짬 나는 시간 틈틈이 써 본 단편 소설입니다. ^^;
현실기반의 연애소설이라 요즘 유행하는 장르는 아니지만
취향 맞는 분들이 즐겁게 봐주시길 바라며 올려봅니다.
단편이라기엔 다소 긴 분량이라는 점 미리 말씀 드립니다.
혹시라도 감상 써주시면 정말 기쁠거에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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두 번째 가을
-1-
카페는 한산했다.
십여 석 규모의 아담한 공간이었다. 테이블과 의자는 흔한 형태였지만 꽤나 어두운 체리색이어서 약간의 무게감을 풍겼다. 귀에 익은 클래식 음악이 은은하게 흘러나왔고, 천장에서는 에어컨 소리가 낮게 울렸다. 에어컨 소음은 클래식과 비슷한 음량으로 어우러져서 한껏 고요한 공기를 더 차분하게 만들어주었다.
창밖의 거리도 오후의 번화가라기엔 무척 조용했다. 멀리 보이는 큰길에는 차들이 거의 다니지 않았고, 오가는 이 없는 보도블럭 위로 늦여름 햇빛만이 자욱하게 덮여있었다. 한가한 풍경에 슬슬 지루함이 느껴질 즈음 맞은편에 앉은 수린이가 커피를 내려놓으며 입을 열었다.
“들었어? 웅기랑 미혜 사귄대.”
풍경만큼이나 한가한 소식이었다. 서로가 잘 아는 친구들 이야기. 그중에서 참으로 고민 없이 세상을 살고 있는 두 친구가 이제는 연인이 되었다 한다. 그리 놀라운 뉴스는 아니었다. 둘 다 솔직한 성격이라 원래부터 잘 어울렸으니까. 연애라는 게 어려운 사람과 쉬운 사람으로 딱 잘라 나눈다면 녀석들은 볼 것 없이 후자니까. 드라마 같은 오해도 만들지 않고, 서로의 진심을 자주 확인해가며, 행복하게 함께하겠지.
처음 듣는 소식이었지만 흥미가 동하지 않아 그냥 아는 척 굴었다.
“응, 알아.”
“뭐야, 알고 있었어?”
수린이는 흥미로운 소문을 뒤늦게 들었다는 사실이 약 올랐는지 입을 멈췄다. 물론 여기서 내가 친구들의 다른 소식을 전해주며 화제를 이어나갈 수도 있었지만, 별로 그러고 싶은 마음도 들지 않았다. 잠깐의 정적. 삐뚠 속마음을 알아챘을까. 수린이가 지그시 나를 바라본다. 이제 곧 내 시큰둥한 태도를 따져 묻겠지.
“은이도...”
예상치 못 한 그녀의 한 마디. 수린이가 툭하고 말을 내던지자 뜨끈한 울렁임이 내 가슴께를 스쳐 지나갔다. 아는 척 굴며 대화에 심드렁했던 내 속마음이 환한 어딘가로 내몰린 기분이었다. 그녀는 말끝을 흐렸지만, 흐려진 뒷내용은 씁쓸하게도 선명했다.
대답을 머뭇거리자 수린이가 되려 내 눈치를 살폈다. 태도는 조심스러웠으나 그녀의 크고 맑은 눈동자는 반대로 나를 재촉하며 솔직히 털어놓으라고 보채는 듯 했다. 무심결에 내 시선은 애꿎은 테이블을 향했다. 수많은 대답 후보들이 순식간에 내 머릿속에 몰아쳤다.
“그만.”
내 머리가 대답을 고르기 전에 입술 언저리에서 먼저 대답이 튀어나갔다. 아까보다 더 짧게 대답했지만, 어쩐지 아까보다 더 많은 속마음을 들킨 기분이었다. 창밖으로 고개를 돌리자 저 멀리 해가 부산하게 노을을 만들고 있었다.
-2-
친구들과 다 같이 어울렸던 10대의 마지막 밤.
태어나 처음 들이켜 본 술은 즐거운 맛이었다. 정체모를 들뜬 기분이 시야 전체를 휘감았다. 지루했던 고등학교 시절이 끝났음을 서로 축복하며, 우정과 미래를 주제로 진지한 대화를 나누었다. 웅기는 원래부터 컸던 목소리가 두 배쯤은 커져있었고, 미혜는 웅기의 말 한마디 한마디마다 손뼉까지 쳐가며 맞장구를 치며 웃었다. 수린이는 연신 재잘거리면서도 친구들 잔이 비워질 때마다 늦지 않게 잔을 채워주었다. 이따금 손으로 죽 한치를 찢어 내 입에 넣어주곤 하면서.
이미 그 시절부터 골초였던 웅기는 수시로 베란다를 들락거렸는데, 어느 틈엔가 찬장에서 담금주를 한 병 꺼내와 모두에게 박수를 받았다. 그 술을 마신 이후의 기억은 아무에게도 없었고, 다음날 모두는 초췌한 모습으로 둘러앉아 북엇국을 먹었다.
“너도 빨리 짝 찾아. 연애해야지.”
미니스커트와 하이힐이 아직은 어색해 보이는 수린이가 노을을 등에 지고 잔소리를 했다.
카페에서 어떤 이야기를 더 나누었는지는 모르겠다. 웅기와 미혜가 영화관에서 팝콘을 두고 다툰 이야기, 머리가 거의 다 벗겨져가는 30대 교수님 이야기 등 썩 의미 있는 대화는 아니었던 것 같다.
