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알고보면 사정이 있는 촉한정통론...
게시물ID : history_13919짧은주소 복사하기
작성자 : Weltenbaum
추천 : 14
조회수 : 1362회
댓글수 : 11개
등록시간 : 2014/02/05 02:15:57
일단 들어가기 전에 삼국지연의 덕분에 한국에 유명한 중국의 삼국시대는 일반적으로 조조의 위(魏), 유비의 촉(蜀), 손권의 오(吳)로 알려져 있습니다. 여기서 촉은 촉한(蜀漢)이라 부르기도 하는데 사실 유비가 칭제건원을 하면서 선포한 국호는 촉이 아니라 그냥 한(漢)입니다. 그 이유는 유씨 황실의 핏줄이 이은 정통성을 자처했기 때문입니다. 다만 중국 역사에서 한(漢)이란 국호를 쓴 나라가 워낙 많다보니 서촉 지방에서 있었던 한나라라 구분히가 위해서 촉한이라 쓰는 경우가 있었기 때문에 그렇게 알려졌던 것 뿐입니다. 일단 구분을 위해서 이 글에서도 촉이란 표현을 쓰겠습니다.

일단 삼국지 정사는 후한의 헌제 유협이 위의 문제 조비에게 선양을 했다는 점에서 위에 정통을 부여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사마염이 역시 선양을 받아 진(晉)을 세웠기 때문에 정사는 위진정통론을 따르고 있습니다. 그래서 위나라 군주의 경우에는 황제의 칭호를 붙였지만 촉은 선주 유비 - 후주 유선으로 기재됐고, 오는 그냥 군주의 이름을 기재하는 식으로 차별을 뒀습니다.

그런데 이 위진정통을 부정하고, 촉한에 정통을 부여하려는 시도가 나타납니다. 보통 삼국지연의의 영향으로 촉빠들이 주장하는 것 정도로 알고 있는 경우가 많은데 실제 촉한정통은 남북조시대부터 거론됐을 정도로 유서깊은 떡밥입니다. 그리고 이 사태를 야기한 인물이 바로 동진을 무너뜨리고 초(楚)를 건국하면서 헬게이트를 친히 열어주신 환현입니다.

당시 후한과 위, 위와 진처럼 황실이 바뀌고 새로운 국가를 선포하는 과정에서는 선양이란 절차를 밟아 정통성을 부여하는 일종의 의식을 치뤘습니다, 이러한 전례에 따라 환현 역시 한 - 위 - 진으로 이어지는 정통성을 계승했다고 주장하기 위해서는 동진의 사마씨 황실로부터 선양이란 절차를 밟아야 했습니다. 실제 환현과 환온 부자는 이 선양을 노리고 있었는데, 이 과정에서 환씨 가문에 정통성이 넘어가는 상황을 부정하고자 대두된 것이 바로 촉한정통론입니다.

정리하면 위 문제가 후한 헌제로 부터 선양을 받아서 정통성을 이어간 것처럼 보이지만 사실 촉에서 후한 황실의 후손인 유비가 정권을 이어나가고 있었다. 따라서 위에는 정통성이 없다. 서진이 정통성을 주장할 수 있는 것은 촉한이 사마소에게 항복했기 때문이지 위의 조씨 황실로부터 선양을 받았기 때문이 아니다. 따라서 선양을 통해 한 - 위 - 진을 계승한다는 환씨 부자의 주장은 한에서 위로 정통성이 승계되지 않았으므로 훌륭한 개소리라고 반박했습니다.
 
남조에서 저렇게 촉한정통에 대한 이야기가 스멀스멀 피어나올 때, 북조에서는 아예 유연이 스스로 한 황실의 후계자라 자처하면서 국호를 한으로 선언해버립니다. 게다가 촉한의 후주 유선에게 시호를 바치고, 선주 유비는 창업군주에 준하는 수준으로 격상시키면서 제사를 지냈습니다. 이를 통해 유연이 세운 한은 후한에서 유비가 계승한 후한을 이어서 다시 한 황실을 복원한 정통이라고 주장하기 시작했습니다.

결국 남북조에서 쌍으로 한을 계승한 것은 유비의 촉한이라 궁서체로 진지하게 갈겨대니 유비의 촉한이 후한의 뒤를 이었다는 대중적인 인식이 싹트기 시작합니다. 그리고 나비효과로 촉한정통에 대한 인식도 자리잡게 됩니다.  삼국지 관련 이야기를 다루다보면 등장하는 한진춘추란 역사서 역시 동진의 습착지가 쓴 서적인데 저기서 말하는 한이 유비의 촉한입니다. 그리고 이 역사서의 맥락 역시 촉한이 진에 항복했기 때문에 우리 동진이 정통성을 가진다고 인식을 한 겁니다. 무제 사마염 재위시절에 삼국지 정사를 쓰면서 위진정통론을 써놓은 것을 감안하면 그야말로 격세지감이 느껴지는 상황이죠.

이로 인해서 위진정통이냐 촉한정통이냐를 놓고 이후 건국된 나라에서 집팔한 역사서에 따라 견해차를 보입니다. 그런데 여기에 결정타를 날리는 사건이 발생했으니 바로 성리학을 정립하신 주 선생님께서 촉한정통을 주장한 겁니다. 사실 북송시절에는 그래도 위진이 정통성을 가지지 않나란 인식과 함께 아예 무통론을 주장하는 시도 등도 있어서 촉한정통이 좀 희석되는 분위기이긴 했습니다. 하지만 정강의 변으로 송이 남쪽으로 밀려나고 금이 북쪽을 차지하면서 다시 남북조 구도가 재현되자 다시 촉한정통에 힘이 붙기 시작한 것이 결정적인 원인입니다.

결국 성리학의 아버지이신 주자가 통감을 재편집하면서 촉한정통을 박아버렸고, 이후 아시다시피 동아시아의 이데올로기는 성리학 중심으로 흘러갑니다. 결국 후대의 학자들은 성리학의 흐름을 이어받게 되고 역사관련 서적들 역시 촉한정통 인식으로 완전히 돌아서게 됩니다. 이를 통해 식자 레벨에서의 분위기가 완전히 정리가 됩니다. 그리고 나관중이 구전되어 오던 삼국시대의 이야기를 삼국지연의로 엮으면서 완벽하게 민중들에게도 촉한정통론에 대한 인식이 퍼지기 시작하면서 확인사살을 해버리게 됩니다.

즉, 정치적 논리에 의해서 탄생했고 정립된 것이 촉한정통론입니다. 현재의 대중적인 관점에서 촉한정통론에 결정적인 영향을 끼친 것은 삼국지연의로 인한 것이 맞습니다. 하지만 이러한 분위기에 대한 반발로 정사의 대세는 위진정통이고 연의를 읽은 사람들이나 촉한정통이라 주장한다는 식의 의견도 찾아볼 수 있긴 한데 그렇게 쉽게 구분할 수 있는 간단한 문제는 아니라고 할 수 있겠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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