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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지만 나는 아직도 산다는 것의 의미를 모르겠어”하고 나는 말한다.
“그림을 보면 알게 돼”라고 까마귀 소년은 말한다. “바람의 소리를 듣는 거야.”
나는 고개를 끄덕인다. “너에겐 그걸 할 수 있는 능력이 있어.”
나는 고개를 끄덕인다.
“넌 이제 잠을 자는 것이 좋겠어.”하고 까마귀 소년이 말한다. “잠을 자고 다시 눈을 떴을 때, 너는 새로운 세계의 일부가 되어 있을 거야.”
이윽고 너는 잠이 든다. 그리고 눈을 떴을 때, 너는 새로운 세계의 일부가 되어 있다. -下권 p.420
독서기간 : 2017.11.17~28
줄거리 : 문득 가출한 ‘15세 소년’의 이야기와 초등학교 시절 불가사의한 현상에 이끌려 새로운 인생을 살게 된 나카타라는 ‘노인’의 이야기.
짧은 평 : 분명히 말하고 싶다. 「해변의 카프카」는 시종일관 초월적이고, 낭만적이며, 실험적이다. 한 데 메타포(metaphor)로 묶어 치밀하게 전개되는 이야기는 굉장히 난해하고 번잡하여 줄곧 ‘이게 대체 뭔 소리들이냐?’는 욕을 마음속으로 품게 되지만, 하루키 특유의 평이하면서도 세련된 문체와 화려한 표현력, 곧곧에서 묻어나오는 유머와 휴머니즘은 책을 한 번 더, 제발 한 번만이라도 더 읽고 싶다는 욕구를 마구 샘솟게 해주는. 긴 여운을 남기게 한다.
무라카미 하루키만큼 ‘운명’이란 단어와 더 잘 어울리는 작가가 또 있을까. 1978년 4월, 메이지 진구 구장에서 열렸던 프로야구 개막전. 1회말 야쿠르트 스왈로즈의 선발 타자였던 데이브 힐턴이 2루타를 부드럽게 쳐낸 순간. 고양이와 재즈 음악, 미국 문학과 영화밖에 모르던 바보에게 ‘운명’은 그렇게 갑작스레ㅡ제 이름 걸맞게ㅡ찾아왔단다.
“갑자기 소설을 쓸 수 있으리라는 생각이 들었다.”
분명히 말하고 싶다. 「해변의 카프카」는 시종일관 초월적이고, 낭만적이며, 실험적이다. 한 데 메타포(metaphor)로 묶어 치밀하게 전개되는 이야기는 굉장히 난해하고 번잡하여 줄곧 ‘이게 대체 뭔 소리들이냐?’는 욕을 마음속으로 품게 되지만, 하루키 특유의 평이하면서도 세련된 문체와 화려한 표현력, 곧곧에서 묻어나오는 유머와 휴머니즘은 책을 한 번 더, 제발 한 번만이라도 더 읽고 싶다는 욕구를 마구 샘솟게 해주는. 긴 여운을 남기게 한다.
이것은 이미 그의 또 다른 작품인 「상실의 시대(노르웨이 숲)」에서도 느낀 바 있는데, 사실 이 세상 모든 처음과 시작이 그렇듯, 난 정말 아무 생각이 없었다. 아무래도 작년의 일이었던 것 같다. 그저 하루키가 유명하다 길래. 대체 무슨 글을 쓰는 놈 이길래. 하는 마음에 그냥 집 앞 작은 동네 서점에 들려 바로 보이는 하루키의 책을 집어 들고 샀다. 이 과정에서 나에게 무슨 타당한 논리며, 목적이며 하는 것들은 찾지 말아주시라. 난 원래 그런 사람이니까. 다 필요 없고, 오직 느낌 있는 삶과 느낌 있는 행동. 그리고 느낌 있는 연애만을 추구하는 사람이니까. 이 대목을 잘 읽으면 아마 조금은 예상이 갔으리라. 그 책을 다 완독하기까지는 꽤나 오랜 시간이 걸렸다. 표지가 이상하게 기분 나빴기에(문학사상사에서 출판된 책이다. 시간나면 찾아보시라. 필히 공감할 것이다.). 느낌이 없을 것 같았다. 물론. 결국 난 다 완독하였고. 느낌이 없을 것 같다는 내 생각은, 큰 실수였다. 그런 의미에서 「해변의 카프카」도 마찬가지일지니. 난 하루키에게 또다시 실수를 범한 셈이고, 그에게 또다시 크게 얻어맞고는 쭉- 뻗은 셈이다. 아니. 어찌 보면 더 큰 타격이었으리라, 난 생각한다.
