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팔자기구류 甲 황후 양헌용.txt
게시물ID : history_13879짧은주소 복사하기
작성자 : 별짓을다하네
추천 : 18
조회수 : 1670회
댓글수 : 6개
등록시간 : 2014/02/02 12:00:4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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양헌용.
 
 
황제의 지어미로서 만백성의 어버이로 불리우는 황제와 더불어 국모로 지칭되는 황후 역시 지엄한 존재다. 우리나라 사극에서도 보면 중전을 폐서인하느냐 마느냐의 문제는 임금과 신하들이 엎치락 뒤치락하며 토론배틀을 벌일만큼 국가중대지사에 속했던 것을 알수 있는데, 중국 진(晉)이란 나라에 한번 겪기도 힘들다는 폐위를 무려 대여섯번 당하고도 또 그 횟수만큼 복위를 반복한 황후가 있었다.
 
 
그녀의 이름은 양헌용. 여러 요인들이 있겠지만 대개 폐위는 소위 말하는 당사자의 부도덕함을 구실로 들어 이루어진다 하나 이 양헌용의 경우는 순전 시대적 배경 탓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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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晉)나라는 <삼국지>의 배경이 되는 삼국시대를 통일한 왕조다. 서기 280년, 오(吳)를 정벌함으로서 천하통일의 대업을 이룬 진나라도 서기 290년, 초대 황제 무제 사마염의 죽음을 기점을 몰락의 길을 걷기 시작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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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제 사마염.
 
 
 
몰락의 시초가 되었던 사건은 사마염 사후 벌어진 권력다툼이었다. 사마염의 아들이자 암군의 표본으로 불리우는 2대 황제 혜제 사마충의 무능과 어리석음을 틈타 득세한 외척세력과 이것에 반발한 사마씨 황족 간의 싸움이 판을 치고 또 외척세력을 몰아낸 황족세력이 다시 집권하지만 이들 역시 곧 부패와 타락의 길을 걸어 이번에는 황족간에 싸움이 벌어지는 혼란이 계속되는데 역사에서는 이를 팔왕의 난이라 부른다.
 
 
이러한 배경 속에서 양헌용은 이 무능하기 짝이 없는 혜제 사마충의 두번째 황후로 들어간다. 참고로 첫번째 황후는 이 팔왕의 난의 사실상 원인제공자이자 도화선이 되었던 중국의 역대 황후들 중 제일 못돼먹었었다는 가남풍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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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시 제국에 심한 기근이 들어 백성들이 먹을 양식이 없어 굶어죽어간다는 보고에
"쌀이 없으면 고기를 먹으면 될 것 아닌가?" 라는 역사에 길이 남을 명언을 남겨
오늘날까지 그 명성이 전해지고 있는 혜제 사마충. 발언에서 미루어 짐작할 수 있듯 멍청하고 무능한 황제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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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남풍.
 
더이상 자세한 설명은 생략한다.
 
 
그녀의 가문인 양(羊)씨 일가는 쟁쟁한 명문호족 태산 양씨 가문으로, 양헌용이 황후로 들어갈 수 있었던 데에는 이 명문가 출신의 규수라는 점 외에도 아버지 양현지가 황족 조왕 사마륜의 수하심복인 손수란 사람과의 두터웠던 친분이 크게 작용했다.
 
 
비록 빽으로 황후라는 자리에 올랐지만 그녀의 성품은 온화하고 후덕한데다 명문가 출신답지 않게 소박하여 실로 일국의 국모로 손색없었다. 때는 서기 300년, 이것이 양헌용의 첫번째 황후생활이다.
 
 
첫번째 폐위 : 황후가 된지 불과 1년째인 서기 301년, 권력욕 충만하던 조왕 사마륜이 정변을 일으켜 황제 혜제 사마충을 몰아내고 제위에 오르는 사태가 벌어진다. 사마륜의 조치로 양헌용과 그녀의 남편 혜제 사마충은 폐위되어 어느 외딴 성에 감금되는 처지가 되고만다.
 
 
두번째 복위 : 사마륜이 대권을 잡았다지만 반발하는 세력은 산재했다. 다른 사마씨 황족들이 연합하고 거병하여 사마륜을 쳐 없앴고 이 덕택에 혜제 사마충과 양헌용은 감금에서 풀려나 다시 복위된다. 이때도 아직은 서기 301년이다.
 