“너나 잘 해. 깨지지 말고.”
그녀의 잔소리에 나는 퉁명스럽게 받아치며 웃었다. 수린이는 여전하다는 표정으로 마주 웃고는, 갔다.
수린이가 은이를 내게 소개시켜준 건 북엇국의 맛이 슬슬 잊혀질 무렵이었다.
친구들 모두 각자의 대학에서 새로운 사람들과 어울려 다니던 그때, 수린이의 같은 과 친구 중 가장 예쁘다는 아이였다. 피부는 새하얗고 염색 한 번 한 적 없는 듯 검고 긴 생머리는 무척이나 부드러웠다. 팔이 가늘었던 탓인지 흰색 베이직폴라티가 무척 잘 어울렸다. 폴라티 외에도 스웨터, 블라우스, 스키니 진 등 그녀가 애용하던 옷은 대부분 흰색이었고 그 하얀 빛깔은 그녀의 단아함을 한층 돋보이게 만들어주었다.
그녀와 만나는 일은 스스로 잘난 남자임을 확인할 수 있었던 동시에 내가 얼마나 서툴고 못난 남자인지도 알게 해주는 계기가 되었다. 서로에게 첫 연애여서였는지 많은 부분에서 미숙했고 그때마다 우리는 하나씩 배워가며 연애를 이해해갔다. 물론 서툰 연애를 이어가는데 있어 친구들, 특히 수린이의 조언이 큰 공헌을 한 건 말 할 나위 없었다. 둘 사이에서 고생해준 수린이가 만약 보답을 원한다면 아마 담금주 한 병으로는 무리일 정도로.
그렇지만 어디서부터 어긋난 건지 모르게 은이는 점차 나와의 시간을 불편해 했고, 그런 은이의 투정을 받아주기에 그때의 난 너무 어렸다. 난 그녀가 답답해하는 이유를 알 수 없었고, 안타깝게도 그녀는 일일이 불평을 드러내는 성격이 아니었다. 그리고 7월 22일. 열대야가 이어지던 여름의 한 가운데에 이별이 있었다.
“은이도...”
집으로 돌아가는 길, 카페에서 들은 나지막한 한마디가 귓가에 맴돌았다.
-3-
역에서 나와 보니 어느새 어둑해졌다. 하늘은 밤보다 환한 색의 구름을 몇 점 드리웠으나 그런대로 맑았다. 일렬로 올곧게 뻗은 가로등은 행인들을 비추며 제 몫을 다 하고 있었다. 환한 불빛 탓인지 별은 보이지 않았다. 땅거미가 내린 하늘은 자신을 검붉게 물들였던 노을을 이미 잊은 듯 했다.
생각해 보면 오늘 노을은 무척 아름다웠다. 회칠한 건물 벽에 노르스름하게 색을 입혔고 먼 산 능선에 다홍빛 커튼을 드리워 주었다. 찰나 같았지만 고왔다. 선명하고 고운 그 자태를 나도 밤하늘도 잠시 잊고 말았다. 참 빨리도 잊는구나 싶었으나 내일 다시 볼 테니 잊고 자시고도 없을까. 어쩌면, 유일하게 사람만이, 다시 못 볼 만남을 한다는 생각이 들었다. 어딘가 기분이 쓸쓸했다.
“오랜만이야!”
온갖 상념에 취해있던 중에 산뜻하고 반가운 목소리로 날 부르는 소리가 들렸다. 고개를 돌리자, 무척이나 아름다운 여인이 나를 향해 방긋 웃고 있었다. 낯선 모습에 잠시 주변을 둘러보았지만 근처에는 아무도 없었다. 다시 그녀에게 눈길을 돌렸다. 당황한 내 기색을 느꼈는지 여인은 목소리를 높여 말을 이었다.
“하현아, 나야! 설마 못 알아보는 거야?”
내 이름까지 확인해가며 여인은 까르르 웃었다. 귀에 익은 웃음소리에 그제야 알아볼 수 있었다. 은이였다.
“잘 지내? 멀리서 보고 한 번에 알아봤는데, 넌 몰라보는 눈치다?”
생글생글 웃고 있는 그녀의 얼굴 위로 내 기억 속에 있던 은이를 겹쳐보았다. 아무것도 없었던 귓불에는 작고 흔들리지 않는 금색 귀걸이가 꽂혀 있고, 가녀린 몸을 감싸던 흰색 폴라티와 청바지는 무릎까지 오는 체크 줄무늬의 베이지색 민소매 원피스로 바뀌었다. 곧게 늘어뜨린 머리카락은 여전했으나 생기 넘치던 검은색이 사라지고 환한 갈색 빛으로 물들어있다.
“어... 응. 그냥 지내지. 염색했구나.”
“아, 이거? 새로 할 때가 됐는데 그냥 있어. 돈이 웬수지.”
“하하... 여전하네.”
“여전하지. 아참 나 좀 봐. 가야겠다. 늦었어.”
“그래, 가.”
“반가웠어.”
“응.”
그녀는 총총히 사람들 틈으로 사라져갔고 나는 우두커니 그녀의 뒷모습을 보았다. 멀리 군중 속에서 은이가 잠시 뒤를 돌아 본 듯 했지만, 이내 그마저도 보이지 않았다.