1인칭과 3인칭, 서로 다른 두 이야기의 반복. 본 작품의 홀수 장에서는 문득 가출한 ‘15세 소년’의 이야기를 다루고(1인칭이다.), 짝수 장에서는 초등학교 시절 불가사의한 현상에 이끌려 새로운 인생을 살게 된 나카타라는 ‘노인’의 이야기를 다룬다(3인칭이다.). 매우 대비되고 거리감있는 상황에서 두 이야기는 시작되기에. 처음엔 왜 이런 구조를 하루키가 택했을까라는 의문이 들곤 하지만. 끝에 가서는 곧 두 이야기가 메타포(메타포를 꼭 기억해두자. 메타포는 본 작품의 가장 큰 핵심이다.)로 이어짐에, 퍼즐을 맞추듯 척척 맞아떨어짐에 긴장감과 설렘을 동시에 느낄 수 있었다. 다양한 세계관과 여러 가지 관점들을 하나의 이야기 속에 짜넣고 이들을 조합함으로써 뭔가 새로운 세계관이 부상하는. 종합소설로서의 도전이다. 정보를 찾아보니 그의 다른 작품에서도 이를 찾아볼 수 있다고들 하는데, 아직까지 내가 읽어본 그의 작품은 단 두 편뿐이니(「상실의 시대(노르웨이 숲)」과 본 작품인 「해변의 카프카」.) 이를 자세히 비교하고 탐구할 수 없어 참으로 안타까울 뿐이다.
그날 밤, 너와 사에키 씨는 다시 한 번 서로를 끌어안는다. 너는 그녀 속에 있는 공백이 메워져 가는 소리를 듣는다. 그것은 해안의 고운 모래가 달빛 속에서 무너질 때와 같은 조용한 소리다. 너는 숨을 죽이고 그 소리에 귀를 기울인다. 너는 가설 속에 있다. 가설 바깥에 있다. 가설 속에 있다. 가설 바깥에 있다…….너는 그녀를 꼭 껴안는다. 그녀는 네 가슴에 얼굴을 묻는다. 너는 벌거벗은 가슴에 그녀의 숨결을 느낀다. 그녀는 너의 근육을 하나하나 더듬는다. 그리고 그녀는 너의 빨개진 페니스를 치유하듯이 부드럽게 핥아준다. 너는 그녀 입속에 다시 한 번 사정한다. 그녀는 그것을 소중한 것인 양 삼킨다. 너는 그녀의 성기에 키스한다. 혀끝으로 그녀의 전신을 핥는다. 너는 거기에서 다른 누군가로 변하고 다른 무엇인가로 변한다. 너는 다른 어딘가에 있는 것이다. -下권 p.162
발기된 내 남성은 아직도 빳빳하게 서 있다. 거의 영원히 그 상태를 유지할 것처럼 생각된다. 그녀가 입고 있는 작은 면 팬티를 벗긴다. 시간을 들여 발에서 빼낸다. 그러고는 드러난 음모에 손바닥을 대고, 그 안쪽에 살며시 손가락을 갖다댄다. 그곳은 따뜻하고 유혹하듯이 젖어 있다. 나는 천천히 손가락을 움직인다. 아직도 사쿠라는 깨지 않는다. 깊은 꿈속에서 다시 한 번 숨을 크게 내쉴 뿐이다. 그와 동시에, 내 속에 있는 움푹 파인 곳에서 무엇인가가 껍질을 깨고 빠져나오려고 한다. 어느 틈엔가 나에게는 내 안쪽을 향한 한 쌍의 눈이 생겨 있다. 그래서 그 광경을 관찰할 수 있다. 그 무엇인가가 좋은 것인지, 나쁜 것인지, 나는 아직 모른다…….
“어서 빼”하고 그녀는 타이르듯이 말한다. “그리고 이 일은 전부 잊어버리자. 나도 잊어버릴 테니까. 너도 잊어버려. 나는 네 누나고 너는 내 동생이야. 비록 핏줄은 이어지지 않았어도, 우리는 틀림없는 누나와 동생이란 말이야. 그건 알고 있지? 우리는 가족으로 맺어져 있어. 이런 짓을 해서는 안 돼.”
“이미 늦었어”하고 나는 말한다.
“어째서?”
