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양미술사학자 존 카터 코벨(1912~96) 박사가 본 한일 역사
존 카터 코벨 박사
미국의 동양미술사학자 존 카터 코벨의 한국문화 연구 제1편 <부여기마족과 왜(倭)>는 독도 영유권 분쟁이란 단편적인 사건으로만 대중에게 알려진 일본의 역사왜곡이 사실은 1300년의 '장구한 역사'를 지녔다는 사실을 짚으며 "일본인의 9할은 모르고 있는 진짜 일본의 역사"를 그 초입에서부터 차분하게 풀어내고 있다.
"'일 천황 혈통은 만세일계'? 조작"
코벨은 왜곡된 일본 역사 중에서도 "가장 분명하고도 어이없는 부분"으로 고대사를 꼽았다.
근대 교육을 받은 일본 젊은이 대부분이 일본 지배자의 혈통이 '서기전 660년부터 한번도 단절된 일 없이 백수십대를 이어져 온 만세일계의 왕가'라고 배웠고 일제 강점기 교육을 받은 한국 학생들 역시 같은 사실을 주입 당해 왔지만 이는 8세기 당대 일왕을 합법화시키기 위해 '조작된 역사'라는 것.
"'일 천황 혈통은 만세일계'? 조작"
코벨은 왜곡된 일본 역사 중에서도 "가장 분명하고도 어이없는 부분"으로 고대사를 꼽았다.
근대 교육을 받은 일본 젊은이 대부분이 일본 지배자의 혈통이 '서기전 660년부터 한번도 단절된 일 없이 백수십대를 이어져 온 만세일계의 왕가'라고 배웠고 일제 강점기 교육을 받은 한국 학생들 역시 같은 사실을 주입 당해 왔지만 이는 8세기 당대 일왕을 합법화시키기 위해 '조작된 역사'라는 것.
"일본이 서기전 660년에 나라를 세우고 천황 혈통이 한 가계로 이어져 왔다"는 주장은 712년과 720년에 편찬된 <고사기>와 <일본서기> 두 역사서에 나왔다. 역사 편찬 당시 일본 왕가는 왕위에 오른 지 겨우 100년 된 집안이었을 뿐이고 그때까지 일본에는 글을 아는 사람이 거의 없어 문자로 기록된 역사서가 없었다. (…) 그들이 알고 있는 실제 역사는 오직 300년 전부터였지만 1000여 년이나 더 길게 역사를 늘이기 위해 어떤 일왕은 100년이 넘게 통치했다고 썼다."
그러나 100년 역사를 1000년 이상으로 늘이는 과정에서 실수는 불가피한 것이었고 8세기 일본의 사가들은 '일본 최초 왕조가 바다 건너 북쪽으로부터 내려왔다'는 기술을 지우지 않는 결정적인 실수를 저지르고 말았다.
"그들은 무시해버려도 좋을 일개 유목민 집단이 아니라 한 세기에 걸쳐 한국의 북쪽 끝에서 남쪽까지를 휩쓸었던 부여족으로 3세기경 한반도 남쪽으로 내려왔다. 선진기술을 지녔던 이들 부여족이 가야와 백제에 둘러막힌 지역을 버리고 부산에서 바다 건너 새로운 땅 왜를 점령하러 온 369년 무렵에는 가야와 백제에 많은 '사촌'들을 남겨두고 떠났다. 그들은 바다 건너 왜 땅 남서부로 건너간 많은 한국인들이 수백 년 동안 정착해 있음을 알고 있다."
코벨은 당시 역사학자들의 돌이킬 수 없는 범실에 혀를 차며 완벽할 수 없었던 일본 역사 조작의 시초에 묘한 아쉬움을 표하기도 했다.
"8세기 역사학자들의 첫 번째 임무는 이러한 부여족의 일본 정복을 은폐하고 부여족이 이룩한 중앙집권 국가를 당대 일왕네 조상들이 만든 것처럼 바꿔치기 하는 것이었다. 글을 아는 사람이 거의 없던 시대였으면 이런 작업이 그다지 어려운 것은 아니었다."
"한국학자들도 日 주입식 교육에 기죽어"
이처럼 책에 실린 62편의 글을 통해 코벨은 일본의 고질적인 역사왜곡을 학문적으로 되짚었다. 고대부터 조선시대까지 일본은 전적으로 한국의 선진문화에 힘입었는데도 불구하고 왜 이를 숨기려고 하는지 그 근원을 밝히려는 고찰이 전 편을 관통하는 것이다.
