈치를 살피다가 우리를 지나쳐 도망치기 시작했다.



"어... S 선배....님...... 어디가시지?"

"그... 그러게 말이야... 뭐 저런 옷을 입고..."

"오늘 학교에서 무슨 공연 있어요? 꽃까지 들고..."

"그러게... 뭐 저런 옷을 입고..."



그때 H의 얼굴이 살짝 굳었다.



"아... 설마..."



어라? 그러고보니 K랑 꽤 친한편이었던 H가 오늘 혼자서 집에 간다는 것은 분명히 S가 K를 성공적으로 불러내었다는 것을 뜻했다. 그렇다면 혹시 K가 H에게도 말하지 않았을까?

그러나 H는 살짝 고개를 갸웃거리고는, 내 팔을 잡아 끌었다.



"에이! 모르겠다. 빨리 가요 선배님. 차시간 늦겠어요."



나는 그녀의 뒷모습에 모든 근심과 두려움을 뒤로 한채로 걸음을 옮겼다. 지하철역은 생각보다 너무 금방이었다. 분명히 상당히 멀었던 것 같았는데, 어느새 이렇게 가까워진 거지? 나는 지하철역의 앞까지 와서도 개드립을 멈추지 않았고, 재미있게 웃던 그녀는 역앞에서 잠시 머뭇거렸다.



"저... 갈께요. 선배님."

"아. 그래... 저..."



나는 뭔가 말을 하고 싶었다. 이런 개드립 말고, 그녀가 잠들었을때 몰래 속삭였던 그런 말을 꺼내고 싶었다. 그러나, 그건 너무 어려운 일이었다. 뭔가 말을 꺼내려다 머뭇거리는 나를 보고 H는 약간 씁쓸하게 웃었다.



"얼른 들어가세요. 선배님들 아직 술마시고 계실거 같은데."

"그래. 너도 조심히 가고... 집까지 가려면 꽤 걸리겠네. 술 많이 안먹었어?"

"네. 괜찮아요. 금방가요."

"그래. 음... 아 막차 오겠다. 어서 들어가."



H는 웃으면서 역쪽으로 몸을 돌렸다. 그리고 나직하게 말했다.



"네. 근데 오늘은 진짜 혼자 가기 싫으네요."



나는 그 자리에 얼어붙었다. 나직하게 말한 소리였지만, 분명하고 똑똑하게 들렸다. 그녀는 고개를 돌리고, 가방에서 회수권을 꺼내고, 개찰구안으로 사라졌다. 



도대체 내가 뭐하고 있는거지?



H가 기다리던 막차는 금방 들어왔다. 그리고 나는 도저히 뒷일을 생각할 수가 없었다. 지갑도 삐삐도 없었지만, 나는 그대로 지하철 개찰구를 뛰어넘었다. 이대로 돌아갈 수는 없었다. 계단을 뛰어내려가는 동안 막차가 들어오고 있었다. H는 2번열처와 3번열차의 사이에서 서성이고 있었고, 나는 다행히 늦지않게 H가 서있는 곳까지 도달 할 수 있었다.



문이 열렸고, 나는 H의 손을 잡고 지하철 안으로 들어갔다.



"어?!! 선배님?!"

"아... 데려다 줄려고."

"아니. 집에 어떻게 가시려구요!"

"아... 뭐 어떻게 되겠지."



참 병신같은 대답이었지만, H는 그게 마음에 들었던 것 같았다. 막차인 지하철은 사람이 꽉차있었고, 우리는 앉을 자리는 없었지만, H는 빨개진 얼굴을 그대로 내 가슴에 묻으면서 안겼다. 



"고마워요."



그리고 우리는 술에 취한채 서로를 안고 지하철 벽에 기댔다.




그녀는 마치 잠든 것 같았다. 나는 그녀가 나를 안은 순간부터 꼼짝도 할 수 없었고, 그대로 고개를 이리 저리 돌리면서 그녀가 불편하지 않도록 해줄 수 밖에 없었다. 지하철이 흔들리고, 사람들이 왔다갔다 하는 와중에 지하철 벽에 기댄채로 술에 취한 여자를 안고 있는다는건 엄청나게 힘든 일이었다. 

물론 그 와중에 사랑의 감정으로 힘든것도 모르고 있었다고 한다면 거짓말이다. 내가 H를 좋아하는건 좋아하는 거고, 힘든건 힘든거였다. 나는 낑낑대면서 그녀가 쓰러지지 않게 조심스레 안고 있었다.



그녀의 집은 상당히 외곽지역이었고, 사람들이 점점 내려서 지하철은 조금씩 비어가기 시작했다. 나는 문득 그때까지 걱정하지 않고 있던 문제가 생각나기 시작했다. 그녀를 데려다주고, 집으로 다시 갈 수 있을까? 지하철 무단 탑승했는데, 걸리는거 아닐까? 

만약 돌아가는 지하철이 없으면, 어쩌지?

술먹고 길거리에서 잠을 참 잘자던 W의 말에 따르면 신문지가 그렇게 따뜻하다던데... 노숙이라고 해야하나?

만약 H가 집에서 재워준다고 하면..... 갑자기 이렇게 부모님께 인사를 드려야 하나? 

부모님이 가족계획을 물으시면 어떻게 하지? 난 딸이 좋으니 딸 한명만 낳아서 잘 기르겠다고 할까?

아니 그것보다 H 아버님이 눈에 흙이 들어가기 전까지 결혼은 안된다고 하시면 어쩌지?

집에 들어가기 전에 흙을 좀 챙겨서......