“내가 그렇게 정했기 때문이야”하고 나는 말한다
“네가 그렇게 정했기 때문이야”하고 까마귀 소년이 말한다. -下권 p.247~249
어머니 그리고 누나와의 섹스. 앞에서 언급했던 문득 가출한 ‘15세 소년’의 이야기에서 나오는 부분이다. 다소 버겁게 다가오긴 했지만. 하루키의 작품에서의 섹스는 매우 중요한 열쇠 역할을 한다. 왜 그럴까. 왜 굳이 섹스일까. 그 질문에 답을 얻기 위해서는 먼저 다른 질문에 대해 생각해볼 필요가 있다. 현 시대의 섹스의 본질이란 무엇인가. 그 옛날 아기를 낳기 위한. 생산적이고 아름다운 생식 활동의 일부에 불과하단 말인가? 아닐 것이다. 절대로 아닐 것이다. 현 시대의 섹스의 본질은 우리 호모 사피엔스들의 고차원적인 본능에 포커스가 맞춰져있다. 쾌락만이 아니라는 것이다. 섹스를 통해 내 빈 여백을 메우고, 안정감과 소속감을 느끼고 싶어 한다. 자아존중과 더 나아가 자아실현을 이뤄내고자 한다. 내가 존재함을 증명하고 싶어 한다. 하루키는 이를 그 누구보다도 잘 이해하고 있는. 몇 안되는 작가일 것이다. 대게 이럴 때에는 자칫 더럽거나 추하게 비춰지는 경우가 발생할 수도 있는데. 하루키는 워낙 독보적으로 섹스를 미치도록 아름답게 그려낸다. 항상 만족감을 준다. 이번 어머니 그리고 누나와의 섹스도 마찬가지였다. 말만 들어선 이해하기 힘들겠지만. 어머니 그리고 누나와의 섹스를 통해. 메타포를 이해하고 맺어감에, 성숙해져나가는 ‘15세 소년’을 보면 한 번에 싹 가실 것이다. 확신한다. 심지어는 내가 이렇게 깊이 빠져감에. 한 편으론 무서울 지경이다. 물론. 15세 소년‘만’ 그런 것은 아니다. 어머니 그리고 누나도 마찬가지다.
“그대로 있었다면 어차피 군인으로 외지에 끌려갔을 거야”하고 건장한 병사가 말한다. “그리고 사람을 죽이거나 아니면 죽임을 당했겠지. 우리는 그런 곳에 가고 싶지 않았어. 나는 원래 농사꾼이고, 이 친구는 대학을 갓 졸업했지. 둘 다 사람을 죽이고 싶지 않았고, 죽게 되는 것은 더더욱 싫었거든. 당연한 얘기지만 말이야.”
“넌 어때? 사람을 죽이거나 또는 죽임을 당하고 싶어?”하고 키가 큰 병사가 나에게 묻는다.
나는 고개를 흔든다. 나는 아무도 죽이고 싶지 않다. 그리고 누구한테도 죽임을 당하고 싶지 않다.
“누구든 마찬가지야”하고 키가 큰 병사가 말한다. “아니, 거의 누구나 다 그렇다,고 해야겠지. 하지만 전쟁에 나가고 싶지 않다고 말한다고, ‘그래, 너는 전쟁에 나가고 싶지 않아? 알았어. 나가지 않아도 좋아’하고 나라에서 친절하게 허락해 줄 턱이 없지…….” -下권 p.305
“군인이었을 때, 총검으로 상대의 배를 찌르는 훈련을 지겹도록 받았지”하고 건장한 병사가 말한다. “너, 총검으로 찌르는 법을 알고 있어?”
“모릅니다”하고 나는 말한다.“
“우선 총검을 상대의 배에 푹 쑤셔 박고 옆으로 비트는 거야. 그리고 배창자를 갈기갈기 찢어버리는 거지. 그러면 괴로워하며 그대로 죽을 수밖에 없지. 그렇게 죽는 것은 시간도 걸리고 고통도 엄청나거든. 하지만 찌르기만 하고 비틀지 않으면, 상대는 금방 일어나서 거꾸로 너의 배창자를 찢어버리거든. 그것이 우리가 놓여있던 세계였지.”
배창자, 하고 나는 생각한다…….
“어째서 인간이 인간에게 그런 잔인한 짓을 하지 않으면 안 되는지, 너는 알고 있어?” 하고 키 큰 병사가 말한다.
“모르겠습니다”하고 나는 말한다.
