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시간적 역사 발전론
중국 역사를 보면 악비가 나옵니다. 송나라때의 인물인데
금의 침공으로 송의 황제가 잡혀가고 나라의 운명이 풍전등화일때
농사를 짓던 가난한 농부출신으로 송을 위해 목숨바쳐 싸운 장수입니다.
어머니가 새겨준 정충보국이라는 글씨를 등에 문신으로 새기고 많은 전과를
올렸다고 합니다. 훗날 누명을쓰고 처형을 당하지만 후세의 사람들에게는
한족의 민족 영웅이 되었습니다.
서양사람들이 중국역사를 볼때 이해하기 힘든 부분이 바로 이런 부분이라고
합니다.
그래서 서양의 역사인식 방법론 즉 고대 중세 근대로 나누는 역사관이 세계에서
잘 적용되지 않는 장소가 바로 동아시아라고 합니다. 중국 한국 베트남...
고대 노예제 사회에서 중세 봉건제 그리고 근대 자본주의 라고 칭해지는
3단계 발전적 역사관이 중국을 비롯한 동아시아 역사에는 전혀 매치가 안되었던 이유가
무엇이었을 까요?
서양의 관점에서 봤을때 근세 또는 근대에 등장해야 마땅할 장면들이 훨씬 이른시기
에 중국에서 보이기에 혼란스러울수밖에 없었습니다.
중앙관료시스템 , 민족정신 , 과거제도 등등 하지만 그렇다고 근대를 규정할 가장
핵심적인 요소인 자본주의가 태동되는것은 결코 아니기에 절대로 근대라 말할수도 없었습니다.
송시대를 중세라 칭하기는 애매모호 하고 그렇다고 근대라고 볼수는 더더욱
없기에 고민하던 서양의 학자들은 k 브레이지히가 만들어낸 근세라는 별도의 용어를 차용하여
송나라에게 적용시킵니다.
서양에서의 근세는 종교개혁 인본주의와 절대왕정 등으로 표현될수 있으며 이것은
17세기 부터의 모습들입니다. 이것을 바탕으로 하여 동양에서 비슷한 모습이 나타나는 시기를
중국의 송나라 때부터라고 규정짓지만 그럼에도 시기적으로 서양보다 훨씬 앞서있는 거죠.
서양의 역사에는 잘 입혀질지 모르겠지만 동양의 역사에 일방적인 서구식 삼단 또는 사단
구분법을 적용시켜서 껴맞추다 보니 어울리지 않는 옷을 입은 꼴이 된겁니다.
근대에 대한 규정도 이제는 명확해지지 못한채로 그렇게 동양의 역사는 서구식
잣대에 의해서 난도질 당했으며 유교 또한 폄하되었습니다.
서양은 막스베버의 유교태제등을 인용하며 유교의 부정적인 모습들을 마구 부풀렸으며
동양이 서양에 무릎을 꿇은것은 바로 이런 썩은 유교 때문이라고 주장하기에 이르죠.
어찌되었든 유교는 근대 자본주의의 최대 적이 되고 말았으며 동양의 역사는
서양의 역사에 비해서 열등한것이 되고 말았습니다.
2. 조선 봉건주의 역사론
일제가 조선을 강점했을때 시행한것중에 하나가
바로 조선 역사 비틀기 였습니다.
일본이 아니면 조선은 아직도 후진적 봉건 역사가 존속되는 열등한
지역이 되어야 했으며 근대화라는 포문은 오로지 일제에 의해서 이루어진것이라고
주지시켜야할 필요가 있던거죠
그래서 고려와 조선을 봉건주의로 묶어버림니다.
조선은 상위 9%도 안되는 양반이 다수를 노예처럼 부려먹은 노예제 국가
지방의 지주가 영주처럼 백성들을 다스리는 봉건제국가로 폄하시켜버립니다.
