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충 50전후로 해서 죽게된다면 괜찮은 마무리라 생각했다. 좀더 길거나 짧으면 어느쪽이던 후회가 될것같았다. 죽음의 순간이 언제인지 설정이 가능하다면 나는 50세로 설정할거다.
한살 한살 나이가 차가면서 몰랐던 몸의 변화를 몸소 체험하고 어릴적 뜨거운 탕에 몸불려 세신을 하던 그때보다 지금이 오히려 인내심이 적어졌다.
당연하다듯이 지출했던 비용들이 점점 그 덩치가 커가면서 반대적으로 소모되는 체력들이 눈에 보이는것처럼 확연하다.
죽음이란 결승점에 도달하기전 이뤄내야할 개개인의 목표들이 미달성이 된 상태로 결승점에 다다르면 모자른 시간과 기운이 아쉬워질것같다.
죽음을 경험하기위해 돈을 벌고 숨을 쉬며 시간을 보낸다. 단 한번의 마지막 피날레를 위해 긴긴시간 삶이란 고통의 굴레속에서 피땀눈물을 쏟아가며 인내하고 고통한다.
이윽고 도착하는 순간에 나는 웃을까 울을까
신문물에 대한 호기심은 물에 눈녹듯이 없어지고 별 도움도 안되는 통장잔고에 일희일비한다. 고장이 나야만 가게 되는 병원은 지평선 뒤에 보이는 결승점을 좀 더 뒤로 미뤄줄뿐 다다를곳이 결승점이란걸 바꿔주진않는다. 그나마 관심있던 사물과 사람들도 이제는 딱히 궁금하지가 않다. 마치 어제 본 신문처럼 희미하게 기억할 뿐 선명하거나 입체적이지않다.
어차피 다다를 곳이라면 좀 더 빠르게 가는것도 좋겠으나 어느 심판이 반칙을 허용하겠는가.
바라던 시점이 눈앞에 보일때 오히려 너무 가까운 끝에 지난날을 돌아보게 될까 앞날을 기대하게 될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