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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하대전
게시물ID : history_13870짧은주소 복사하기
작성자 : Nardien
추천 : 13
조회수 : 1538회
댓글수 : 11개
등록시간 : 2014/02/01 15:34:36
항우.jpg

「力拔山兮氣蓋世, 時不利兮騅不逝. 騅不逝兮可柰何, 虞兮虞兮柰若何!」
힘은 산을 뽑을 수 있고, 기개는 온 세상을 덮을 만하건만
때가 불리해 오추마 또한 나아가지 않는구나.
오추마가 달리지 않으니, 도저히 어찌해볼 도리가 없구나.
우희야, 우희야. 이를 어찌해야 한다는 말이냐?
-사기 항우본기-


항우가 야전에서 겪은 유일한 패배로 이 싸움으로 항우는 몰락했고, 한나라가 중국을 재통일하였다. 재밌는 일이지만, 이 전투가 일어났던
기원전 202년 10월엔 서양에서는 16년동안 단 한번도 패배한 적이 없었던 한니발이 드디어 자마에서 대(大)스키피오에게 패해 몰락하였다.


1. 배경
팽월.png
팽월

(1) 팽월이 미쳐 날뛰고 있습니다!
漢王三年, 彭越常往來為漢遊兵, 撃楚, 絶其後糧於梁地. 漢四年冬, 項王與漢王相距滎陽, 彭越攻下睢陽、外黃十七城.
한 3년, 팽월은 항상 여기저기에서 한나라의 유격병이 되어 초 나라를 공격했고, 위나라에서 초 나라의 후방으로 오는 군량 보급로를 
차단했다. 한 4년 겨울에 항왕은 한왕과 형양 땅에서 서로 대치했는데, 팽월은 수양(睢陽), 외황 등 17개의 성을 함락시켰다.
-사기, 팽월 열전-


팽성에서의 패전 이후 수하가 구강왕 영포를 포섭하여 시간을 번 사이, 번쾌가 폐구를 수몰시키고 한신이 위나라를 항복시킴으로서 
한나라는 위기에서 벗어날수 있었지만 여전히 불리한 상황이었다. 용저가 결국 영포를 격파하고 구강을 평정하자, 드디어 항우는 군사를 이끌고 
유방이 있던 형양을 포위, 공성전을 시작한다. 전세가 불리해지자 유방은 화친을 청했으나 항우의 군사였던 범증이 반대하여 무산되었다. 
진평이 반간계를 이용, 항우를 속여 범증을 내쫓게 만들었으나, 나중에 속은 것을 깨달은 항우는 더욱 격렬하게 형양을 공격했다. 
한나라 장수 기신이 유방으로 변장하여 초군의 주의를 끈 틈을 타 유방은 형양에서 탈출, 영포와 함께 군사를 모아 성고로 들어갔다. 

이때, 팽월이 항우의 배후에서 보급을 끊고 초나라 장수 설공을 죽이는 등 깽판을 쳐 항우가 포위를 풀수밖에 없게 만든다.
그러나 항우는 팽월을 격파하고, 다시 한나라를 공격, 형양을 함락시키고 이를 지키던 종공을 죽이고 주가를 삶아 죽였다. 
그리고 곧바로 성고를 공격, 함락시켰고 유방은 또다시 하내로 도망친다. 이제 항우가 승리할수 있을 것처럼 보였다.

그러나 이때, 유방의 형인 유가가 팽월과 힘을 합쳐 초나라의 배후를 공격하였다. 팽월은 초군을 대파하고 수양, 외황 등 17개 성을 함락시키며 
전국구 규모의 깽판을 친다. 항우는 어쩔수없이 공격을 중단하고 다시 팽월을 공격, 팽월을 박살내지만, 이 틈을 타 
유방은 형양과 성고를 도로 되찾았다. 항우가 다시 전선에 돌아와 유방과 대치하고 있는 사이, 북쪽에서 비보가 전해진다.