심지어 어떤 일제 경제학자는 경제방식을 사회 발전을 평가하는 절대적 척도로 규정짓고
조선의 상당 지역이 자급자족 경제라는 것을 지적하며 조선왕조는 동시대의 일제와
서양에 비해서 천년이나 뒤쳐져서 봉건제에도 아직 들어서지 못한 고대식 노예국가이자
후진 열등 왕조로 규정짓기도 했습니다.
일제사학을 그대로 물려받은 식민사학자들은 한국의 역사를 구분하는데 있어서
어울리지 않는 서양식 구분법을 그대로 차용하게 됩니다.
그나마 오늘날에는 조금 다행스럽게도 조선왕조의 개국을 조금 격상시켜서 근세라고
보는데 이유는 불교적 사고방식을 정도전이 비판하고 현세적이고 합리적인 유교철학을 바탕으로
새로운 왕조를 건국한 역사적 사실에서 기인됩니다.
어떻게 봐도 학자들은 조선을 중세 봉건국가의 범주에 넣기에는 너무 억측스러웠을 겁니다.
거기다가 조선은 너무 지나칠정도의 중앙집권 국가였습니다.
문무신 잡과 모든 관직에 시험을 치루는 능력제 국가였고
파견된 관리는 토호화 되는것을 막기위해서 순환제 근무방식이었습니다..
더불어 이것을 감찰하는 암행어사까지 있었으니 서양 입장에서는 상식을 뛰어넘는
현대적이고도 정밀한 관료시스템을 가지고 있었던 겁니다.
거기다가 개병제 잡색군 등등의 동원시스템도 봉건제와는 너무나 거리가 멀었으며
민중들의 인텔리화를 목적으로 한글창제까지. 뭘로봐도 이건 봉건제가 아니었던 겁니다.
심지어 조선 왕조의 이런 돌출된 선진적 특징들 중 일부는 더 거슬러 올라가 고려시대부터
있었던 것입니다.
그럼에도 불과하고 조선을 봉건제로 바라보는 시각은 오늘날에도 서구 학자들 사이에서 여전히
변함이 없습니다. 서구학자들의 한국사에 대한 관점은 오랫동안 서양처럼 봉건주의 역사적 경험을 앉고 있는
일본이라는 창을 거쳐서 형성되었습니다.
한국학의 대부라고 불리고 있는 미국의 제임스 팔레 ,카터 에커트 , 존 베이커 등등의
학자들이 모두 조선을 봉건제로 규정하고 있으며 그 근거들로 주로 고려와 조선은 노예가
30% 이상을 차지하기 때문에 봉건제라고 주장을 합니다. 또한 조선은 그 자체로 근대로 갈
동력을 가지고 있지 못한 왕조라고 결론을 짓고 있습니다.
브루스 커밍스 또한 이런 주장에 동조하고 있습니다. 이들 학자들의 조선에 대한 시각은
미국의 한반도 정책에 매우 중요한 역활을 하고 있습니다.
이들은 한국의 근대적 동력은 절대적으로 외부(일제)에서 온것이며 박정희의 경제발전은 바로 그 바탕이 있기에 가능한것
이라고 주장하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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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사에 냉혹하게 내려지는 식민지 근대화론을 깨기 위해서 한국의 학자들은 필사적으로 조선사회의
자본주의 맹아론을 만들어낼려고 노력했고 이것이 서양의 학자들에게 오히려 더 유치하게 비추어지고 말았습니다.
이것의 근본적인 문제는 애당초 서양식 구분법을 한국사에 적용시키면 안되는 문제였던것인데
강제로 적용시켜 그 패러다임 안에서 식민지 근대화론을 돌파할려다 보니 무리수가 발생하게 된것입니다.
3. 근대적 민족주의론
서구에 있어서 민족주의는 대단히 근대적 개념입니다. 민족주의가 동양의 역사에 있어서
이미 수백년전에 이미 존재했었다면 서구학자들의 입장에서는 충격일수밖에 없습니다.