나는 현기증이 일어 잠시 가까운 벤치에 앉았다.
방금 벌어진 사건이 머릿속에서 아직 처리되지 않았다. 숨을 크게 들이쉬고 천천히 복기를 해보았다. 낯선 그녀의 인상, 말투, 생글거리는 웃음까지. 이럴 수가. 기가 막혔다. 나는 은이를 알아보지 못했다! 머리를 크게 한 방 얻어맞은 듯 아찔한 느낌이다. 단 하루도 그녀를 잊고 지낸 날이 없는데, 마지막을 말하던 처연한 표정도 아직 생생한데, 알아보지 못했다. 스스로도 어처구니가 없었다.
은이는 무표정하게 있을 때면 무심함보다는 고즈넉한 분위기를 자아내는 여자였다. 무언가를 말하거나 행동하기 전에 꼭 몇 초 정도 여유를 두곤 했는데, 깊게 생각하고 움직이는 느낌이 들어 나는 그 몇 초를 참 좋아했다. 때문인지 그녀의 주변은 언제나 시간이 천천히 흘러가는 듯 보였다. 그 여유로움이 묻은 탓일까, 우리가 함께했던 시간은 한결 느릿하게 추억으로 바뀌어 채색되어 있었다.
예전의 그녀를 되새기고나자 충격은 금세 잦아들었다. 하지만 곧 가슴이 저려왔다. 지금껏 그녀를 떠올릴 때면 겪던, 아득한 욱신거림보다 강도가 높다. 새삼 깨달았다. 내 품에 남아 있던 건 그녀의 옛 모습이었구나.
나는 나 혼자 사랑을 했구나.
홀로 두 사람 분의 사랑을 안고 있었구나.
그래서 담아내지 못한 사랑이 넘쳐 가슴이 먹먹했구나.
이미 그녀는 새롭게 변했는데... 나만 그대로였다.
-4-
난 집으로 돌아오자마자 훌훌 벗고 뜨끈한 물에 몸을 씻었다. 비누로 잔뜩 거품을 내 온몸을 구석구석 닦았다. 거울에는 잔뜩 김이 서려 무엇도 보이지 않았다. 수증기로 꽉 찬 욕실은 아늑함보다는 답답함이 느껴졌다. 다시 물을 틀어 거품을 씻어내고 욕실을 나와 물기를 닦았다.
샤워를 한 덕인지 알몸으로 거실을 돌아다닌 덕인지 어쨌든 조금쯤 기분이 개운해졌다. 나는 살짝 허기가 돌아 냉장고를 열었다. 신통한 게 없었지만 뭔가 사러나가긴 귀찮았다. 사둔지 좀 지난 맥주 한 캔을 따서 방으로 들어왔다.
부재중 한 통이 들어와 있었다. 통화 버튼을 누르고 침대에 몸을 뉘었다. 신호가 몇 번 가기도 전에 수린이가 전화를 받았다. 잘 들어갔냐는 인사 몇 마디를 나누자 대뜸 수린이가 사과를 했다. 아까 무심결에 꺼낸 은이 이야기였다. 일부러 사과까지 하는 거 보면 낮에 카페에서 내 태도가 유난스러웠긴 했나보다. 난 바로 괜찮다고 말한 다음, 은이와 마주친 상황을 전해주었다.
“-그리고 인사하고 헤어졌어.”
“응.”
수린이는 무미건조하고 짧은 대답 뒤에 얕게 한숨을 쉬었다. 그리고 낮에 하려던 이야기를 그제야 전해주었다. 마치 토로하듯 격앙되어.
“사실 너희 둘 헤어지고 나서, 은이는 나한테 한 번도 연락한 적 없어. 학교에서 몇 번 마주치고 이야기한 적은 있지만, 그조차 수업 이야기뿐이었거든. 게다가 원래부터 멀었던 친구도 아니고 연애 전이나 후나 하루에도 여러 번 통화하고 문자 주고받았는데 어느 순간부터 뜸해지더니 헤어진 그날부터는 아예 없는 사람 취급하는 거야. 내 성격에 갑자기 연락 끊거나 무시 받으면 못 참는 거 알잖아? 아예 불러놓고 따져 물었지. 뭐하는 거냐고. 헤어졌으면 헤어진 거지 왜 나까지 친구 잃어야 하냐고, 내가 뭐 잘못한 거 있냐고 했더니, 글쎄. 은이가 화를 냈어. 너 은이 화내는 거 본 적 있어?”
수린이는 내 대답을 기다릴 새도 없이 말을 이어갔다.
“그 모습에 당황하긴 했지만 당황스러운 건 은이도 마찬가지였던 것 같아. 서둘러 자리를 피하더라고. 더 말하고 싶지 않은 기분은 어쩐지 이해했지만... 왜 화냈는지, 무슨 이유로 그랬는지는 아직도 모르겠어. 내가 그렇게 심하게 닦달한 건 아니었거든. 어쨌거나 그 뒤로는 정말 모르는 사이처럼 지내. 남자랑 만나더란 소식도 건너 건너 들은 거야.”