한신.png
한신

(2) 한신이 미쳐 날뛰고 있습니다!
한신이 마침내 표를 사로잡고, 하동을 평정하여, 사람을 보내 한왕에게 청하길, “원컨대 3만 병사를 더해주시면, 신이 북으로 
연‧조를 잡고, 동으로 제를 치고, 남으로는 초의 보급로를 끊은 후, 서쪽에서 대왕과 형양에서 만나기를 청합니다.” 라 했다.
-한서 한신전-


기습을 통해 위왕 위표를 항복시켜 위나라를 평정한 한신은 유방에게 3만 병력을 받아 북진을 시작하였다. 
한신은 연여에서 하열을 대파하고 한달만에 대나라를 정복한다. 한신은 바로 조나라를 공격했고, 
조왕 조헐과 대왕 진여는 20만 병력을데리고 정형에서 이를 요격하러 나선다. 한신은 3만의 병력으로 배수진을 쳐 조군을 묶어놓은 사이, 
2천의 기병대를 이용해 조군 후방의 정형관을 기습점령했고, 이 2천의 병력으로 다시 조군의 배후를 습격, 포위공격하자 조군은 무너졌다. 
대왕 진여가 여기서 죽었고, 조왕 조헐은 도망치다가 양에서 잡혀 죽었다.
상황이 이리되자, 연나라 왕 장도는 싸우지도 않고 항복했다. 이때 역이기라는 사람이 제왕 전광을 설득해 한나라에 항복시켰는데, 
한신은 이를 무시하고 제나라를 공격해 수도 임치를 함락시킨다. (이는 한신이 욕먹는 부분이다. 한신은 제나라가 항복했다는 것을 알고 있었음에도 역이기가 더 큰 공을 세울까 두려워 나는 유방에게 아직 제나라를 공격하지 말라는 명령을 받지 못했다는 어거지를 대고 제나라를 기습한다. 결과적으로 이겼지만, 쓸데없는 출혈을 만들었고 자칫하면 용저에게 패배할 수도 있었다.)수도가 함락되는등 위기에 처하자, 제나라는 그동안 적이었던 
항우에게까지 도움을 요청한다. 항우는 용저에게 20만 병력을 주어 제나라를 구원하게 시킨다. 그러나 한신을 겁쟁이라며 무시하던 용저는 
지연전을 펼치자는 조언을 무시하고 요격을 나섰고, 간단히 유인책에 걸려들어 유수에서 수공을 당해 병력이 삼분되어 몰살당한다.
여기서 용저는 전사하였고, 제왕 전광은 사로잡힌다. 이리하여 한신은 위, 대, 조, 연, 제 5나라를 정복했다. 
3만의 병력으로 시작하여 고작 2년만에 이루어낸 일이었다.


(3) 고립되는 항우
용저가 대패하고 죽었다는 소리를 듣자, 항우도 불리한 상황이라는 것을 자각할수 밖에 없었다. 이때 항우는 유방의 부모와 그의 처인 여후를 포로로 잡고 있었는데, 이들을 돌려보내는 조건으로 유방과 화친하고 팽성으로 돌아가게 된다. 그러나 유리한 상황이었던 유방은 이대로 전쟁을 끝낼 생각이 없었다. 장량과 진평의 헌책을 받아들인 유방은 군대를 이끌고 팽성으로 돌아가던 항우를 고릉에서 기습했으나, 항우는 역으로 유방의 군대를 박살낸다. 유방은 결국 한신과 팽월이 합류해야 항우를 이길수 있을 것이라는 결론을 내고, 그들에게 왕의 자리를 주어 불러들인다.

항우는 고릉에서 한군을 격파하여 기세를 올렸지만, 왜인지 팽성으로 돌아가지 못하고 그곳의 남쪽인 해하에 주둔하여 방벽을 쌓고 농성하게 된다. 이에 대해서는 의견이 분분하지만, 팽성 북쪽에 한신이 있었다는 것을 고려할때 한신이 남하하여 항우는 팽성에 돌아갈 여건이 못된 것이 아닌가 하는 추측만 있을 뿐이다. 어쨌든 항우는 해하에서 고립되었고, 식량도 병력도 부족하였다. 결국 항우는 이를 뒤집기 위해 결전에 나서게 된다.