3단계 고대 봉건 근대 또는 4단계 고대 봉건 근세 근대라는 역사구분을 한국 역사에
적용시키는것이 첨부터 잘못된 것이라는 것을 증명하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더구나 한국은 분단이라는 정치적 상황에 놓여 있기에 영구분단을 원하는
주변국가들의 이해관계도 그 주변국가의 한국학 전공학자들의 해석에 영향을 미쳤으며
그 결과 정치적 목적성을 띤 탈민족주의론은 빼놓을 수 없는 요소가 되었습니다..
북한과 남한의 분단을 연결하는 유일한 고리가 바로 민족이기 때문입니다.
지금도 한국사를 전공하는 미국의 주류학자들 대부분은 한국사에 서양식 구분법을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고 잔혹하게 적용시킵니다. 그리고 민족은 철저하게
삭제합니다. 민족이라는 단어는 분명 서구에서 들여왔으며 일제를 거쳐 수입된것은
분명합니다. 하지만 한국의 역사에 있어서 민족정신은 어느날 갑자기 뚝 떨어진게 결코
아닙니다.
한국사는 삼단이나 사단식 구분법이라는 굴레 아래에서 조선의 역사가 봉건제 국가라고
규정짓기에는 너무나도 선진적 요소들이 많았습니다.
또한 서양의 학자들에게 봉건제 사회가 되어야만 하는 조선사회에 의병은 여전히
미스테리한 존재입니다. 때로는 망상을 가진자들로 투영되고 때로는 교조적인 유교교리에
빠진 자들일뿐입니다.
물론 모든 외국의 학자들이 한국사를 이렇게 왜곡된 시각으로 바라보는 것은 결코 아닙니다.
예외적이긴 하지만 다수 서구 주류학자들과 달리 한국사를 일률적인 서양의 잣대로만 바라보면
안된다고 주장하는 UCLA의 존 덩컨 같은 소수의 학자들도 있습니다.
“아시아, 근대화 독자연구 필요”
존 덩컨 교수가 한국과 처음 인연을 맺은 것은 베트남전이 한창이던 1968년 군에 징집돼 주한미군에 배속되면서부터다. 2년 복무를 마친 그는 고려대 사학과에 편입해 한국사를 공부하기 시작했다. 72년 학부 과정을 마친 뒤 귀국해 하와이대와 워싱턴대 한국학 관련학과에서 석사와 박사 학위를 받았다. 그는 강연이 끝난 뒤 인터뷰에서 “분명한 것은, 민족주의는 ‘근대’에 완성된 개념이긴 하지만 적어도 한국에서는 전근대에서부터 그 요소가 발견된다는 점”이라고 재차 강조했다. 그는 민중의 공동체적 귀속감을 ‘민족주의’로 볼 수 있느냐는 질문에 대해 “조선시대 민중도 부모로서, 자식으로서, 백성으로서, 또 그 밖의 수많은 사회적 지위에 따른 각각의 자기 정체성을 갖고 있었으며, 중요한 것은 다양한 정체성 중에서 특정 시기나 상황에서 어떤 의식이 앞서 나오는가 하는 점”이라고 말했다. 그는 또 “아시아 학계에서도 서양의 언어로 동양의 역사와 사회현상을 해석하려는 경향이 많은데, 근대화의 경로나 근대성의 성격은 각국이 다른만큼 아시아는 서구와 어떻게 다른지를 연구해야 한다”고 밝혔다.
저서로 〈조선 왕조의 기원〉(2000), 공동편집서로 〈공자사상의 재검토; 중국·일본·한국·베트남에서의 과거와 현재〉가 있으며, ‘조선 왕조 성립의 사회적 배경’, ‘전근대 한국의 민족주의 원형’ 등 수많은 논문을 썼다.
