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친일파 잡아 족치기, 그 세번째 이야기
게시물ID : history_13982짧은주소 복사하기
작성자 : 이미봤다
추천 : 17
조회수 : 1168회
댓글수 : 14개
등록시간 : 2014/02/08 07:58:15
친일파 잡아 족치기, 그 세번째 이야기 - 민영휘 편


친일파 잡아 족치기, 그 첫번째 이야기 - 노덕술편 http://todayhumor.com/?humorbest_832985
친일파 잡아 족치기, 그 두번째 이야기 - 김창용편 http://todayhumor.com/?humorbest_833374


그들이 가장 두려워 하는 것은 우리들의 "기억" 입니다.

1.jpg


<민영휘>

1852년 개호로색히가 태어남
(쪽바리의 생일 따위 궁금하지 않음)
민영휘가 15세 때 이회영선생이 태어남
민영휘가 25세 때 김   구선생이 태어남
민영휘가 27세 때 안중근의사가 태어남

본적은 서울

1878년 26세때 고시에서 병과 1등으로 합격
그 뒤로 엘리트 코스를 걸으며 승승장구
(사료를 보면 어려운 관직 이름이 많은데 암튼 조냉 똑똑하고 잘나갔던거 같음)

1882년 30세때 임오군란이 일어나 조선군들이 그의 집을 뿌수고 난장판 만듬
민영휘는 명성황후와 촌수는 상대적으로 먼 편이었지만 여흥 민씨의 대표급으로서 백성들의 원성이 자자했음

1886년 36세때 참의 내무부사
1887년 37세때 도승지를 역임했다고 하는데 뭔지 모르겠고 좀 높은거 같음

1894년 43세때 동학농민운동이 일어나 농민들 때려 잡아달라고 청나라 위안스카이에게 살려달라고 함

1894년 43세때 갑오개혁 와중에 민씨들과 함께 탐관오리로 찍혀 전남 신안군 임자도로 유배되었으나

평양으로 도망쳐 청나라로 튐

1905년 민씨 세력의 내부 경쟁자였던 민영환이 을사조약 체결에 항거해 자결. 민영휘는 경쟁자가 죽자 얼씨구나 춤을 춤
1906년 55세때 휘문고등학교의 전신인 휘문의숙을 설립
1909년 안중근의사가 민족의 역적 이토히로부미를 처단함
1910년 안중근의사 사형. 민영휘는 쪽바리들로 부터 자작 작위를 받고 나라 판 돈 5만원을 챙김
          이 돈으로 전국의 땅이란 땅은 모두 사들여 일거에 조선최고 갑부로 올라섬
          현시가 8000억원을 소유한 영휘는 당시 기록에 '수백년에 한번 볼 수 있는 조선최고 갑부' '토지대왕'이라고 쓰여져 있음
1911년 환갑때 나라팔아 먹은 놈들의 모임인 <조선귀족회>에서 부회장 역임. 천황의 성은에 감사하다고 매일 "텐노 반자이" 삼창함
1919년 68세때(조냉 오래 살았음) 고종 승하 후 3.1운동이 일어남
우리 영휘는 아~무것도 한게 없음
1920년 유관순열사가 고문으로 돌아가실 때 우리 영휘는 69세

1923년 72세때 조선총독부의 식민교육정책을 지원하기 위해 조직된 조선교육회 부회장으로 선출
1932년 쪽바리의 땅에서 윤봉길의사와 이봉창 의사가 돌아가시고 중국 땅에서 이회영선생이 고문 후유증으로 돌아가실 때
          민영휘는 81세. 전재산 30만원으로 조선 갑부라는 소리를 들음
1935년 12월 31일 한해를 꽉꽉 채우고 사망

아들 민형식(적자)
       민대식(서자)
       민천식(서자)
       민규식(서자)

손자 민병도(1916-2006) : 제일은행장, 한국은행총재 역임
증손 민웅기 : 남이섬 소유
2.jpg

<쪽바리들에게 겨울연가로 유명한 그 남이섬 맞아유>

       민인기 : 휘문고교 이사장
고손 민경현 : 풍문여고 이사장


3.jpg


위 사진은 휘문고등학교의 건학이념
1. 일제의 국권 침탈기에 교육을 통하여 기우는 나라를 구함..... 이라고 써 있음(판단은 알아서들 하시길)


4.jpg



윤봉길의사의 돌아가시기 직전 모습

윤봉길의사 25세
민영휘는 81세

5.jpg

휘문고등학교 내에 있는 영휘의 동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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