그러고 보면 은이는 단 한 번도 소리 지르거나, 화를 표출하거나, 감정적인 모습을 보인 적 없었다. 그녀는 일단 상대의 말을 차분히 들어주는 쪽이었고, 본인이 납득하기 어려운 상황이 벌어지노라면 적절한 표현을 골라 상대를 설득했다. 몇 초의 여유를 두고 꺼낸 그녀의 단어들은 상당히 설득력을 지니고 있어서, 나를 비롯한 상대방들은 대부분 그녀의 설득에 동조하며 태도를 고쳤다. 간혹 의견차가 좁혀지지 않을 때에도 그녀는 흥분하지 않고 이 과정을 몇 번씩이고 되풀이했다.
그런 이지적인 모습이 난 너무도 좋았다. 아직도 그녀를 벗어나지 못한 이유 중에는 분명 그 매력이 포함되어 있다. 그런 은이가 화를 냈다니.
“하이고, 네가 심하게 닦달한 거네. 그 착한 애가 오죽했으면 화까지 냈을까.”
“뭐래, 이 병신이가. 지금 전 여친 편드는 거야?”
“아닌 게 아니라, 그때면 나도 한참 민감한 시기였는걸. 은이도 그랬을 거라 생각하면 잔소리 듣고 싶은 심정은 아니었을 거야.”
“짜증 나. 끊어.”
통화종료음이 따가웠다. 나는 전화기를 침대에 내려두고 몸을 일으켜 맥주를 조금 들이켰다. 여자들 우정도 복잡하구나 싶었으나 더는 신경 쓰지 않았다. 내 감정을 정리하는 일이 지금은 더 급했으니까. 오늘 벌어진 많은 사건들이 머릿속에 널브러져 있다. 나는 은이의 방식을 흉내 내듯 단어를 하나씩 늘어놔보았다.
이별은 이쪽, 재회는 저쪽.
변화도 있었고, 그리움도 있었다.
그리고 사랑은, 전과는 다른 형태로 날 쳐다보고 있었다. 익숙치 않은 형태였지만 가만히 들여다보니 꼭 내 것만 같았다. 전보다 제법 다듬어진 모습이었다. 내가 겪는 사랑은 항상 이별 뒤에야 완성되는 걸까. 피식 웃음이 나왔다.
고등학교 1학년 때였다. 수린이가 처음 여자로 보인 건. 남들보다 늦게 찾아온 첫사랑이었다. 그간 주워들었던 사랑의 두근거림이나 애틋함은 당시의 나에게 이해하기 어려운 주제였다. 그도 그럴 것이, 같은 병원에서 태어나 같은 동네에서 16년. 가족이나 다름없었으니까. 늘 함께였던 사람이 내 마음에 자리하자 오히려 조바심이 컸다. 아무렇지 않게 어깨에 올리던 손도 머뭇거리게 되었고, 멀찍이 손인사만 건넬 때도 내 마음이 들통날까봐 자꾸 신경이 쓰였다. 어떻게 굴어도 평소처럼 대하는 게 쉽지 않았다. 어색함은 점점 더 커져갔다.
이윽고 난 그녀와의 거리를 멀리하기로 다짐했다. 떨어져 지낸다면 우선 당장의 불편함을 줄일 수 있을 것이고, 어쩌면 처음으로 남자와 여자로 대면하는 계기도 생기리라 믿었다. 기막힌 아이디어에 뿌듯했던 바로 그날 저녁, 그녀가 내 방에 찾아왔다. 빨라도 너무 빨랐다.
좁은 공간에 단둘이 있다는 설렘은커녕 요즘 수상했던 내 태도에 대해 물어올까 전전긍긍하고 있던 나에게, 그녀는 남자 친구가 생겼다는 수줍은 보고를 했다. 정말이지, 너무 빨랐다.
순식간에 마감된 나의 첫사랑은 이후로 더 뜨거워지는 일 없이 조용히 마무리되었다.
아쉬움조차 이제는 오래된 이야기.
맥주를 마저 비우고 불을 껐다. 눈을 감자 금세 잠이 들었다.
-5-
며칠 뒤, 웅기가 집에 놀러왔다.
간만이랄 것도 없는 만남이었지만, 웅기는 쉴 새 없이 수다를 떨었다. 주로 미혜와의 이야기. 친구에서 연인으로 바뀌면서 달라진 일상과 그 소감이 대부분이었다. 본래 잘 떠드는 성격이었지만, 애인이 생겼다는 사실 덕분인지 녀석은 평소보다도 들떠 보였다. 나는 잠자코 고개를 끄덕이며 친구의 연애담을 경청해 주었다.
라면으로 간단히 배를 채우는 동안에도 웅기는 입을 쉬지 않았다. 이야기를 들어보면 미혜는 진즉부터 웅기에게 마음이 있었고 웅기가 그걸 눈치 챈 것이 최근이었던 것 같다. 그녀의 마음을 알게 되자 새삼 여자로 인식하게 되었다고, 가까이 지냈던 친구가 여자로 보이기 시작하면서 나름 고민이 많이 되더라고 녀석이 말했다. 나는 웅기에게 ‘서로 타이밍 맞은 게 다행인 줄 알아라’하고 한마디 던져줄까 하다 관두었다. 고1때 이야기가 시작되면 도저히 오늘 안에는 끝나지 않을 테니까. 라면을 다 먹어치운 뒤, 녀석은 담배를 꺼내들고 나가자는 손짓을 했다.