 
팔왕의 난은 수년간에 걸쳐 여덟명의 황족들이 골육상잔을 벌이며 권력을 다투던 사건이다. 조왕 사마륜이 죽고 다시 황제가 복위되었다고는 하나 여전히 혼란의 연속이었다. 조왕 사마륜은 다른 종실왕들의 공격으로 패사했지만 그 뒤를 이어 이번에는 제왕 사마경이란 이가 집권하여 전횡하기 시작한다. 그러자 다시 여러 황족들이 다시 연합하여 제왕 사마경을 작살내어 죽였다. 그러나 또 장사왕 사마애란 놈이 그런 짓을 또 되풀이 하니 서기 304년, 성도왕 사마영이란 인물이 그런 사마애를 공격하여 무너뜨리고 권력자가 된다.
 
두번째 폐위 : 여기서 양헌용은 다시 애꿎은 피해자가 된다. 서기 304년 2월, 권력을 쥔 성도왕 사마영은 양헌용이 과거 조왕 사마륜에 의해 앉혀진 괴뢰황후이니 부정탄답시고 폐위할 것을 혜제 사마충에게 요구한다. 실세가 반협박 식으로 요구해오니 어쩔도리 없던 사마충은 조서를 내려 양헌용을 폐서인 해버린다. 그리고 예전에 감금되었던 곳으로 다시 감금된다.
 
 
세번째 복위 : 국사를 좌지우지하는 성도왕 사마영의 전횡은 다른 황족들의 반감을 사기에 충분했다. 결국 일은 벌어져 동해왕 사마월이란 황족이 거병하여 사마영과의 전쟁을 일으킨다. 혜제 사마충의 복권이라 쓰고 본인의 집권이라 읽는 명분 하에 벌어진 난리통 와중에 양헌용은 어느 장수의 도움으로 풀려나 다시 수도 낙양으로 돌아가 복위된다. 그해 7월의 일이다.
 
 
세번째 폐위 : 한달 후인 8월, 성도왕 사마영과 동해왕 사마월이 박터지가 싸우는 틈을 타 하간왕 사마옹이란 황족이 수도 낙양을 점거하는 쿠데타를 일으킨다. 이번에도 애먼 양헌용만 피해를 입고 복위된지 한달 만에 다시 폐위된다.
 
 
네번째 복위 : 서기 305년, 4월. 성도왕 사마영과 동해왕 사마월, 하간왕 사마옹의 삼파전 여파로 혜제 사마충은 졸지에 장안(長安)으로 이끌려가고 전장이 장안으로 옮겨가는 바람에 수도 낙양은 텅비게 된다. 몇몇 뜻있는 신하들이 다시 양헌용을 모셔와 복위시킨다.
 
 
한편 장안에서는 하간왕 사마옹이 성도왕 사마영을 배반하여 죽이고 혜제 사마충을 끼고 실세노릇하고 있었다.
 
 
네번째 폐위 : 네번째로 복위된지 불과 몇일 후, 제멋대로 양헌용이 복위되었다는 소식을 들은 하간왕 사마옹이 또 혜제 사마충을 겁박하여 다시 폐위하라는 조서를 내리게 했다. 결국 양헌용은 황후가 된지 몇일만에 다시 폐위되고만다.
 
 
다섯번째 복위 : 그해 11월, 여러 신하들이 장안에 있는 혜제 사마충으로부터 양헌용을 다시 복위시키라는 밀조를 받았다고 주장하며 양헌용을 복위시킨다. 이것은 곧 거짓으로 드러나는데 다섯번째 폐위에서 보도록 하자. 설령 거짓이었다고는 하나 이미 폐위된 황후를 자체적으로 복위시키리만큼 양헌용이 당시 많은 이들로부터 지지를 받고 있었다는 단적인 증거라 하겠다.
 
 
다섯번째 폐위 : 다시 복위된지 얼마 지나지 않은 11월의 어느 때. 낙양현령(현령은 일개 하급지방관리다) 하교란 자가 신하들이 양헌용을 복위시키는데에 내세운 혜제 사마충의 밀서의 조작 가능성에 의혹을 두고 조사를 벌였고 곧 거짓으로 드러나 양헌용은 하교에 의해 폐위된다. 일개 하급 지방관리 따위가 일국의 황후를 폐위시켜버린 것이다. 차이가 좀 있지만 오늘날로 치자면 면장이 여대통령을 몰아낸 셈이랄까?
 
 
여섯번째 복위 : 이듬해인 서기 306년, 6월. 삼파전의 최종 승리자 동해왕 사마월이 혜제 사마충과 장안에서 다시 낙양으로 귀환해온다. 혜제 사마충의 조치로 양헌용은 다시 풀려나 복위된다. 이제는 슬슬 폐위되고 복위되는게 익숙할 때도 됐다.
 
