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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름에 대한 단상
게시물ID : history_13901짧은주소 복사하기
작성자 : 최대밝기
추천 : 8
조회수 : 621회
댓글수 : 1개
등록시간 : 2014/02/04 05:00:58


이름에 대한 단상


조순희(한국고전번역원 수석연구원)



  누구나 이름을 사용하는데 이름에도 문화적 차이가 존재한다. 그 때문에 이름은 한 사람의 얼굴처럼 느껴지기도 하고, 이름을 들으면 그와 연관된 감성이나 가치관 등을 상상해 보게도 된다.

  우리나라에서 지금과 같은 한자식 이름을 사용하기 시작한 것은 통일신라 무렵이라고 한다. 이전까지 고유한 토속어 이름을 사용하다가 한자 유입과 성(姓)의 보급에 따라 일부 지배층과 지식층에서 중국과 같은 한자식 성명을 쓰게 되었다. 이것이 고려 때는 귀족과 관료 계급으로 확대되고, 조선에 이르러 정착하기에 이르렀다. 그러나 이는 지배층과 지식층에 한정된 것이었으며, 하층민들은 여전히 성이 없이 고유한 우리식 이름을 쓰는 경우가 많았다. 1910년 민적부를 작성할 당시까지도 전체 인구 가운데 성이 없는 사람이 더 많았다고 한다. 하층민 이외에 양반가의 여성들도 대부분 아명(兒名) 이외에 정식 이름을 갖지 않았다. 지금과 같은 이름 문화가 보편화된 것은 100년이 조금 넘었다는 얘기이다.

  『예기』에 “어려서는 이름을 부르고, 관례를 하면 자(字)를 부르고, 50세 이상이 되면 형제간의 서열로 부르고, 사후에는 시호(諡號)를 부른다.”라고 하였다. 옛날에는 정식 이름 말고도 아명, 자, 호, 시호, 봉호(封號) 등 다양한 호칭이 있었고, 왕의 경우에는 여기에 묘호(廟號), 존호(尊號), 능호(陵號) 등이 더 있었다. 이처럼 다양한 호칭이 생겨난 것은 사람의 이름을 함부로 부르지 않는, 즉 이름을 소중히 여기는 관습에서 나온 것이다. 부모나 조부모, 가문의 존장, 국왕의 이름 등은 함부로 부르지 못했는데, 이를 피휘(避諱)라고 하였다. 이런 의식이 점차 확대되어 성인(成人)에 대해서도 이름을 부르기를 꺼리게 되었다. 그래서 이름을 대신하여 누구나 부를 수 있는 자(字)가 생겨났다. 자는 이름자에 담긴 뜻과 연관되게 지었으며, 이름자에 담긴 덕(德)을 드러낸다 하여 ‘표자(表字)’라고도 하였다. 예컨대 조선 초기의 인물인 김시습(金時習)의 이름은 『논어』의 첫 구절인 ‘학이시습지(學而時習之)’에서 나온 것이다. 그래서 그의 자는 ‘불역열호(不亦悅乎)’의 ‘열’ 자가 들어간 열경(悅卿)이다. 고려 후기의 학자이자 문신인 이제현(李齊賢)의 이름을 보면 『논어』의 ‘견현사제(見賢思齊)’가 떠오르는데, 그의 자는 ‘사’ 자가 들어간 중사(仲思)이다. 한편 이름이나 자를 지은 뒤에는 그에 담긴 뜻을 설명하는 ‘설(說)’을 남기기도 하였는데, 이때 빠지지 않고 등장하는 말이 ‘고명사의(顧名思義)’이다. 이름을 돌아보며 그 뜻을 생각하라, 즉 이름에 담긴 의미를 늘 생각하며 그에 어긋나지 않게 살아가라는 당부였다.

  후대로 오면서 자도 차츰 존장이나 연장자, 신분이 높은 사람에게는 쓰기를 꺼리게 되었다. 그래서 예인(藝人)이나 은자(隱者) 등에게 한정적으로 사용되던 호의 사용이 확대되고, 이것이 가장 보편적인 호칭이 되기에 이르렀다. 부모나 존장 등을 제외한 손윗사람이 아랫사람을 부를 때나 동년배 사이에는 자를 사용하고, 아랫사람이 손윗사람이나 스승, 존경하는 사람 등을 지칭할 때는 호를 사용하였다. 호는 우리가 생각하는 것보다는 훨씬 후대에 정착된 것이다. 중국을 보더라도 송대(宋代)에 와서야 호의 사용이 보편화되었다. 우리나라에서는 1300년 무렵부터 호의 사용이 확대되고 1600년을 넘어서면 문인들의 대부분이 호를 사용하였다는 연구가 있다. 호는 벗이나 지인들이 붙여주기도 하고 스스로 짓기도 하였으며, 짓는 데도 특별한 제약이 없었다. 그래서 본인이 추구하는 삶의 지향점이나 가치 등을 담기도 하고, 출신지나 거주지의 지명 및 산수, 당(堂)ㆍ정자(亭子)ㆍ서재(書齋) 등의 이름이 그대로 쓰이기도 하였다. 한 사람이 여러 개의 호를 갖기도 했는데, 대표적인 예가 평생 수백 개의 호를 사용했다고 알려진 추사 김정희이다. 또 정조(正祖)는 말년에 자신의 왕권을 과시하고자 ‘만천명월주인옹(萬川明月主人翁)’이라는 독특한 자호를 쓰기도 하였다.