바깥은 아직 더웠다. 정오의 태양은 그늘을 용납할 수 없다는 듯 세차게 내리 쬐었다. 우리는 1층 현관을 돌아 옆 건물 사이 골목으로 들어갔다. 볕을 피해 웅크리고 있던 작달막한 응달 사이로 들어가자 서늘한 공기가 우릴 반겼다. 웅기는 담배를 하나 입에 꽂아 물고는 그제야 ‘넌 별일 없냐’고 물어왔다. 나는 수린이의 남자친구를 소개받으러 간다고 짤막하게 오후 일정을 전했다.
“그런 데를 뭣하러 나가냐, 금방 또 깨졌다 뭐했다 투덜거리기만 할 걸. 너도 참 성격 좋다.”
“칭찬이지?”
“욕이다. 어디서 보는데?”
“그쪽 대학교 앞.”
“엄청 머네. 일 없다. 미혜랑 놀 거야.”
“미혜도 같이 가지, 왜.”
되물어 보았지만 대답이 없다. 웅기는 내 눈을 응시하며 담배를 뻑 빨더니 고개를 돌려 길게 내뿜었다. 다시 내 쪽을 돌아본 웅기는 입을 열 듯 머뭇거리다 재차 담배를 태웠다. 그리고 연기를 내뱉으려고 고개를 돌린 채
“난, 너처럼은 못 해.”
욕인지 칭찬인지 모를 말을 읊조리고는 우리집 반대편으로 터벅터벅 발을 옮겼다. ‘잘 가라’하며 뒷통수에 대고 인사를 던지자 웅기는 등진 채로 손을 들어 흔들고는 걸음을 재촉했다.
나는 전철을 타고 1시간쯤 이동해 수린이와 그녀의 남자친구를 만났다. 솔직히 나 역시 웅기 못지않게 멀리 오기는 귀찮았다. 다만 수린이가 지난 통화에 삐친 것을 들먹인지라, 실랑이 끝에 그녀의 대학교 앞까지 오게 된 터였다.
‘엘레강스’라는 이름이 무색하게도 가게 안은 시끄럽고 북적거렸다. 이 근방이 대학교 주변치고는 이렇다 할 카페도 식당도 없는 곳이라 여긴 언제나 이랬다. 은이와 데이트를 한껏 즐기던 당시, 그녀는 음악소리가 큰 술집이나 클럽처럼 어수선한 장소를 무척 싫어했지만 이곳만큼은 예외였다. 악기나 기계음으로 귀를 따갑게 하는 소음과는 다르다는 견해였다. 그녀는 ‘여기의 소음은 모서리가 닳아있는 느낌이야. 몸에 닿아도 둥글둥글 감싸이는 기분’이라고 설명하며 부드럽게 미소 짓곤 했다.
수린이의 새 남자친구는 수더분한 인상이었다. 자리에 앉아 우리는 간단히 서로를 소개받고 인사를 나눴다. 우리보다 3살 연상이면서도 이런 자리를 어색해하던 그분은 웃는 모습이 여유로워 보이는 사람이었다. 수린이가 밉살맞은 소리를 해도 잘 받아줄 것 같은 성격으로 보여서 이번 연애는 금방 끝나진 않겠구나 싶었다.
“웅기랑 있었어? 같이 오지 그랬어?”
“미혜랑 따로 보기로 했나봐. 걔들이야 데이트 하느라 바쁘겠지.”
“아~ 미혜도 진짜. 연애 시작하더니 이젠 전화도 잘 안 받아.”
수린이의 투정에 남자친구 분은 빙긋이 웃으며 ‘다 그렇지’라고 말했고 나도 고개를 끄덕였다. 하지만 내심 친구들이 멀어지고 있다는, 적어도 전 같지는 않다는 느낌에는 몰래 공감하고 있었다. 이제 다시는 10대의 마지막 그 밤처럼 함께 어울리지는 못하는 게 아닐까. 각자의 삶을 살며, 각자의 짝을 만나, 먼 추억으로 가끔 떠올리다 멀어지는 사이가 되지는 않을까. 더 깊고 가까운 밤을 함께했던 은이도 이제 내 인생에서 사라졌는데.
“이제 애인 없는 건 너 뿐이네.”
끼어드는 타이밍이 예사롭지 않았다. 수린이는 그저 화제를 바꾸기 위해 던졌을 말이지만 머릿속에 은이의 예전 얼굴이 떠오를 때 듣자, 마치 은이가 던진 말인 양 빈정이 상했다. 내 기분은 아랑곳없다는 듯 수린이가 제안을 던진다.
“정 외로우면 내 친구들이라도 소개시켜줘? 예쁜 애들 많아.”
“됐어. 내 짝은 어딘가에서 곱게 자라고 있을 거다. 나랑 만날 날을 기다리면서.”
“말이나 못 하면.”
적절한 대꾸 덕에 자리에는 다시 화색이 돌았다. 나는 두 사람이 처음 만나서 사귀게 된 경위를 들어주며 분위기를 맞추었다. 들으나 마나 상관없는 얘기였음에도 두 사람은 마치 감명 깊게 본 로맨스 영화를 소개하듯 신이 나 떠들었다. 이야기를 적당히 흘려들으며 이따금씩 눈을 돌려 옆 테이블을 살폈다. 노트북에 들어갈 듯이 집중하는 파마머리의 남학생, 휴가를 나왔는지 군인 차림인 남자와 그의 옆자리에서 안기듯 기대고 있는 조금 통통한 아가씨, 조각케이크가 입에 맞는지 연신 입으로 옮기는 여고생들도 있었다.
