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친일파 잡아 족치기, 그 첫번째 이야기
게시물ID : history_13943짧은주소 복사하기
작성자 : 이미봤다
추천 : 22
조회수 : 1127회
댓글수 : 23개
등록시간 : 2014/02/06 13:24:30
친일파 잡아 족치기 

제 1편. 노덕술(쪽바리명 마쓰우라 히로)

족.jpg

1899년 울산에서 태어남

울산공립보통학교(중학교) 2학년 중퇴 후 쪽바리가 운영하던 점빵에서 알바뜀 

원숭이의 나라 섬나라로 건너가 훗카이도에 머무면서 백수로 지냄

귀국 후 견찰이 하고 싶어 순사에 지원

1919년 3월 1일에 만세운동이 시작되었으니 이때 한반도는 이미 일본의 땅이었음

이 색히도 나이 19살에 만세운동을 접했을 텐데.... 

아마 이런 생각을 한거 같음 

"저런 병쉰들, 우리 대일본제국에 맞서다니" 

덕술이는 쪽바리들이 평생 만년 갈 줄 알았을거임

결국 덕술이는 1920년 6월에 순사가 됨

이후 견찰로 근무하며 독립운동하던 조선인들을 잡아다 고문함

그가 고문한 사람들을 보면 

박일형, 김규직(고문 후유증으로 사망), 유진흥(고문 후유증으로 사망), 김재학열사 등이 있음(이외 수없이 많겠죠)

족2.jpg

(참고로 덕술이가 주로 사용했던 고문은 혀를 뽑아버리는 고문이었음)

1941년 경찰이 된지 21년만에 쪽바리로부터 훈장을 받음

그리고 1943년 드디어 경시(오늘날 총경쯤 됨)로 승진. 조선인 중 유일하게 경시단 놈이 덕술이임. 

이후 평안남도에서 경찰부 수송보안과장으로 근무하며 일본의 전쟁에 적극 협력함

하지만 천년만년 갈줄 알았던 쪽바리가 전쟁에 패함

덕술이는 조땜

1945년 해방 후에도 계속 평양경찰서 서장으로 근무하다 친일반민족행위자로 걸릴거 같길래 

친일파의 파라다이스인 남한으로 튐

남한에 와서 한 일은 독립운동하던 사람들 빨갱이로 몰아 족치는 거였음

덕술이 한테 당한 대표적인 인물이 김원봉선생인데

당시 김원봉선생은 이런 말을 했다고 함

"내가 독립운동을 하던 시절 쪽빠리한테도 당하지 않았던 수모를 해방 후 같은 민족에게 당해서야 쓰겠소?"
(김원봉 선생이 화장실에서 볼일을 보는데 덕술이가 고대로 끌어내 싸다구를 날린 사건땜에)

남한에서도 쪽바리에게 전수받은 고문기술을 시전하시다 결국 박성근을 고문치사시킴

이 사건으로 구속되지만 이승만이 풀어주라 해서 석방됨

1948년엔 최난수(친일경찰), 박흥식(친일기업인), 이종형(친일언론인) 등과 함께 반민특위 관계자 15명을 암살할 계획을 짬

1949년 1월 25일 드디어!!!! 반민특위 특경대에 체포, 서대문 형무소에 수감

족3.jpg

끌려가는 덕술이

          노덕술이 체포되자 이승만은 노덕술의 석방을 요구하고 국무회의에서 반민특위 관계자를 체포하라고 요구함
          이래서 승만이가 개호로색히임.

서대문 형무소 수감 중 백민태의 자수로 반민특위 관계자 암살모의가 드러남, 덕술이는 또 조땜

하지만 우리의 재판부는 아래와 같은 판결을 내림

박성근 고문치사 사건 관련 - 검찰 3년 구형/ 재판부 무죄 판결
반민특위 암살모의 사건 관련 -검찰 4년 구형/재판부 무죄 판결

하아~(한숨 한 번 쉬고)

덕술이는 어떻게 된 연유인지 이후 헌병으로 직업을 바꿈

군인으로 있던 1955년 뇌물을 받아 쳐먹고 결국 파면

1960년 62세의 나이에 경남 울산 국회의원으로 출마했으나 낙선

결국 70살까지 천수를 누리고 잘 살다 돌아가셨음

묘자리는 어디있는지 모름(아시는 분은 알려주시길.. 가서 대못 좀 박고 오게)



참고 : 이이제이 53회 노덕술편, 민족문제연구소 친일인명사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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