  한편 고관이나 학덕 높은 학자, 국가에 큰 공훈을 세운 인사 등에게는 사후에 조정에서 시호를 내려주었다. 시호는 당사자의 삶의 행적을 살펴 두 글자로 정하는데, 본래는 훌륭한 사람에게는 좋은 시호를, 못된 사람에게는 나쁜 시호[惡諡]를 정해주는 포폄의 의미가 담긴 것이었다. 포악한 군주였던 주나라 여왕(厲王)과 유왕(幽王)의 시호는 대표적인 악시이다. 후대로 오면서 악시는 거의 없어졌지만, 한 인물에게 ‘시호가 내려지는가’ 와 또 ‘어떤 시호가 내려지는가’는 그 가문이나 학파, 정파 등 관련 인물에게 매우 민감한 문제였다. 성종 때 김종직이 사망하자 그의 시호를 문충(文忠)으로 정하였는데, 반대파에서 합당하지 않다며 문제를 제기하였다. 문(文)을 숭상하는 유학적 사고에서는 ‘문’ 자 시호를 선호하였고, 그중에서도 ‘도덕을 갖추고 학문이 넓다[道德博聞]’는 뜻의 ‘문’을 최상의 것으로 여겼다. 그런데 김종직의 시호에 이 ‘도덕박문(道德博聞)’의 ‘문’을 적용한 것이 문제의 발단이었다. 결국, 시호 담당 관원이 처벌되고 김종직의 시호는 문간(文簡)으로 개정되었다. 개정된 시호의 ‘문’은 ‘학문이 넓고 식견이 많다[博聞多見]’는 의미로 위상이 앞엣것과 달랐다. 그러나 김종직의 시호는 숙종 34년에 이르러서 처음에 정했던 문충으로 다시 개정되었다. 김종직이 사망한 지 220여 년이나 지난 때였다. 이렇게 한 인물의 시호를 정하는 일로 조정 내에서 갈등이 빚어지기도 하고, 후손이 선대의 시호를 개정하고자 청원하는 일도 빈번하였다.

  이렇듯 이름은 불리기 위해 존재하는 것임에도 함부로 불러서는 안 될 것으로 여겨졌고, 상호 간의 관계, 신분, 명망, 학덕 등에 맞추어 다양한 호칭을 사용하였다. 그런데 이렇게 중요하게 여겨진 이름도 고쳐야 할 때가 있었다. 대표적으로 항렬자가 잘못 적용된 경우가 그에 해당되었다. 그러나 이름을 고치기란 쉽지 않았다. 특히 사적(士籍)에 이름이 오른 자는 국가에 청원하여 허가받도록 법전(法典)에 규정되어 있었다. 또한, 역대 왕들의 어휘(御諱)와 음이 같은 경우에는 이름을 고쳐야 했다. 그래서 선조(宣祖) 때는 역대 왕들의 어휘 글자를 대신할 글자를 정하기도 하였다. 조금 다른 사례지만 세종 23년 훗날 단종이 되는 원손(元孫)이 태어났을 때는 ‘원손’이라는 이름을 모두 고치도록 명한 일도 있었다. 이는 왕실의 권위를 유지하기 위한 조처였다. 이밖에 반역 등을 저지른 대역죄인과 이름이 같은 경우, 공천(公賤)이 공훈을 세워 면천된 경우 등은 제한적으로 개명을 허가하였다. 그런데 후대로 가면서 법 조항을 지나치게 확대 해석하려는 폐단이 발생하였다. 역적 이름과 글자가 다른데도 발음이 같다는 이유로, 심지어 역적과 항렬자가 같다는 이유로 개명을 청원하여 이를 금지하는 조처가 내려지기도 하였다.