우리 테이블 옆 복도는 사람들의 통행이 제법 많은 편이었는데, 일일이 어떤 사람이 지나가는지 신경 쓸 수도 없을 정도였다. 나는 수린이의 러브스토리가 길어지는데다 주변 테이블 관람도 마친 터여서 자연스레 복도 쪽으로 시선을 두게 되었다. 새삼 인식을 하고나자 저 먼 복도 끝에서부터 유달리 나를 향한 눈길을 느낄 수 있었다. 누굴까. 눈을 마주치자 그녀는 느린 걸음으로 나를 향해 걸어왔다. 설마.
“하현아, 또 보네.”
은이였다.
-6-
기온도 자리도 소음도 주변도 1분전과 별 다를 게 없었다. 노트북을 보던 남학생은 여전히 화면에 집중하고 있었고, 군인 커플은 아까보다 더 멀지도 가깝지도 않게 붙어 앉았다. 여고생들은 꾸준히 케이크를 해치우고 있었다. 그런데 불과 몇 초 차이로 순식간에 공간이 뒤바뀌었다. 그저 그녀가 내 옆에 선 것뿐인데. 누군가 강제로 날 납치해 애먼 곳에 떨어뜨린 느낌이었다. 비현실적인 분위기 속에서 은이의 모습만 또렷이 보였다.
은이는 회색 브이넥 반팔 티와 검은 반바지를 입고 있었다. 티 앞에는 개구쟁이 같은 표정의 애니메이션 캐릭터가 프린트되어 있었고, 화장이 진하지 않은데다 유독 볼터치가 발그레한 탓인지 전체적으로 앳되어 보였다. 손목에 두른 금팔찌는 실처럼 얇아 어른스러운 느낌이 묻어났는데 언밸런스하게도 앳된 옷차림과 잘 어울렸다.
나는 그녀의 인사를 듣고도 아무 대답도 못한 채 멀거니 눈만 끔뻑였다. 며칠 전 역 앞의 은이와 꼭 닮은 모습이었지만, 아직도 낯설긴 매한가지였다. 내 혼돈에 아랑곳없이 그녀는 생글거리며 미소를 지었다. 내가 인사를 받아주길 기다리는 모양새였다.
“은이 간만이네.”
내 입이 고장 난 동안, 수린이가 먼저 무뚝뚝하게 인사를 꺼냈다. 삐친 꼬마아이의 표정이었다. 은이는 수린이 쪽을 돌아보더니 마치 어린이집 선생님처럼 웃으며 대답했다.
“응, 오랜만이야!”
은이치고는 꽤 큰 목소리로 밝게 인사를 받았다. 수린이는 은이의 화답에 짐짓 놀란 듯 했다. 내 기억으로 봐도, 지금껏 수린이와 다툰 뒤에 이토록 상냥하게 웃어 보인 상대가 없었으니 어쩐지 납득이 되었다. 은이의 표정이 워낙 해맑았던 까닭에 수린이도 ‘그러게’하며 피식 웃고 말았다.
은이는 번갈아 우리들을 쳐다보았다. 은이의 시선이 수린이의 남자친구 분께로 멈추자, 수린이는 남자친구를 은이에게 소개했다. 가볍게 서로 목례를 나누고 은이는 시선을 다시 내 쪽으로 바꿨다. 그러곤 나와 눈을 맞추고 생긋 알 수 없는 웃음을 띠었다. ‘잘들 놀아. 먼저 갈게’하고 그녀는 카페를 떠났다. 찌르릉 소리와 함께 카페 문이 닫히자, 은근한 속도로 현실감이 돌아왔다. 멍했던 내 정신이 가까스로 제 자리를 찾았다.
“그날 혹시 별다른 낌새는 없었어?”
은이가 나가자마자 수린이는 나에게 질문을 던졌다. 질문이라기보다는 취조에 가까운 억양이었다.
“그날이면 무슨 날?”
“왜 그, 은이랑 역 앞에서 마주쳤다며.”
“낌새가 있어도 내가 알았겠냐. 만난 거에 놀라서 어버버했는데.”
“방금처럼?”
“...그래, 방금처럼.”
“뭔가 분위기가 이상한데.”
수린이는 무언가 생각에 잠긴 듯 했다.
“너희 마지막에, 헤어지자고 말 꺼낸 건 은이 쪽이랬지?”
“그랬지.”
“그런데 며칠 전에 은이가 먼저 말 걸어왔다고 했지?”
“응.”
“방금 느꼈지만, 말투나 표정에 전혀 ‘전여친’이란 느낌 없이 산뜻했어. 그때도 그랬어?”
과연 그랬다. 땅거미가 노을을 삼킨 그날 저녁, 새하얀 가로등 불빛 사이에서 은이는 나에게 먼저 인사와 웃음을 주었다. 당시의 무척 상큼했던 미소가 유난스레 기억에 남아있다. 나는 고개를 끄덕이며 대수롭지 않은 투로 말했다.
“이젠 정말 상관없는 사람이잖아. 완전히 끝났으니까. 그렇게 대해준 것뿐이겠지.”
수린이는 큰 눈을 더 똥그랗게 뜨면서 부정했다.
