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코멧, 큐피드, 빅센, 댄서, 프랜서, 블리첸, 대셔, 돈더…
노인은 여덞 마리 눈사슴들의 이름을 되뇌인다.
어느 하나 미운 데 없는 사랑스러운 사슴들이었다.
하지만 이제 그들은 없다. 모두 죽었으니까.
노인은 마지막 눈사슴을 보았다.
정말이지 사랑스러운 녀석이다. 크고 쭉 뻗은 뿔, 길고 매끄러운 목, 탄탄하게 벌어진 가슴과 어깨, 그리고 무엇보다 반짝이는 빨간 코… 녀석은 노인에게 있어, 평생의 자랑거리였다.
하지만 이제 그것은 마지막이 되리라.
노인은 한숨을 쉬며 자신의 신세를 한탄했다. 그리고 자연스레, 오래 전 불기운이 사라진 난로로 시선이 이동한다. 난로 안에는 타다만 선물상자의 잔해가 드문드문 재에 섞여 있었다. 감출 수 없는 죄의식을 느끼며, 노인은 다시 방 한구석으로 고개를 돌린다. 거기에는 천장에 닿을 만큼 높이 쌓여있는, 그러나 주인없이 악성재고가 되어 버린 선물들이 산을 이루고 있다.
요즘 아이들은 선물로 터무니없는 것을 요구한다.
우주왕복선을 타게 해달라거나 티라노사우르스를 키우게 해달라는 건 귀여운 수준이었다. 어디 한번, 가장 최근에 받은 목록을 살펴보자면 우선
노스캐롤라이나에 사는 도널드는 내년도 NFL 시즌 티켓을 요구했다.
뉴멕시코에 사는 알레한드로는 외조부모가 시민권을 받게 해달라고 기도했다. 차라리 이건 기특하기라도 하지.
오리건에 사는 마키는… 이건 또 대체 뭐란 말인가, 비트코인? 노인은 도저히 아이들의 요구를 따라갈 수가 없었다.
그래도 노인은, 자신의 힘이 부치는 데까지 최선을 다해 아이들의 선물을 준비했다.
문제는
이제 그에게 그 선물을 전달할 수단이 없다는 것이다. 노인은 이미 너무 늙었고 그는 자신의 자랑이었던 썰매를 오래 전에 분해하여 땔감으로 써버린 뒤였다. 창고 구석에 먼지가 덮힌 선물꾸러미들은 일부 포장이 뜯어진 것들도 있었다. 직업윤리에 위배되는 것이지만-그것들은 모두 먹을 거리였다. 노인은 선물주기로 했던 먹을 것들을, 굶주림에 지쳐 몰래 뜯어 먹어버린 것이다. 선물을 받지 못해 우는 아이들을 생각하면 가슴이 찢어질 듯 아팠지만, 별 다른 도리가 없었다. 노인은 너무 오래 굶주렸다.
남은 방법은 하나 뿐이다. 그러나 칼은 안 된다. 저항하는 눈사슴을 제압하는 것은 체력을 소모하는 일이다. 최대한 빠르고 손을 타지 않게, 그러나 고통을 주는 방법이어선 안 된다.
노인은 고심 끝에, 방법을 찾아냈다. 그리고 그 해답이 지금 발치에 있다. 그건 산처럼 쌓인 선물더미 속에서 찾아낸 상자 하나였다. 빨간 포장에, 푸른 리본이 달린 상자. 동맥과 정맥 같은 색깔의 상자.
노인은 포장을 뜯었다. 그리고 안에서 종이꾸러미 하나를 들어, 작지만 무게가 제법 나가는 쇠뭉치를 꺼냈다.
뉴욕에 사는 마이클에게 줄 선물이었다. 마이클은 보기 드물게 장문의 편지를 보내왔다. 학교에서 자기를 괴롭히는 존이라는 아이를 겁주고 싶다고 쓰여있었다. 노인은 마이클에게 소지권한증이 있을까 염려되었지만, 어차피 이제는 상관없다. 선물은 노인이 쓰게 될 것이므로.
노인은 마지막 눈사슴을 보았다. 그리고 결심했다. 노인은 자리에서 일어났다. 단지 의자에서 몸을 일으킬 뿐인데도 무릎이 비명을 질렀다. 동시에 허리마저 시큰거렸다.
사실, 알고 있다. 이제 노인은 자기가 더 이 상 오래 살지 못하리란 것을. 그런데도 노인은 조금이나마 더 살기 위해 자신의 오랜 친구를, 그야말로 자신의 분신이었던 마지막 눈사슴을 잡아먹으려 하고 있다. 굳이 이러지 않아도 결국에는 굶어죽거나 몸 어디 한 두군데가 완전히 망가져서 외롭게 쓸쓸히 죽어버리겠지, 버려진 개나 고양이처럼. 그러나 끝이 오리란 것을 뻔히 알면서도 노인은 당장의 배고픔을 해결할 수만 있다면, 그 미래에 닥칠 마지막이야 어찌됐든 상관없다는 식으로 마음을 굳혔다. 노인은 마지막 눈사슴 앞에 섰다. 눈사슴은 자신의 최후를 직감한 듯, 아무런 저항없이, 그저 노인을 올려다보았다.