2. 패왕의 패배와 도주
해하전투.png
해하전투도

五年, 高祖與諸侯兵共擊楚軍, 與項羽決勝垓下. 淮陰侯將三十萬自當之, 孔將軍居左, 費將軍居右, 皇帝在後, 絳侯、柴將軍在皇帝後. 項羽之卒可十萬. 淮陰先合, 不利, 卻. 孔將軍、費將軍縱, 楚兵不利, 淮陰侯復乘之, 大敗垓下. 項羽卒聞漢軍之楚歌
5년(기원전 202년), 고조(高祖, 한왕을 가리킴)는 제후군과 함께 초군을 공격해, 해하에서 항우와 자웅을 겨루었다. 
회음후는 30만 군사를 거느리고 초군과 정면으로 대진하니, 공장군(孔將軍)은 그 좌측에 진을 치고 비장군(費將軍)은 
그 우측에 진을 쳤으며 한왕은 후면에 위치하고 강후(絳侯)와 시장군(柴將軍)이 또 한왕의 후면에 진을 쳤다. 
회음후 한신이 먼저 초군과 교전했으나 전세가 불리해 퇴각했다. 공장군과 비장군이 좌우에서 협공하자 초군의 전세가 불리해졌다. 
한신이 다시 이때를 틈타 반격을 가해 해하에서 초군을 크게 무찔렀다. 
항우는 마침내 한군(漢軍)이 부르는 초 나라 노랫소리를 듣고 한군이 초 땅을 모두 점령했다고 생각했다.
-사기 고조본기-


당시 한군의 규모는 정확하지 않지만, 사기에는 한신이 30만 병력을 이끌고 선봉에 섰다고 기록되어 있다. 당시 상황을 볼때, 
유방이 이끈 중군이나 주발, 시무가 이끈 후군의 규모는 한신의 병력에 비해 결코 많을수 없었겠지만 적어도 10만은 되었을 것이다. 이런 불리한 상황이었음에도 항우는 병력을 이끌고 정면 공격을 해 초반에 한신을 압도했다. 그러나 곧 공취와 진하가 좌우에서 병력을 이끌고 공격하였고, 한신이 정면에서 반격하자 초군은 크게 패하였고, 항우는 도로 고립되어 버리고 만다. 그리고 초군의 사기를 꺾기 위해 한군은 초나라 노래를 불렀고, 초군은 탈주병이 속출하였다. 심지어 종리매, 계포같은 항우의 심복들조차 이때 도망쳤는데, 이것이 그 유명한 사면초가의 고사.

항우는 끝까지 자신을 따르는 800명의 병사를 데리고 한군의 포위를 뚫고 도망쳤다. 관영은 5천의 기병대를 이끌고 그를 쫓았고, 회수를 건넜을때, 항우의 곁에는 1백명의 초군만 남아 있었을 뿐이었다. 음릉에서 항우에게 원한을 품었던 농부가 항우를 속여 늪지로 길을 안내했고, 항우는 그 늪지에서 길을 해맸다. 이런 고난 끝에 동성에 이르렀을때 항우는 고작 28명의 기병만 데리고 있었고 포위당하여 더이상 도망칠 길이 없었다. 그러자 항우는 말도 안되는 무력을 보여주었다. 한군의 포위망으로 뛰어들어 한군을 전멸시키고, 장수 한명을 베었으며, 그를 추격하던 적천후 양희는 크게 놀라 달아나 버렸다. 이러는 동안, 초군은 또다른 한군에게 포위당해 있었는데, 항우가 단신으로 뛰어들어 도위 한명을 죽이고 한군 1백여명을 죽여 포위를 풀었고, 끝내 오강으로 도망쳤다. (믿기진 않겠지만 정사 항우본기에 쓰인 내용이다. 거기다 당시 항우는 
잠도 제대로 못자고 도망친데다가, 늪에 빠져 고생은 고생대로 해 체력이 바닥난 상태였다!) 오강에서 마침 어느 정장이 배를 가지고 있었고, 
항우에게 강동으로 건너가기를 청했으나, 항우는 이를 거절했다. 항우는 자신의 병사들과 함께 말에서 내려 한군과 최후의 결전을 벌였는데, 
항우는 열군데가 넘는 상처를 입었으나, 그동안 혼자서 한군 수백을 죽인뒤 자결하였다. 
이렇게 패왕은 죽었고, 난세는 끝이 났다.