 
결과적으로 동해왕 사마월이 팔왕의 난의 최종 승리자가 되고 더불어 양헌용이 복위되는 이때가 팔왕의 난이 종결되는 시점이기도 하다. 얼마 후 혜제 사마충은 사망하고 미망인이 된 양헌용은 후임황제 회제 사마치의 배려로 비로소 황후다운 대접을 받으며 살게된다. 회제 사마치는 양헌용이 머무를 궁도 마련해주고 혜황후라는 칭호를 주어 선제의 황후로서의 지위를 되살려 주었는데, 이 몇 년간이 아마 그나마 양헌용이 황후노릇을 할 수 있었던 때가 아닌가 싶다.
 
 
돌이켜 보면 수년간의 수모와 모욕을 인내하며 버텨온 세월이었을터. 급변하는 정세 속에 제 목소리 한번 못내보고 속절없이 이리 치이고 저리 치이며 당하고만 살던 그 고난의 세월을 보상받는 듯 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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양헌용.
 
 
그러나 그녀의 행복도 그리 오래 가지 못했다. 이 역시 시대적 배경 탓이다. 수년에 걸친 내란으로 진의 국정은 피폐해졌고 나라 각지에서는 못살겠다 갈아엎자하여 일어난 반란들이 속출하여 이 무렵의 진나라는 총체적 국난 그 자체였다. 거기다 설상가상으로 얼마 후 이번에는 진의 혼란을 틈타 힘을 기른 북방의 흉노가 세운 한(漢)나라가 남하해오는 사태가 벌어지니 이것이 영가의 난이다.
 
 
팔왕의 난이라는 시대의 소용돌이에 휘말려 기구한 삶을 살아갔던 양헌용이었건만 그녀 입장에서는 참으로 불우하게도 이 재앙을 피해 갈 수는 없었다. 이 영가의 난은 양헌용의 삶 뿐만 아니라 진나라 전체를 송두리째 앗아갔다. 결정적으로 진 왕조가 망하게 되는 사건이었던 것이다.
 
 
여섯번째 폐위 : 서기 311년, 흉노의 한(漢)이 수도 낙양을 함락하여 회제 사마치를 비롯한 진의 신하들을 포로로 삼아 저들의 수도로 압송해간다. 나라가 망했으니 자연스레 폐위된다. 이때 한(漢)의 황족 유요란 인물은 다른 귀비들은 모조리 도륙냈으면서 양헌용만큼은 무슨 이유에서인지 유일하게 살려서 제 전리품으로 삼았다고 한다. 양헌용 역시 함께 끌려간다.
 
 
진나라는 그렇게 망했고 황제인 회제 사마치를 포함한 진의 유신들은 망국의 서러움을 한껏 겪다 차례로 죽임을 당한다. 다만 망국의 황후였던 양헌용은 훗날 한(漢)의 황제가 된 유요의 황후로 봉해졌는데, 아마 유요가 양헌용의 미모에 반해 그랬지 않나 한다. 이것이 일곱번째 복위다.
 
 
일곱번째 복위 : 왕조가 다르니 복위란 표현을 쓰기 뭐하지만 그냥 편의상 횟수로 치도록 하자. 망국의 황후가 이제는 조국을 멸한 원수의 나라의 황후가 되었으니 이만한 모욕도 없겠지만 이미 산전수전 다 겪으며 고된 삶을 살아온지라 명문가 출신답게 지녔을 명예나 절개 및 지조 따위는 희석된지 오래였지 싶은 양헌용은 의외로 현실에 순응하는 모습을보여준다. 이와 관련된 일화가 있다.
 
 
어느날 유요가 양헌용에게 물었다. "나는 사마씨 놈들에 비하면 어떠한가?" 양헌용이 답했다. "폐하께서는 나라를 세우신 명군, 사마충은 나라를 팔아먹은 암군이니 어찌 비교하겠습니까?"
 
 
유요가 물은 사마씨놈들이란 양헌용의 전남편 혜제 사마충을 말한다. 그러니 비교하자면 어떠냐고 물은 것인데 위에서 보다시피 양헌용은 말할 가치도 없다는 식으로 대꾸해버린다.
 
 
전 왕조에서 당한 수모와 모욕에 대한 분노와 환멸에서 비롯된 말인지, 아니면 자신의 생사여탈권을 쥔 적국의 황제 앞에서 그저 목숨을 부지하고자 내뱉은 말인지 알 수는 없는 일이다.
 
 
양헌용은 유요의 황후가 되어 유요의 총애를 받으며 자식도 낳았고 그 자식은 유요의 뒤를 이어 황제가 되었다. (물론 그 자식을 마지막으로 나라가 쫑났던 것이 함정이지만) 비록 망국의 황후로서 원수이자 적국의 황후가 되어 남은 여생을 보냈다지만 아마 이때가 한 여자로서 더 행복하지 않았을까 싶다. 오히려 조국의 멸망이 본인에게 행복을 가져온 셈이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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