“나도 잘 모르겠어.” 키가 큰 병사가 말한다……. -下권 p.327~328
자신의 국가의 과거. 자신이 지니고 태어난 원죄에 대한 반성. 하루키가 한 말 중에 이런 말이 있다. “Commitment(책임감, 헌신)이라는 것에 대해서 요즘 많이 생각합니다. 예컨대 소설을 쓸 때도 저한테 이미 Commitment라는 게 매우 중요해졌습니다. 예전에는 Detachment(무심함)가 중요했는데 말이죠.”. 무심함에서 책임감, 헌신으로의 변화. 하루키가 처음 작품을 쓰기 시작하였을 때에는, 무난한 조건에서 그 일을 착실히 완수해나갔다고 한다. 하지만 본 작품에 이르러서는 줄곧 군국주의 시대의 일본의 상황과 배경, 더 나아가 그 참담함이 반복적으로, 또 노골적으로 드러낸다. 쉽지 않았을 텐데도. 하루키가 글로벌 작가라고, 성숙한 작가라고 불리우는 데는 다 이유가 있는 법이다.
“하지만 나는 아직도 산다는 것의 의미를 모르겠어”하고 나는 말한다.
“그림을 보면 알게 돼”라고 까마귀 소년은 말한다. “바람의 소리를 듣는 거야.”
나는 고개를 끄덕인다. “너에겐 그걸 할 수 있는 능력이 있어.”
나는 고개를 끄덕인다.
“넌 이제 잠을 자는 것이 좋겠어.”하고 까마귀 소년이 말한다. “잠을 자고 다시 눈을 떴을 때, 너는 새로운 세계의 일부가 되어 있을 거야.”
이윽고 너는 잠이 든다. 그리고 눈을 떴을 때, 너는 새로운 세계의 일부가 되어 있다. -下권 p.420
물론. 다 떠나서, 하루키의 진면목을 발견할 수 있는 부분은 당연 결말 부분이다. 다시. 마지막 한 구절을 되새김질 해본다. ‘그리고 눈을 떴을 때, 너는 새로운 세계의 일부가 되어 있다.’. 과거형이 아니다. 미래형이 아니다. 현재형이 아니다. 현재‘진행’형이다. 현재‘진행’형, 특히 ‘진행’에 주목하자. 「해변의 카프카」는 절대. 여느 늙은이가 회상하는 구닥다리 이야기가 아니다. 여느 절망하고 좌절하는 이들을 다독여주는 평범하게 희망찬 이야기 아니다. 현재‘진행’이다. 지금도 계속 되고 있다는 것. 천천히 전진하고 있다는 것. 새로운 세계의 일부가 되어가고. 그 세계의 중심부를 향해 가고 있다는 것. 힘차게 말이다. 이는 「상실의 시대(노르웨이 숲)」에서도 찾아볼 수 있다. 이보다 아름다운 결말이 또 어디 있을까 싶다. 기본적으로 소설은 허구를 바탕으로 한다. 소설 속 모든 인물들과 상황들은 죄다 허구다. 무생물이란 말이다. 생명력을 가진 주체가 아니다. 하루키는 이에 반(反)한 것이다. 심지어 마지막까지도. 생명력을 불어넣어준다. 주체로서 제 마음껏 활동하도록 드넓은 초원에 방목해버린다. 자신의 작품을. 자신의 인물들과 상황들을. 이해하고 사랑하지 않으면 할 수 없는 행동이다. 하루키는 그런 의미에서 꽤나 남다르다고 말할 수 있다.
그러나 모든 작품들이 그러하듯. 아쉬운 점도 없지 않아 있다. 작가들의 항상 고민은. 어떻게 하면 독자들을 더 자신의 이야기 속으로 빨려 들어가게 할 것인가이다. 그래야 자신의 이야기가 한 줄, 한 자 더 읽히니까. 본 작품에서의 하루키는 처음에 ‘호기심’으로 승부수를 띄운다. 앞에서 언급한 바 있듯이, 서로 다른 두 이야기의 반복은 딱 보면 매우 당황할 수 밖에 없다. 좀처럼 앞이 예상이 가지 않는다. 거기다가 메타포가 등장하고 슬슬 이야기가 난해해지기 시작하면. 독자로서는 다소 두려워지기 시작한다. 이거 너무 어려운데? 재미없고 계속 이렇게 어려운 이야기만 계속 되는 거 아니야? 말이다. 이를 뒤덮기 위해 일부러라도 두 이야기의 배경이라든가 전개를 호기심을 유도하게 하여 독자로 하여금 계속해서 끈질기게 이야기를 읽어나가게 한다. 이 과정이 다소 길었다. 물론 끝에 있을 그 ‘긴장감’과 ‘설렘’을 극대화시키기 위한. 어쩔 수 없는 장치라고는 판단하나(실제 효과도 그러했다!), 읽으면서 약간 지친 기색이 있긴 하더라. 물론 독자의 수준에 따라 이것은 다를 수 있으니 뭐라 말할 순 없을지도 모르겠다.