3. 항우는 왜 패배했는가?
항우2.png

夫運籌策帷帳之中, 決勝於千里之外, 吾不如子房. 鎭國家, 撫百姓, 給餽饟, 不絶糧道, 吾不如蕭何. 連百萬之軍, 戰必勝, 攻必取, 吾不如韓信. 此三者, 皆人傑也, 吾能用之, 此吾所以取天下也. 項羽有一范增而不能用, 此其所以爲我擒也.
"군막(軍幕) 속에서 계책을 짜내어 천리 바깥에서 승리를 결정짓는 일에서는 내가 장량만 못하며, 
나라를 안정시키고 백성들을 위로하며 양식을 공급하고 운송도로를 끊기지 않게 하는 일에서는 내가 소하만 못하고, 
또 백만대군을 통솔해 싸움에 반드시 승리하고 공격함에 반드시 점령하는 일에서는 내가 한신만 못하오. 
이 세 사람은 모두 걸출한 인재로서 내가 그들을 쓸수 있었던 것이 바로 내가 천하를 얻을 수 있었던 까닭이며, 
항우는 단지 범증 한 사람만이 있었으나 그마저 끝까지 신용하지 못했으니 이것이 항우가 나에게 패배한 까닭이오."
-유방, 사기 고조본기-


(1) 전술적인 면
굳이 말하자면, 해하에선 도저히 항우가 이길수 없던 상황이었다. 선봉을 이끌던 한신의 군대만 30만에 달했고, 그 후방에 유방이 이끌던 중군과 주발, 시무가 이끌던 후군이 또 따로 있었다. 설사 항우가 초월적인 지휘력을 선보이며, 한신이 이끌던 선봉을 무너뜨린다고 하더라도 2번의 격전을 더 치루어야 했다는 이야기다. 물론 팽성에서 항우는 고작 3만의 병력으로 56만의 한군에게 지옥을 보여주었지만, 당시엔 한군과 초군의 질적 차이가 컸고 지휘통제도 제대로 잡히지 않았으며 매일 연회를 배풀며 방심해 있던 한군을 기습했으니 상황이 달랐다. 물론 끊임없는 격전을 오랫동안 벌였던 항우의 직속부대만큼은 아니었지만, 한군 역시 많은 전쟁경험을 쌓았고 지휘관은 후대에 항우보다 높은 평가를 받는 한신이었다.

항우는 전군을 이끌고 한군의 전면을 격렬하게 공격했고 이는 다른 군이 움직이기 전에 전열을 무너뜨려 
모랄빵(병사들이 전투의지를 잃고 멋대로 전장을 이탈하는 상황)을 유도하기 위함이었다. 그러나 한군은 오합지졸이 아니었고 
전열이 무너지기 전에 측면이 공격당해 삼면이 포위되어 초군은 몰살당하고 말았다. 이를 볼때, 항우가 패배한 이유는 전술적인 면은 아니었다.
여담이지만 이런 해하 전투의 진행은 비슷한 시기 있었던 칸나이 전투와 비슷한데, 여기서 로마군은 한니발이 이끌던 정면을 맹렬히 공격해 
후퇴시켰으나 그틈에 카르타고의 좌우군이 움직여 양익포위를 성공시켰다. 다른 점이라면, 양익포위 이후 한니발은 우세한 기병대로 
그들의 후방을 공격해 포위망을 완성시켰지만 한군은 딱히 기병의 모습이 보이지 않는다는 것. 
그리고 한니발은 로마군의 절반밖에 안되는 보병으로 반포위를 형성하는 미친 짓을 벌였지만 
당시 한군은 3배 이상의 압도적인 보병전력으로 무난하게 반포위를 완성했다는 것.

