러일전쟁이 벌어지기 전부터 이미 많은 수의 한국인들은 일본의 횡포와 폭압에 분노하여, 의병을 결성해 그들에게 저항했습니다. 이런 항일의병들은 특정한 계층이나 신분, 지역에 한정되지 않았습니다. 위로는 조정의 고위 관리나 아래로는 노비에 이르기까지 거의 모든 계층의 한국인들이 항일 의병에 참여했습니다.
고위 관리가 결성한 의병의 대표적인 사례는 함경북도에서 활동했던 이범윤이 결성한 이범윤 부대였습니다. 이범윤은 1902년 간도에 파견된 시찰원이었으며, 1903년에는 간도관리사가 되어, 고종 황제로부터 어사의 자격을 부여한 마패를 받았습니다. 그는 대한제국 정부의 승인 하에 간도 지역을 지키는 ‘충의대(忠義隊)’라는 민병대를 조직했습니다.
1904년, 러일전쟁이 발발하자 이범윤은 4천 명의 인원이 포함된 충의대를 항일 의병으로 삼고, 러시아군과 연합 작전을 벌여 일본군과 싸웠습니다. 이범윤의 의병 부대는 함경북도의 무산과 회령, 종성과 부령군 일대를 근거지로 두고 활동했습니다. 그리고 1904년 8월 7일, 백산 전투에서 이범윤은 러시아군 기병대와 공동 전선을 펼쳐, 일본군과 맞서 싸워 여러 차례 전과를 거두었습니다.
이 밖에 1895년, 명성황후가 일본 낭인들에게 시해된 사건 이후부터 항일 의병들은 활동했는데, 러일전쟁 직전에도 이들이 항일 의병에 가담했었습니다. 또, 일본군의 위협에 반감을 느껴, 군대를 이탈한 정규군 군인들도 의병을 결성하고 일본군과 싸웠습니다. 이밖에 동학군에 가담했다가 살아남은 자들도 역시 항일 의병을 조직했으며, 보부상들도 수송부대를 결성하여, 의병 활동에 참여했습니다.
이런 와중에서 1904년, 러일전쟁이 시작되자 일본은 대한제국을 협박하여, 한일의정서 체결을 강요했습니다. 그에 따라 한국은 법률상으로는 일본을 돕도록 되어 버렸습니다. 하지만 일본의 횡포와 억압에 분노하던 고종황제는 함경도에서 활동하던 항일의병 부대들에게, 몰래 밀명을 전하여 러시아군과 싸우지 말고 그들과 협조하여 일본군에 저항하라는 지시를 내렸습니다.
1904년 3월, 고종 황제는 회령지역에서 의병활동을 수행하던 추명찬에게 “러시아와 계속 협력하라.”는 밀명을 보냈습니다. 고종의 밀명을 받은 추명찬은 회령 지역에 주둔한 일본군에 관한 정보들을 파악하여, 러시아 제 1네르친스크 카자크 연대 백인부대장에게 전달했습니다. 그리고 1904년 6월, 원산지역에서 600명의 의병 부대를 이끌던 지휘관인 김원교가 러시아군과 함께 일본군에 맞서 싸우겠다고 선언했습니다.
한 달 후인 같은 해 7월에도 고종 황제는 두만강 지역의 한국인 관리와 항일 의병들에게 “러시아 병사들을 해치지 말고, 그들에게 음식과 말먹이를 주며, 길을 알려주어라.”는 밀명을 내렸습니다.
고종의 밀명을 받은 경성 지역 부사는 러시아 제7 동부 시베리아 소총 부대장 루드코프스키에게 “일본인들과 싸우기 위해 병사를 일으킬 것이니, 주민 전체에게 서둘러 알려 달라.”는 내용을 담은 편지를 보냈습니다. 그러자 루드코프스키는 경성부사가 보낸 편지를 공개하여, 항일 의병들이 러시아군과 함께 공동 전선을 결성하자고 제안했습니다.
그런가 하면, 고종 황제가 내린 밀명이 없어도 자발적으로 러시아군에 가담하여 대일 항전에 참여했던 의병들도 있었습니다. 병인양요와 신미양요 때, 프랑스군과 미군에게 뛰어난 저격술로 맞섰던 호랑이 사냥꾼들로 이루어진 포수회도 의병에 가담했습니다. 그 중, 함경도 지역의 포수들인 함경도 한인포수회는 함경도에서 가장 용맹한 의병이었습니다. 이들은 1905년 6월, 자신들의 고향인 함경도 두만강 지역까지 일본군이 침략하자, 러시아군에게 그들과 손을 잡고 일본군과 싸우겠다고 제안했습니다. 러시아군은 함경도 한인포수회에 대한 정보를 수집하여, 상부에 다음과 같이 보고했습니다.
“함경도 한인포수회로부터 러시아군 장교의 지휘 하에 유능한 통역과 함께 의용대를 구성하기를 희망한다는 제안을 받았다. 모두 2천 명 이상인 이들은 베르당 소총으로 무장하고 있으며, 돈을 바라지 않았다. 자신들의 평화를 파괴하고 여성들을 억압하는 일본의 행위에 분노를 느끼고 있는 상태다.”
또한, 아예 러시아군에 복무하여 정식으로 러시아군이 되어서, 항일 투쟁을 전개한 한국인들도 있었습니다. 현홍근과 김인수 등이 그런 경우도 속합니다.
현홍근은 러시아 영토인 연해주의 추구예프 유년군사학교를 다녔는데, 러일전쟁이 일어나자 학교에 다니던 한국인들과 같이 특수 부대를 결성했습니다. 모두 300명의 인원을 갖춘 현홍근 부대는 원산과 평양에 주둔하던 일본군을 상대로 게릴라전을 벌였으며, 그들에 대한 정보를 수집하고 일본군의 스파이를 여러 번 색출하여 잡아내는 전과를 올렸습니다.
러시아에서 군사 교육을 받았던 김인수는 기병 부대를 이끌고, 러시아군의 일원으로 일본군과 여러 차례 싸웠습니다.
러일전쟁이 중반기로 접어든 1905년이 되자, 그 동안 함경도와 간도에서 활동해 왔던 모든 항일 의병들은 러시아군과의 협조 하에 하나의 단일 부대로 통일된 편제를 갖추게 됩니다. 즉, 러시아군 프리아무르 카자크 혼성여단의 산하에 항일 의병들의 통합 부대인 ‘선견한국분견대’가 창설된 것입니다.
러시아군이 1905년 10월 1일, 본국에 보낸 보고서에 의하면 선견한국분견대에 가담한 항일 의병들의 총 인원수는 무려 17,323명이나 되었습니다. 당시 대한제국의 인구가 2천만인 점을 감안한다면, 상당한 수의 의병들이 러시아군과 손을 잡고 일본군과 전쟁을 벌인 것입니다.
이밖에 러시아는 러일전쟁이 일어나자, 자국 영토인 연해주에 일본군이 침입하는 사태에 대비하여, 항일의병들과 별도의 협동 작전도 계획하였습니다. 그리하여 선견한국분견대와 러시아군은 연합 전선을 벌여 일본군이 연해주를 침입하는 것을 막아내기도 하였습니다.
출처: 2005년, 러시아 정부에서 공개한 극비 문서들을 번역하여, 국내의 국방부 군사편찬연구소에서 2011년에 발간한 서적인 <한반도에서 전개된 러일전쟁 연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