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나라에서 일반적으로 우익이라고 부르는 세력은 전혀 우익이 아니다. 일본의 우익, 나치의 우익, 프랑스나 영국의 우익, 러시아 우익 등과 같이 '우익'이란 민족주의자들을 말하는데 비해 우리나라의 자칭 우익들은 반대로 민족의 적인 일제에 협조하고 기생해온 자들이다. 한국의 대표적인 우익 정치인으로는 김구 선생, 안창호 선생 등을 예로 들 수 있고, 이 분들은 우리나라의 자칭 우익들인 친일파 계열에 정반대의 위치에 있었으며 실제로 그들에 의해 암살되었다. 한국은 항일 투쟁에 거의 아무런 전적이 없는 이승만이 대통령이 되었고, 초기 정부 요직은 한민당이라는 친일파 집단이 장악했다. 친일 세력은 처벌받지 않았을 뿐만 아니라 체포조차 되지 않았다. 해방 후 몇 년간 약 20만 명이라는 엄청난 수의 사람들이 좌익이라는 명목으로 친일 세력에 의해 학살되었는데 그들은 대부분 친일 세력의 척결을 주도적으로 요구하던 집단이었다. 해방 후부터 그들은 우습게도 스스로를 '우익'이라고 불렀는데, 아마 자신들이 무차별로 학살한 자들에게 덮어씌운 유일한 죄목이 '좌익'이었으므로 스스로를 '우익'이라고 부르는 것이 이치에 맞다고 여긴 것 같다. 그들이 진짜 우익이었다면 드골과 같이 친일파들을 죽여야 하지만, 그 친일파들이 자기 자신이었기에 스스로 모순에 빠진 것이다. 한 가지 일본이 부러운 까닭은 일본 정치인 대부분이 짝퉁이 아닌 진짜 우익 정치인이기 때문이다. 아직도 일본이 자신들의 죄를 덮고 여전히 대동아 공영권을 상상하며 독도를 빼앗으려 호시탐탐 노리는 것도 그들 정치인들이 대부분 우익이기 때문이다. (우익이란 이들과 같이 국가주의, 민족주의자들을 말한다)
* 프랑스의 친나치 청산과 언론 숙청 * 어제의 범죄를 벌하지 않는 것, 그것은 내일의 범죄에게 용기를 주는 것과 똑같은 어리석은 짓이다. (레 레트르 프랑세즈(주간지 프랑스문학)) 국가가 애국적 국민에게는 상을 주고 배반자에게는 벌을 줘야만 비로소 국민들을 단결시킬 수 있다. (드골) 나치 협력 민족반역자에 대한 재판은 특히 파리재판소가 거물급 유명 인사들을 거의 다루었다. 이 때문에 프랑스뿐만 아니라 세계의 이목이 파리에 집중됐다. 드골의 과거청산 작업은 히틀러가 항복하기 전에 이미 시작됐기 때문에 나치전범을 심판한 뉘른베르그의 국제재판보다 시기적으로 2년 정도 앞서 열렸다. 드골이 주도하는 나치 협력 반역자 대숙청은 민족을 배반한 무리들을 모두 지배세력에서 뿌리뽑았고 악질적이며 광적인 나치협력자들을 사형과 무기강제노동형에 처함으로써 다시는 지배세력으로 군림할 수 없도록 영원히 매장해 버리는 데 성공한 훌륭한 본보기가 된다. 파리의 숙청 재판정에 가장 먼저 끌려나온 피고들은 널리 알려진 나치 협력 언론인들이었다. 이들은 대체로 전쟁 전에 친 독일 언론인으로 낙인찍힌 부류들이고 파시즘을 찬양하며 나치즘을 확고한 자기신념으로 갖고 나치가 승승장구할 때 자연스럽게 선전역할을 담당해 미친 듯이 설친 자들이다. 그런데 전쟁 전에 기회주의적으로 반 나치였다가 독일이 점령군이라는 강자로 등장하자 나치독일의 선전원으로 전락한 ‘매춘 언론인’은 매우 가혹하게 다루어졌다. 드골이 언론인을 제일 먼저 민족반역자의 숙청 재판의 도마 위에 올린 것도 숙청 전략의 일환이었다. 드골 자신이 언론인을 제일 먼저 심판하는 이유에 대해 나중에 솔직히 술회했다. 그는 회고록에서 “언론인은 도덕의 상징이기 때문에 첫 심판에 올려 가차없이 처단했다.”고 기록했다. 부역죄는 모든 숙청 재판에 반드시 병과되었는데, 부역죄는 선거권과 피선거권 및 공직 진출권이 박탈되며, 공무원, 군, 변호사,회계사, 교원, 노동조합원, 언론인과 모든 통신과 정보 업무에서 추방되고 심지어는 개인기업의 사장은 물론이고 이사진에서도 제외된다. 특히 부역죄는 국적 박탈의 형벌이 자동적으로 병과된다고 규정해 드골이 나치 협력 반역자 숙청을 통해 프랑스 사회를 완전히 정화해 애국 시민만으로 재조직하려한 정치적 비전을 실현하려 한 것으로 주목되는 대목이다. 대숙청 후 프랑스 사회가 급속도로 민주화되고 도덕성과 윤리 및 민주적 법질서가 잡힌 것은 나치 협력 민족반역자들을 채로 모두 걸러내듯 부역자들까지도 응징한 것의 결과라는 평가이다. 드골은 파리 해방 직후 파리 숙청재판소에서 나치 협력 언론인을 제일 먼저 민족반역자의 심판대에 올림으로써 반역자 대숙청에 대한 비판 여론을 간단하게 잠재웠다. 프랑스 대숙청을 처음 학문적으로 연구한 로베르 아롱은 44~45년 나치협력 혐의로 의심받거나 처벌된 사람이 50만명, 구속된 사람이 15만명, 사망자는 3만~4만명이라고 추산했다. 그 가족들까지 감안하면 200만~300만명, 즉 총인구의 3~5%가 나치협력의 죄값으로 국가와 사회라는 공동체에서 추방당한 것이다. (주섭일, ‘프랑스의 대숙청’에서) 프랑스 해방 후, 친나치파 및 친나치 언론사의 사형 등에 앞장선 최초의 프랑스 총리는 대표적 우익이었던 드골이었다. 그는 해방 하자마자 나치에 협조한 100만명 정도를 체포했다. 그 중 7천명 정도를 사형시키고, 3만명 정도에게 유,무기 징역을 내렸다. 아마 이 땅이 프랑스였다면 친일 언론 사주 및 사학 집단들은 대부분 살아남지 못하였음이 분명하다. 특히, 15일 이상 발행한 신문사는 그 재산을 몰수했고, 사주와 경영진은 사형 등의 법적 처벌을 받았다. 언론계의 나치 협조야 말로 가장 혐오스러운 짓이었다고 본 것이다. 드골은 친나치파들을 처단하며 이렇게 말했다. "프랑스가 다시 외세의 지배를 받을지라도, 또 다시 민족 반역자가 나오는 일은 없을 것이다." 또 프랑스 초기 정부의 요직을 레지스탕스 요인들에게 나눠주었다. | |||
기사입력: 2011/08/26 [19:16] 최종편집: ⓒ 역사복원신문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