팽월.jpg

(2) 전략적인 면
항우가 비판받는 부분은, 전략적 시야의 부재, 특히 한신의 북벌을 막지 못했다는 것과 자신의 부대를 제외하곤 재량권을 주어 단독으로 행동하는 부대가 없었다는 점을 꼽곤 한다. 하지만 이것이 정당한 평가인지는 의문이다. 일단 항우에겐 한신과 같은 장수가 없었다. 기껏해야 용저나 종리매였는데, 용저는 20만 군을 이끌고 나갔다가 한신에게 전멸한 인간이고 종리매도 항우가 팽월을 잡으러 갈때 형양의 방어를 맡았다가 포위되는등, 한신과 비할바가 아니었다.(물론 종리매의 패배는 성고의 방어를 맡은 조구가 항우의 명을 어기고 한군을 공격했다가 대패했던 것이 크다.) 실제로 항우는 소공각 같은 장수에게 군대를 주어 팽월을 공격하게 했지만 대패하는 등, 항우가 군대를 이끌지 않았던 전투에서 낭패를 보았다. 다른 장수들을 믿지 못한 항우보다는, 항우의 인재를 보는 눈과, 당대의 인재들이 우연히도 바글바글했던 먼치킨 지역인 패현(번쾌, 주발, 소하, 조참, 하후영, 왕릉, 노관 등등이 죄다 패현 출신이다;;)을 탓해야 맞는 일.

한신의 북벌을 막지 못했다는 것도 사실 당연한 일이었다. 당시 한신이 정복한 나라는 위, 조, 대, 연, 제 다섯개였는데 위나라는 일단 한나라 방어선 후방이라 도와줄수 있는 상황이 아니었다. 또한 위표는 한번 한나라에 항복했던 인물. 거기다 당시 조왕 조헐과 대왕 진여는 항우와 싸우던 제나라와 손잡고 상산왕 장이를 마음대로 쫓아내고 자리를 뺐은 이들로, 항우의 적이면 적이었지 결코 아군이 아니었다. 연왕 장도는 원래 항우의 부하이긴 했으나, 항우가 임명한 요동왕 한광을 죽이고 그 땅조차 아우른 상태라(비록 연왕자리를 놓고 한광과의 갈등이 있었지만.) 항우의 세력이라고 보기엔 떨떠름한 상태였다. 거기다 제나라는 아예 나라의 명운을 걸고 전쟁해댄 사이였으니, 
더 설명이 필요한가? 항우 입장에서는 이들 제후국들은 적이 될지도 모르는 상대였다. 거기다 한신은 고작 3만병력을 가지고 있었으니, 불리한 상황도 아니었던 이들을 위해 항우가 대신 피를 흘려줄 이유는 없었다. 그냥 지켜보다가 한신이 이긴다면 그때 개입하는 것이 가장 효율적인 일이었다. 
다만 개입할 틈도 없을만큼 한신의 북벌이 빨랐던 것이 문제. 한신의 북벌이 멈출줄 모르고 계속되자 항우는 철천지원수였던 제나라를 도우려 
용저에게 20만 군을 주었다. 사실 항우 입장에서는 한신의 북벌을 막기 위해 최선을 다한 셈이었다.

이 20만대군을 한신이 간단하게 전멸시켜서 문제지.

이런 상황을 종합해볼때, 유방만 공격했던 항우의 전략적 판단이 딱히 틀린 것은 아니었다. 유방만 무너뜨리면 전쟁이 끝난다는 것은 사실이었기 때문이다. 문제는 다른 제후국들을 믿지 못하게 되도록 막장의 인사관리를 한 것과, 한때 항우의 세력권이었는데도 능력을 알아보지 못하고 찬밥대우를 한 한신과 팽월이 유방한테 붙어 역대급의 깽판을 쳤다는 것. 즉, 항우의 사람보는 눈이 가장 큰 문제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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