머릿속에서 온갖 말도 안되는 잡생각이 바운스바운스 하고 있을 무렵, H가 자기집이라고 했던 지하철역에 도착한다는 안내방송이 나왔다. 나는 황급히 나에게 안겨있던 H를 깨웠다.



"야 H야. 일어나봐. 다왔어!"

"어? 어! 선배님... 어? 여기 00역이예요?"

"그래 일어나봐 우리 내려야해."



우리는 몇명의 사람들과 함께 열린 지하철문으로 빠져나왔고, 나는 약간 비틀거리는 H를 부축하면서 지하철역의 계단을 오르기 시작했다. 머리속으로 아직 뭘 해야할지 정해지지도 못했지만, 나는 그때 한가지 다짐을 하고 있었다. 지하철안에서 H를 안고 있으면서 계속해서 했던 생각이었다. 그녀가 나를 어떻게 생각하건 말건, 나는 오늘이 가기전에 H에게 좋아한다는 고백을 할 참이었다.



그리고 우리는 지하철역 개찰구까지 다다랐다. H는 잠시 머뭇거리다가, 나에게 말했다.



"저 선배님. 개찰구 나오지 마세요. 아직 막차 있을거예요. 저때문에 여기까지 오시고... 너무 죄송해요."

"아니야. 그냥 내가 데려다주고 싶었어."



H는 뭔가 안타까운 표정을 짓고 있다가, 나에게 인사를 건넸다.



"저. 아니예요. 그럼... 빨리 들어가세요, 저도 들어갈께요."

"아 저기..."



나는 돌아서려는 H의 손목을 잡았다. 아까전부터 다짐했던 말이었지만, 쉽사리 말할수없던 말이었다. 지금 말하지 않으면 할 수 없을 것 같았다. H는 놀란 표정으로 돌아보았다. 그런데 H의 표정은 마치 울 것 같았다.



"H야.. 저기 내가..."

"아니... 오빠 미안해요, 제발... 말하지 마세요... 아... 어떻게하지... 안되요. 말하지 마세요."

"뭐라고?"



울것같은 H의 눈에 눈물이 그렁그렁 맺히기 시작했다.



"제발... 미안해요... 말하지 마세요."

"아니 나는..."



나는 울것같은 그애의 표정에 당황했다. 뭐가 잘못된 거지? 왜 이러는 거지? 내가 무슨말을 하려는지 알고 있었던 걸까? 그건 눈치를 챘다고 치지만... 왜 말하지 말라는 걸까? 도대체 왜? 우리가 느낀 감정은 서로 비슷한 것이 아니었나? 지금 나혼자 그녀를 짝사랑 하고 있었던 것야? 갑자기 내 속안에 있던 무엇인가가 북받쳐 올랐다. 나는 내 손에서 손을 빼려는 H의 손목을 다시 붙잡았다.



"왜 그래. 난 지금 말해야겠어. 나는..."

"아아... 나 어떻게 해... 안되요... 제발... 말하지 마세요."



H의 눈에서 결국 눈물이 떨어지고야 말았다. 왜 우는거지? 내가 뭘 그렇게 잘못했지? 넌 날 가지고 장난친 거였어? 나는 우리가 서로 좋아한다고 생각했는데, 그게 그냥 나혼자만의 생각이었다고? 왜? 지하철에서 내 가슴에 안길때 너는 무슨 생각이었던 거야?



나는 눈으로 백가지 의문을 쏟아내었지만, 입밖으로는 한마디 말도 할 수 없었다. H는 눈물을 흘리면서 내손에 잡힌 그녀의 손을 빼내었고, 도망치듯이 개찰구를 빠져나갔다.



허탈했다.



계단을 내려오자, 막차가 내 눈앞을 휘잉 하고 스쳐지나갔다. 망했다라는 생각보다 허탈함과 분노가 더 치밀어 올랐다. 나는 천천히 계단을 다시 올라가 개찰구를 뛰어넘었다. H의 흔적은 어디에도 없었다.







그날 나는 3시간을 걸어서 학교앞 자취방으로 돌아왔다. 



밤거리는 쌀쌀했고, 어두웠으며, 자정이 지난 시간의 서울거리는 한산하고 쓸쓸했다. 자취방 가까이 오자, 불이 꺼진 옥탑방이 보였다. 내가 없어서인지, 친구들은 자취방에 입성하지 못했고, 불이 꺼진 창은 내 마음처럼 쓸쓸해 보였다. 



나는 터덜터덜 철제 계단을 올랐다. 옥상으로 올라가자 조용하게 코고는 소리가 들렸다.



"뭐야..."



나는 슬쪽 소리가나는 곳을 돌아보았다. 옥탑방의 한쪽 벽에 기대어서 취한채 잠이 든 S가 있었다. S의 발 앞에는 검은 비닐봉지가 보였다. 



"아 이 미친......"



입으로는 욕을 했지만, 허탈하고 쓸쓸한 마음에 오히려 술취한채 널부러진 친구가 더 반가웠다. 나는 옥탑방의 문을 열고, 친구를 들쳐업고, 이불을 펴고, 친구를 누이고, S가 가져온 비닐봉투를 열어보았다. 그 안에는 소주두병과 오징어와 참치캔이 들어있었다. 취해 드러누워있는 친구가 가져온 그 비닐봉지가 무슨 뜻인지 금방 알 것 같았다.



"아.. 또라이 같은 놈... 술산다는게 이거였냐? 고기를 사와야지 이 개놈아."



나직하게 S에게 욕을 지껄인 나는 어두운 방의 천장을 향해 긴 한숨을 내쉬었다.



출처 1편 - http://todayhumor.com/?love_39450

2편 - http://todayhumor.com/?love_39509

3편 - http://todayhumor.com/?love_3958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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