노인은 크고 물기 가득한 눈동자와 마주치지 않으려 고개를 돌렸다. 대신 눈사슴의 머리에 대고 방아쇠를 당겼다. 안녕히, 나의 친구, 잘 가렴, 나의 눈사슴, 너의 빨갛게 빛나는 코를 나는 절대 잊지 못할 거란다.
잡은 눈사슴의 해체는 지체없이 시작되었다.
나이프로 뱃가죽과 그 안에 있는 갈비 한복판을 일자로 가르자 선분홍빛 내장이 탱글탱글한 자태를 뽐내듯 튀어나왔다. 내장을 감싸고 있는 피막을 가르자 김이 피어올랐다. 김 속에서는 피냄새가 맡아졌다. 노인이 나이프로 살과 가죽 사이를 찔러넣으며 가죽을 밖으로 당기자 쉬 떨어졌다. 여분의 지방과 살점이 가죽 안쪽에 묻었다. 노인은 그 중 허연 지방덩어리 한 조각을 입으로 베어물었다. 노릿한 냄새와 함께 입 안 가득 기름기가 가득 찼다. 해체 속도가 더욱 빨라졌다.
익숙한 솜씨였다. 그럴 수 밖에. 여덞 번이나 해봤으니까.
처음에 먹었던 것은 댄서? 아니면 돈더였던가. 기억이 나질 않는다. 두 번째는 확실하게 큐피드였다. 아홉 마리 눈사슴 중 가장 작았지만 실상은 왠걸, 배를 열어보니 지방이 가득 차 있어 먹고 남은 기름으로 불을 지필 정도였다. 세 번째는 빅센이었던가 코멧이었던가, 아마 코멧이었던 듯하다. 가장 튼튼하고 힘이 센 눈사슴이었다. 근육질이 가득해서 굽는 대신 육수로 국물을 끓여 푹 고아삶아 먹었다. 정말 맛있었다. 노인은 그때를 생각하며 침을 꿀꺽 삼켰다. 그리고 마침내 모든 해체가 끝났다. 노인은 감탄하지 않을 수 없었다.
적당한 기름에, 적당한 근육, 탄력이 넘치는 살점.... 최고의 사슴고기다. 어떻게 먹어야 할까. 숙성시켜서 스테이크로 구워먹을까? 그러나 기다리기에 노인은 너무 배가 고팠다. 국물을 내어 요리를 할까? 양은 많겠지만 그러기에는 이 고기가 너무 아깝다. 삶아서 먹을까? 그건 아무래도 심심하다. 튀김은 어떨까. 너무 손이 간다.
아무리 생각해 봐도, 이 최상의 사슴고기에 뭔가 인위적인 조리를 가한다는 것은,
그건 이 최고의 친구에 대한 모독이다.
노인은 고기를 생으로 베어물었다. 기생충 걱정은 하지 않는다. 이곳은 극한의 추위가 사시사철 내내 계속되는 극지방. 이제 더 이상 누구도 노인을 부르지도, 찾지도, 기다려주지도 않는다. 오직 이 순간 있는 것은, 최후의 만찬을 즐기려는 늙은이 혼자다. 체면따위 개나 주라지, 노인은 자신의 트레이드마크이자 자랑거리인 풍성한 흰수염에 피가 묻는 것도 아랑곳하지 않고 식사를 계속했다. 마찬가지로 노인의 자랑거리인 빨간 코트에도 피가 묻어 더러워졌지만 그런 생각은 단 일초도 떠오르지 않았다.
여기에 있는 것은, 왕년에 모든 아이들의 자상한 할아버지이자 푸근한 너털웃음을 터트리며 온세계를 누볐던 남자가 아니라, 그저 굶주림에 지쳐 자기 친구를 잡아먹은 노인 한 사람에 지나지 않았으니까.
그리고 마침내 모든 식사가 끝나자
거기에는, 오랫동안 노인의 친구이자 직장 동료이며 또 분신이나 진배 없었던 눈사슴의 잔해가 어지럽게 남았다.
노인은 기운이 돌아온 노구를 이끌고 천천히, 그러나 정성스레 마지막 사슴의 묘를 만들어 주었다. 그리고 마지막 남은 썰매의 나무판자를 세워 묘비도 만들고 거기에 묘명도 적어 주었다. 노인은 오랫동안 마지막 눈사슴의 무덤을 물끄러미 바라본 뒤, 아무 말 없이 등을 돌렸다. 차가운 북극의 바람이 무덤 위를 스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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