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래 글을 읽다가 무령왕릉 사태에 대한 작은 정보로 혹여 잘못받아들여서 너무 큰 오해가 발생할까봐 적어봅니다.
무령왕릉 발굴은 해방이후 고고학이든 한국사학계에서든 최고의사건이면서 동시에 최악의 불명예로 남는 사건입니다.
그 불명예는 결국 고고학적으로 오랜기간에 두고 그 위치나 배치까지도 고증, 연구하면서 해야함에도 불구하고
단시간에유물을 통채로 들어낸 사건입니다.
그런데 그런데 사실 이러한 문제는 한국고고학계가 미숙하다거나 잘못되어서만은 아닙니다.
그 주변 것들이 문제였습니다.
우선 희대의 발견은 비밀리에 발굴 작업이 진행되려다가 기자들의 설레발로 참혹하게 변합니다.
어떻게 알고왔는지 기자들이 들이닥쳐서 내부에 마음대로 출입하고 사진을찍으면서 깽판을 부립니다.
추가로 주변 주민들까지 슥왔다 구경오는 지경에 이르렀지요.
당시 그자리에있던 고고학자들 입장에서는 피가마르는 상황이였습니다.
그 당시 미숙한 법령, 행정체계로는 그런한 상황을 제제할 수 있는 방법이 없었고, 알권리 운운하면서 꺵판치는 기자들을 말릴 힘도 없었습니다.
(이미 일부 유물은 훼손되었고 폭행도 발생하여 발굴작업자체가 진행되기 어려운 지경에 이를렀습니다.
결국 그 당시 책임자였던 김원룡 박사는 유물의 분실위험, 훼손걱정에 결단을 내릴 수 밖에 없었고 단 하룻밤만에 내부가 통채로 수습하게됩니다.
김원룡 박사의 회고에는 당시에 대한 후회와 자책이 가득했죠. 하지만 이 분만 탓할 수는 없는 상황이였습니다.
추가로 수습된 유물은 청와대의 독촉으로 서울로 긴급호송되게 되고 일부 유물은 대통령이 직접 구경하게되었다.
대통령이 손으로 금동유물들을 구부렸다 펴는 모습을 고고학자들이 어떻게 생각했을 지는 말할 필요가 없을 것같다.
아 물론 그 당시 대통령은 박통.
여담이지만 당시의 이런 대규모 발굴 (일본이아닌 우리손으로)을 정치적 홍보용으로 쓰고자 했던 의도가 다분했던 것은 의심의 여지도 없습니다.
또한 보존기술의 부재라는 명목으로 모든 유물은 서울로 보내져 연구하게 됩니다만. 적절한 이유인지는 사실 잘 모르겠습니다.
발굴 완료후 적절하지 못한 보존예산은 마지막 결정타를 때립니다.
결국 기레기 + 정부 + 청와대 3콤보 (여기서 고고학자나 박물관측은 별 힘을 낼 순 없었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