“보통은 안 그래, 여자들은. 정리가 되었어도 마주치긴 불편해서, 봐도 못 본 척하거나 멀리 돌아가곤 한단 말이야. 아예 몰랐던 사람처럼 무시하는 거지. 미련이 남았다면 그전에 문자라도 한번 넣었을 텐데, 그동안 연락도 한번 없다지 않았어? 지금 은이는 어느 쪽도 아니란 말이야. 그렇다고 편하게 친구처럼 대하는 느낌이냐 하면 그것과도 좀 달라. 이건 어쩐지 썸 타는 남자에게 다가가는 느낌... 굳이 고르자면 그런 분위기였는데 이상하잖아. 사귀었고, 헤어진 남자인데 이제 와서 뭣 하러? 그것도 본인이 직접 차버린 놈인데 말이지.”
사용하는 어휘가 점점 격해지자, 수린이의 남자친구가 부처님처럼 웃으며 자제하라는 제스쳐를 취했다. 수린이는 톤을 낮추고 넌지시 한마디를 더 던졌다.
“이건 내 감인데...”
“?”
“어쩌면 은이가 너에게 연락할지도 몰라.”
“무슨 근거로?”
“감이야.”
며칠 후 거짓말처럼 은이에게 연락이 왔다.
-7-
“오래 기다렸어?”
카페는 아주 조용했다. 아침부터 종일 비가 내린 탓인지 우리 말고는 손님도 없었다. 흐린 날씨에 손님마저 없으니 공간이 온통 무채색으로 보였다. 은이가 오기 전까지는.
그녀는 하얀 블라우스에 블랙 진을 입고 왔다. 여전히 날씬했고, 여전히 부드러운 목소리였다. 그리고 머리를 검게 염색했다. 머리색도 차림새도 모노톤이었지만, 그녀가 들어오자 카페 안이 한결 화사해졌다. 나는 검은 머릿결을 한 은이와 단둘이 있자니, 어쩐지 시간이 예전으로 돌아간 기분이 들어 솔직히 기뻤다.
“아니, 나도 금방 왔어.”
웃으며 대답하고, 음료를 주문했다. 기다리는 동안 은이는 말없이 내 얼굴을 바라보았다. 눈을 마주치기도 하고, 내 옷차림을 관찰하기도 하고, 내가 창밖을 볼 때면 따라 보기도 하면서.
먼저 만나자고 한 건 그녀였지만 선뜻 말을 꺼낼 생각은 없어보였다. 나 역시 재촉할 생각은 없던 지라 우리는 비를 긋는 창밖의 행인들을 구경하며 조용히 몇 분쯤 시간을 보냈다. 웨이트리스가 마실 것을 들고 오자 은이는 ‘고맙습니다’라고 인사하곤, 커피를 받아 살포시 테이블에 얹었다. 그녀는 티스푼으로 커피를 몇 번 저으며 천천히 입을 열었다.
“있잖아.”
“응.”
“내가 여자친구여서 좋았어?”
은이의 물음은 질문이라기보다 확인에 가까웠다. 무언가 중요한 이야기를 하기 전에 사실관계를 점검하는 느낌. ‘당연히 좋았다’고 답하는 건 어려운 일이 아니었다. 하지만 난 그녀가 준비한 본론을 조금이라도 빨리 듣고 싶어서, 입을 열지 않고 고개를 갸웃하는 걸로 대답을 대신했다.
“......?”
“나랑 사귀면서 부족하다거나 아쉬운 거 없었어?”
“전혀.”
“내가 채워주지 못한 부분이 있어서, 음... 여자친구가 나라서 다른 사람 생각난 적 없었어?”
“없었어. 한번도.”
내 답변이 생각보다 단호했던 걸까. 은이는 멈칫하더니 잠시 내 얼굴을 빤히 쳐다보았다. 그리고 창 쪽을 바라보며 턱을 괴는 체 손으로 입을 가렸다. 아주, 아주 희미하게 웃는 느낌이었지만 눈빛은 어딘가 슬퍼보였다.
“나 아직도 후회가 돼.”
은이는 조심스레 말을 이었다.
“우리 헤어지던 날. 좀 더 내 마음을 잘 표현할 수 없었을까. 더 나은 다른 해법이 있지 않았을까. 이런 생각들이 그날 이후로 줄곧 마음 한구석에서 떠나질 않았어.”
“......”
“하지만 지금 다시 그때로 돌아간다 해도, 난 바보처럼 똑같이 행동할 거야.”
목소리는 떨리고 있었고, 커피를 젓던 손은 어느새 멈춰 있었다. 난 잠자코 뒷말을 기다렸다. 은이는 서두르지 않고 천천히 이야기를 계속 했다.
“착한 하현이. 나에겐 분에 넘치게 다정하고 상냥했던 너에게, 상처를 주고 말 거야. 나만 보는 남자라는 거 너무나도 잘 알면서, 심한 짓을 했지. 나도 알아. 하지만 또 돌아간다면, 그때와 다를 바 없이 굴게 될 거야. 내가 헤어질 결심을 한 건 하현이 때문이 아니니까. 해결할 수 없는 문제였으니까.”
“도대체 무슨 문제였길래?”
“수린이가 네 옆에 있었어.”
“?! 무슨 소리야?”
너무 놀라 나도 모르게 큰소리로 되물었다. 은이는 주저 없이 말을 이어갔다. 목소리 톤도, 말의 속도도 지금까지와는 사뭇 달랐다.