  동명이인(同名異人)이 동시에 조정에서 벼슬살이하게 되었을 때 후진(後進)의 이름을 고치도록 한 사례도 있다. 조선 중종 때의 문신인 어언적(李彦迪)은 본명이 적(迪)인데, 1년 먼저 과거에 합격한 동명이인이 있었으므로 중종이 ‘언적’으로 개명하게 하였다. 그런데 흥미로운 것은 이언적과 함께 그의 동생도 이괄(李适)에서 이언괄(李彦适)로 개명한 듯하다는 점이다. 여주 이씨 11세인 이들의 항렬자는 ‘辶’이고 한 글자 이름이다. 이언적도 처음에 이 원칙에 맞게 이름을 지었으므로 그 동생도 그러했을 것이다. 그런데 종형제들과 달리 이언괄도 형처럼 두 글자 이름을 쓰고 있다. 형이 두 글자 이름을 쓰게 되자 동생도 형을 따라 ‘언(彦)’ 자를 넣어 두 글자 이름으로 개명한 것으로 보인다. 이렇게 과거의 개명은 왕실과 국가의 권위, 가문의 질서, 개인의 명예 등과 관련되는 경우가 많았다.

  근래 새삼 개명 열풍이 불고 있다고 한다. 1999년 연간 3만여 명이었던 개명 신청자가 2010년에는 16만을 넘어섰고, 2010년에는 개명 허가율도 94%에 달했다는 것이다. 2000년에서 2009년까지 10년간 개명한 사람이 73만여 명이라고 하니, 우리나라 인구 5천만에서 70명 중 1명이 이 기간에 개명했다는 얘기가 된다. 이 정도면 개명이 특별한 사람들의 일만은 아님이 분명하다. 혈연과 가문이 중시된 과거와 달리 개개인의 인권이 존중되는 사회에서는 이름에 대한 권한을 본인의 것으로 인식한다. 2005년 우리 법원도 범죄 기도나 법을 악용하려는 의도가 없는 한 개명의 자기결정권을 인정해야 한다고 판결하였다. 과거와는 비교할 수도 없을 만큼 자유롭게, 개인의 의사에 따라 개명할 수 있게 된 것이다.

  그런데 개명하는 사례 중 많은 경우가 단순히 마음에 들지 않는 이름을 바꾸기 위한 것이라고 한다. 이름이 갖는 가치를 소중히 여기는 것이 아니라 이름 또한 물건처럼 쉽게 바꿀 수 있다고 여기는 듯하다. 개인의 생각과 취향이 존중되는 오늘날, 과거에 매여 불편을 감수하기를 바랄 수는 없다. 오죽 불편하면 개명을 할까 싶기도 하다. 능력, 재력, 학력, 가문, 외모 등 모든 면에서 자신의 가치를 극대화하며 사는 것이 오늘날 우리의 모습이니, 이름도 품격 있고 아름답다면 더 좋을 것이다.

  우리 조상은 신체발부수지부모(身體髮膚受之父母)라며 머리카락조차도 목숨처럼 여겼지만, 지금은 얼굴이나 몸매를 고치고 보정하는 수술과 시술이 보편화되었다. 후천적으로 붙여진 이름은 그에 비할 바가 아니다. 개명하여 스스로 만족하고 대인관계에서 자신감을 가질 수 있다면 굳이 부정적 시각을 가질 필요는 없다. 하지만 가치관이나 기호가 하루가 다르게 변하고 있는 세상이다. 선호도가 높은 이름 또한 시대별로 다르게 나타난다. 그래서인지 어릴 때는 선호도가 높았던 이름을 성인이 되어 고치는 사례도 적지 않다고 한다. 인간의 평균 수명이 팔구십 세에 달하는 지금은 단 하나의 이름으로 평생 동일한 만족도를 느끼기도 어렵게 되었다는 말이다. 그럴 바엔 정말로 불가피한 경우가 아니라면 투박하고 촌스러운 이름 그대로 살아보는 건 어떨까 하는 생각도 든다. 부모나 조부모가 처음 이름을 지어줄 때의 그 마음을 그분들의 존재처럼 받아들이고 느끼면서 말이다. 그렇다면 비록 자신의 마음에 꼭 들거나 멋스러운 이름은 아닐지라도 그분들의 마음과 사랑을 항상 생각하는 값진 ‘고명사의(顧名思義)’가 되지 않을까.



http://www.itkc.or.kr/itkc/post/PostServiceDetail.jsp?menuId=M0491&clonId=POST0019&postUuid=uui-ccba60e8-489b-4b0e-9a90-350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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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고전번역원의 칼럼 중에서 역게 분들과 함께 읽고 싶은 글이 있어서 가지고 왔습니다. 논문 때문에 오랫동안 안들어왔더니 재미있는 글이 많이 쌓였네요. 항상 공부하는 역게 분들이 아름답습니다.

새해 복 많이 받으시고 승리하는 한해 되시길 기원합니다(넙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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