일본인도 한국인도 아닌 제3국 학자의 이 같은 객관적 성찰은 한국문화의 정립을 위해 매우 중요한 것이 아닐 수 없다.
그러나 코벨은 "일본학자들은 물론 한국학자들도 일본식 교육의 주입 아래 진실을 밝히는 데 지나치게 겁을 먹고 있다"고 지적했다.
코벨은 특히 "한국을 대표한다는 역사학자나 미술사가들에게 자신의 주장이 전혀 받아들여지지 않아 광야에서 혼자 외치는 듯한 외로움을 느꼈다"고 고백했다.
"일본이 한국에 가한 잘못 중에서도 최악의 것은 한국문화를 말살해서 한국인이 자신의 과거에 대한 자부심을 잃고 자신을 비하하게 만들었다는 것"이라는, 항변에 가까운 아쉬움 토로 끝에는 10년 여간 한국에 머물며 한국을 연구해 온 학자로서의 씁쓸함마저 느껴졌다.
그러나 100년 역사를 1000년 이상으로 늘이는 과정에서 실수는 불가피한 것이었고 8세기 일본의 사가들은 '일본 최초 왕조가 바다 건너 북쪽으로부터 내려왔다'는 기술을 지우지 않는 결정적인 실수를 저지르고 말았다.
"그들은 무시해버려도 좋을 일개 유목민 집단이 아니라 한 세기에 걸쳐 한국의 북쪽 끝에서 남쪽까지를 휩쓸었던 부여족으로 3세기경 한반도 남쪽으로 내려왔다. 선진기술을 지녔던 이들 부여족이 가야와 백제에 둘러막힌 지역을 버리고 부산에서 바다 건너 새로운 땅 왜를 점령하러 온 369년 무렵에는 가야와 백제에 많은 '사촌'들을 남겨두고 떠났다. 그들은 바다 건너 왜 땅 남서부로 건너간 많은 한국인들이 수백 년 동안 정착해 있음을 알고 있다."
코벨은 당시 역사학자들의 돌이킬 수 없는 범실에 혀를 차며 완벽할 수 없었던 일본 역사 조작의 시초에 묘한 아쉬움을 표하기도 했다.
"8세기 역사학자들의 첫 번째 임무는 이러한 부여족의 일본 정복을 은폐하고 부여족이 이룩한 중앙집권 국가를 당대 일왕네 조상들이 만든 것처럼 바꿔치기 하는 것이었다. 글을 아는 사람이 거의 없던 시대였으면 이런 작업이 그다지 어려운 것은 아니었다."
"한국학자들도 日 주입식 교육에 기죽어"
이처럼 책에 실린 62편의 글을 통해 코벨은 일본의 고질적인 역사왜곡을 학문적으로 되짚었다. 고대부터 조선시대까지 일본은 전적으로 한국의 선진문화에 힘입었는데도 불구하고 왜 이를 숨기려고 하는지 그 근원을 밝히려는 고찰이 전 편을 관통하는 것이다.
일본인도 한국인도 아닌 제3국 학자의 이 같은 객관적 성찰은 한국문화의 정립을 위해 매우 중요한 것이 아닐 수 없다.
그러나 코벨은 "일본학자들은 물론 한국학자들도 일본식 교육의 주입 아래 진실을 밝히는 데 지나치게 겁을 먹고 있다"고 지적했다.
코벨은 특히 "한국을 대표한다는 역사학자나 미술사가들에게 자신의 주장이 전혀 받아들여지지 않아 광야에서 혼자 외치는 듯한 외로움을 느꼈다"고 고백했다.
"일본이 한국에 가한 잘못 중에서도 최악의 것은 한국문화를 말살해서 한국인이 자신의 과거에 대한 자부심을 잃고 자신을 비하하게 만들었다는 것"이라는, 항변에 가까운 아쉬움 토로 끝에는 10년 여간 한국에 머물며 한국을 연구해 온 학자로서의 씁쓸함마저 느껴졌다.