“말 그대로야. 세상에서 나만 좋아한다고 말하는 남자가, 그래서 나도 그렇게 믿고 싶은 남자가, 나보다 더 가까운 여자가 있어. 친구래. 오래된 친구. 함께한 시간도 나보다 길고, 앞으로도 더 길어질 거고. 그런데다, 그 애는 예뻐. 늘 자신감 넘치고. 학교 동기들도 모두 그 애를 좋아하는걸. 나도 마찬가지야. 같은 여자가 봐도 매력 있어. 친구로서도 그 이상 좋기 힘들어. 의리도 있고 잘 챙겨줘. 못 이겨. 어떻게 이겨. 스스로가 너무 초라했어. 두 사람을 보며 안 좋은 생각만 자꾸 들었어. 보고 싶지 않았어. 그런데, 그렇다고 해서, 내가 제일 좋아하는 두 사람한테, ‘내가 보기 싫으니 앞으로 둘이 보지 말라’고 어떻게 말해? 죽어도 못해. 차라리.”
“......”
“차라리 내가 떠나자, 라고 생각했어.”
은이는 빠른 기세로 던지던 말을 멈추고 크게 한숨을 내쉬었다. 늘 보아왔던 간결하고 정리된 언어가 아니었다. 감정이 흔들렸는지 눈가에는 그렁그렁 눈물이 맺혔다. 나는 아무 말도 할 수 없었다. 멍해진 나를 보며 은이는 약간은 누그러진 말투로 이야기를 계속 했다.
“그런데 말이야. 그럴수록 둘이서 나 배려하는 게 느껴지고, 신경 쓰며 챙겨주는 게 눈에 보이고, 제멋대로인 내 기분 맞춰주느라 안달하고 그러는 거야. 어떤 기분이었는지 알겠어? 헤어지는 게 답인 걸 나는 뻔히 아는데. 이유는 죽어도 말 못하겠고. 점점 두 사람이 좋아져만 가고. 한편으로는 싫어져가고. 도저히 견딜 수 없었어. 그래서 상처를 주고 말았어. 너에게. 그 다음에 수린이도. 참 못됐지?”
“......”
그녀의 눈가에 눈물이 흘렀다. 오래 서려온 마음의 짐을 흘려보내듯. 쉴 새 없이 흘렀다. 눈물을 닦지도 않은 채, 은이는 말을 이어갔다.
“이런 애인 줄 몰랐을 거야. 그동안 속았다고 생각 들면 미안. 숨길 수 밖에 없었어. 내 남자 못 믿고, 친구를 질투하고, 너무 못났잖아. 이런 모습 어떻게 보여줘. 몇 번인가 너한테 전화를 걸어서, 사실 이랬다 하며 속마음 터놓고 말하고 싶었지만 결국 할 수 없었어. 몇 번 소개팅도 했어. 내가 없어야 행복할 사람들은 신경 쓰지 않으려고. 나도 나름대로 행복해져야지. 그 생각하면서. 나 몇 번 애프터도 받았다? 그런데, 할 수 없는 거야, 연애를. 누구를 만나도 내 남자라는 생각은 들지 않았고, 나에게 잘 대해줘도 좋아지지 않는 거야. 이상하지. 그러다 너를 만났어. 역 앞에서 우연히.”
뺨을 타고 흐르던 눈물은 천천히 멎어갔고, 표정은 점점 부드러워졌다.
“진심으로, 어찌할 수 없을 정도로 반가웠어. 최근에 그 정도로 가슴이 뛴 일은 없었을 거야. 그 순간에는 수린이고 뭐고 아무것도 생각나지 않았어. 너만 보였어. 가서 인사하고 싶어서 인사했고, 이야기 나누고 싶어서 말을 걸었어.”
그녀는 이제야 손수건으로 눈가를 훔친 뒤, 여리게 미소 지었다.
“어쨌든 그때 내 마음을 알게 되었어. 그동안 꾹꾹 눌러왔던 감정이 넘쳐흘러서 외면할 수가 없더라고. 꼭 한번 다시 만나서, 아니면 문자라도 보내서 솔직한 심정 전해야겠다. 생각 정리해서 말해야지. 그렇게 생각했어. 그러던 며칠 만에, 수린이랑 같이 만났지, 우리?”
“응.”
“거기서 봤지. 수린이 옆에 남자친구 있는 거. 너도 웃으며 마주앉아있었고. 거기서 정말, 나, 그냥 맥이 풀렸어. 하하. 우습더라. 아무 것도 아니었어. 내가 고민한 것들. 네가 있고, 수린이가 있고, 또 누군가 있는 거. 자연스럽더라. 너희들은 늘 그렇게 지내왔고, 앞으로도 쭉 이렇게 지낼 테지 싶었어. 이제는 아무렇지 않아진 거야. 날 괴롭게 만든 많은 것들이. 어이가 없더라. 나도 신기했어. 말도 못하고 끙끙대며 얼마나 힘들었는데. 이제는 그러니까, 상관없어진 거야. 내 마음을 확인했으니까. 그렇게 생각해.”
“......어떤 마음?”
“너를 이렇게나 좋아하는 걸.”
은이는 한결 가벼워진 표정으로 활짝 미소를 지었다.
그녀의 눈물은 그쳤고, 밖에도 어느새 비가 멎었다.
여름이 끝나간다.
이제 가을이 온다.
<두 번째 가을> 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