글·사진 조일준 기자
기사입력 2003-11-24 23:00 |최종수정2003-11-24 23:00
[한겨레] 한국의 경우, 근대화의 문물이 들어오기 이전에도 조선 민중에게 ‘국가’의 구실과 ‘민족주의’에 대한 의식이 있었다는 주장이 나왔다.
미국 로스앤젤레스 캘리포니아주립대학(UCLA)의 존 덩컨 교수는 지난 21일 이화여대 한국문화연구원(원장 김현자)이 마련한 국외학자 초청강연에서 ‘조선 후기 민중의 국가인식’이란 논문을 발표했다. 그의 주장은, 국가의식과 민족주의를 ‘근대’의 산물로 보는 학계의 통설이 세계 모든 나라에 똑같이 적용될 수 있는 이론은 아니라고 논박하는 것이다.
에릭 홉스봄 등 근대주의 이론가들은 근대 이후 유럽에서 중앙집권화한 관료주의 국가들의 출현을 모델로 삼아, ‘민족주의’를 이전까지의 지역중심적 정체성을 대치하면서 근대 이후에 나타난 새로운 형태의 의식으로 규정하고 있다.
그러나 덩컨 교수는, 한국을 비롯한 동아시아 국가의 민족의식은 ‘무에서 유’가 나온 게 아니라 이미 근대 이전부터 그런 공동체의식의 요소가 충분히 있었다고 주장한다.
그는 동아시아 국가들이 전통적인 중앙집권적 관료통치 체제의 고대 농업국가에서 (서구 민족주의와 제국주의의 강압으로) 근대국가로 발전했다는 점에 주목한다. 그는 이어, 조선시대 지식인 지배계층이 아닌 일반 민중의 국가 또는 민족에 대한 공동체 의식을 알아보기 위해 〈임진록〉 〈박씨전〉 〈임장군전〉 등 전란을 다룬 민중소설, 특히 개항 이전에 구전되어온 다양한 이본들을 텍스트로 삼았다.
그는 임진왜란 당시 의병 항쟁을 서술한 〈임진록〉의 여러 이본을 분석한 결과, 당시 민중은 조선이라는 국가에 대한 분명한 귀속감과 왕실 및 양반에 대한 반감을 동시에 가지고 있었다고 한다. 그는 특히 전 국토에 걸친 전투설화, 왜군의 잔학상과 의병 지도자들의 영웅담은 조선 민중의 국민적 정체성이 단순히 지역공동체 의식을 넘어서는 국가의식과 민족주의의 한 형태였음을 보여주는 단서라고 주장했다.
또 19세기의 숱한 민중봉기가 과중한 과세와 관리들의 부정부패에 대항하면서도 늘 ‘임금에 대한 충성’을 공언하는 것도, 당시 민중이 이웃나라와 구별되는 정치사회적 공동체를 구성하고 있다는 의식을 반영하는 것이라고 덧붙였다. 그는 이런 논의를 바탕으로, 19세기 후반에서 20세기 초 조선의 개혁파와 민족주의자들에게 가장 어려웠던 점은 국민 사이에 국가정체성을 공유하게 하는 일이 아니라 ‘근대화’가 국민에게 좋은 것임을 확신시키는 일이었을 것이라고 추론했다.
강연이 끝나자 방청석에서는 “민족주의도 시대변화에 따라 없어질 수 있는가”, “한반도에 ‘언제’ 민족주의가 형성되었는가 하는 시기 구분보다도 지배계급이 아닌 평민들은 ‘어떤’ 민족주의였는가 하는 내용 분석에 더 깊은 연구가 있어야 하는 것 아닌가” 등 다양한 질문과 제언이 쏟아졌다.
이에 대해 덩컨 교수는 “내 입장은 모더니스트(근대주의자)에 가깝다”면서도 “민족주의는 국수주의와 구별돼야 하며, 한국의 경우 민족주의는 생명을 다한 것이 아니라 현재 정치상황에서 바라봐야 할 ‘실천의 문제’라고 생각한다”고 밝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