평소와 달리 바쁜 오후였다. 많은 열람자가 왔고, 그 가운데 몇 사람은 전문적인 질문을 했다. 오시마 씨는 그 질문에 대답을 하고, 열람자가 원하는 자료를 찾느라고 바빴다. 컴퓨터로 검색해야 하는 것도 몇 가지 있었다. 평소 같으면 물론 사에키 씨한테 도움을 청했겠지만, 오늘은 그것도 어려운 상황이었다. 이런저런 일로 몇 번인가 자리를 비워서, 나카타 씨가 돌아가는 것도 몰랐을 정도였다. 바쁜 일이 일단락되고 주위를 둘러본 후에야 두 사람이 이미 도서관에 없다는 사실을 알았다. 오시마 씨는 계단을 올라가 이층의 사에키 씨방으로 갔다. 드물게 문이 닫혀 있었다. 그는 짧게 두 번 노크하고 기다렸다. 그러나 대답이 없다. 다시 한 번 노크했다. “사에키 씨”하고 그는 문밖에서 한 번 불러보았다. “괜찮으십니까?”
역시 대답이 없다…….
그는 사에키 씨의 머리칼을 들어 올려 그녀의 얼굴을 확인했다. 두 눈을 가늘게 뜨고 있었다. 그녀는 자고 있는 것이 아니다. 죽어 있는 것이다……. -下권 p.293
다음은, 가끔 나오는 갑작스러운 전개인데. 어쩌면 하루키만의 특징이라고 해야할까. 정확히는 하루키의 문체의 특징이라고 하는 게 좋겠다. 하루키의 문체는 굉장히 세련된 문체다. 내가 일본어를 모르다보니 차마 원문으로 받아들이지 못하고, 번역문으로 받아들임이 야속할 뿐이다. 그러나 조금 지나치게 담담할 때가 있다. 죽음에 관해서. 죽음이란 현 세계에서의 영원한 이별을 뜻한다. 그렇기에, 더더욱 신중하고 조심스럽게 다가가는 것이 일반적이다. 하루키는 이와 다르다. 담담하다. 물론 그 죽음이 논리적으로 말이 안되는 것은 아니다. 앞뒤 이야기를 살펴보면 분명 그 죽음은 타당한 죽음이다. 내가 하루키였어도 분명 그 상황에서는 죽음을 드러냈으리라. 하지만. 지나친 담담함은 자칫 독자로 하여금 갑작스러운 전개라고 오해받을 여지가 있다. 이에 걱정을 해주는 것뿐이다(원래 좋아하면 다 걱정 한 아름씩 해주지 않는가!). 다른 건 별 거 없다.
하루키는 「해변의 카프카」를 두고 줄곧 만족감을 밝혔고, 독자들에게 한 번 뿐만 아니라 여러 번 읽어주기를 권했다고 한다. 그럴 만도 한 것 같다. 오랜만에 책을 읽으며 상상도 못할 즐거움을 느꼈고. 생각에 잠기게 하였다. 작품 속 인물들의 삶의 의미를 떠나가, 내 삶의 의미. 나는 지금 무엇을 하고 있는가. 아니지. 나는 어디를 향하고 있는가 일지도. 아니지. 이 모든 것은 운명이고, 결국 다 메타포 일지도. 하루키가 글을 쓰기 시작하고 본 작품을 쓴 것도. 멀리갈 게 뭐야? 내 헤어진 전 여자친구도. 나의 어머니의 과거와 돌아가신 할머니의 다정함도. 다 떠나서 내 의식의 뒤안길에 자리잡은 저 이상한 꿍꿍이들도. 나는 아직도 참 어리구나를 고통스럽게 깨닫게 해준다.
늦은 밤, 내 방 거울에서 하루키의 형상이 그려진다. 가냘프고 긴. 짙은. 날카롭고 차가운. 그것은 하루키의 말대로 독자 자신이기도 하며, 더 나아가 이 세계 우리 모두이기도 하다. 때때로 난 뜬금없이 슬픔을 느끼기도 한다.
출처 | http://blog.naver.com/juncu15/221151672504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