‘부여기마족과 왜(倭)’는 10년 전 세상을 떠난 한 미국인 여성 사학자에게 대한 헌사로 보인다. 존 카터 코벨(John Carter Covell·1910∼1996). 미국 태생의 동양미술 사학자로 서양인으로는 맨 처음 일본미술사 박사학위를 받았고,캘리포니아 주립대와 하와이 주립대에서 동양미술사를 가르쳤던 인물이다. 출판사는 이 책을 시작으로 ‘코벨의 한국문화 시리즈’를 이어갈 예정이라고 한다. 조만간 나올 2권의 제목은 ‘일본에 남은 한국미술’. 이름도 낯선 서양 사학자를 뒤늦게 재조명하고 나선 이유가 궁금할 수밖에 없다.
코벨은 1978년부터 1986년까지 한국에 머물며 한일고대사,한국미술,불교,도자기 등에 대한 1400여편의 칼럼을 썼고,‘한국이 일본문화에 미친 영향’ ‘한국문화의 뿌리’ 등 5권의 한국문화 관련 책을 냈다. 당시는 물론 지금까지도 코벨만큼 정력적으로 한국문화를 연구한 서양 학자를 찾기 어려울 정도.
그러나 코벨의 존재가 진정 빛나는 것은 연구의 양이 아니라 그 질 때문이다. 그녀의 연구는 한일간 역사전쟁의 한복판을 통과한다. 바로 한일 고대사 분야다. 일본은 한국으로부터 문화를 전수받았다는 사실을 은폐하고 있을 뿐 아니라 되려 임나일본부설을 통해 자신들이 한국을 지배했었다는 주장을 펴고 있다. 일본 미술사 분야의 거장을 꿈꾸던 코벨은 일본에서 발굴되는 고대 유물의 대부분이 한국 땅에 뿌리를 두었다는 ‘고대사의 진실’을 눈치채게 된다. 그때부터 그녀의 시선은 한국미술사에 집중되었고,일본의 고대유물에 남아있는 한국의 흔적들을 찾아내는데 매진하게 된다.
코벨은 1970년대 후반부터 매우 대담한 주장들을 쏟아내기 시작했다. “4세기경 한국인들이 일본에 건너가 문화를 전수했을 뿐만 아니라 국가 건설을 주도했다” “일본인의 조상 중 상당수는 한국에서 건너간 한인이다” “일본 왕실은 한국에서 말을 배에 싣고 건너간 모험가들이 건국한 왕실에서 시작된 것이다” 등 그녀의 주장은 당시의 한국 사학계에서조차 받아들이기 어려운 것이었다. 게다가 그녀의 글 대부분이 영문으로 발표되는 바람에 대중에게 닿기 어려웠다. 코벨이라는 이름은 얼마 지나서 잊혀지고 만다.
죽은 코벨을 되살려낸 편역자는 김유경(59)씨다. 언론인 출신인 김씨는 1980년대 초반 문화부 기자로 코벨의 글을 받아 1년간 신문에 연재했던 인연이 있다. 그로부터 20년도 더 지난 후에 코벨을 다시 기억해낸 이유가 뭘까? 김씨는 “한국문화를 세계에 알리는데 코벨만한 사람이 없다”면서 “코벨은 100년에 한 번 나올까말까한 한국문화 해설자”라고 소개했다. 제3국 학자라는 객관적 위치,유물과 예술품을 통한 고고학적 접근,누구나 읽기 쉬운 칼럼 형식 등 코벨의 미덕이다. 김씨가 코벨의 글을 수집하고 번역하기 시작한 것은 1990년대 중반부터. 1999년 출간된 ‘한국문화의 뿌리를 찾아-무속에서 신라 불교까지’(학고재)는 그 첫 결과물이었다.
이번 책은 바다 건너 일본을 정벌한 부여족과 가야에 대한 글들을 묶은 것이다. 부여족의 야마토 정벌 과정과 왕권 수립의 증거,일본에 남아있는 한국문화의 흔적,한국이 일본에 전한 영향,일본의 역사왜곡 등을 다룬 62편의 칼럼이 수록돼 있다.
코벨은 부여의 일본 정벌을 뒷받침하기 위해 다수의 외국 학자들을 동원한다. 미국의 그리피스,페놀로사,게리 레저드 등이 코벨보다 앞서 일본문화의 근원이 한국이라고 주장했고,일본인 학자 중에도 에가미 나미오,기다 사다기지 등이 기마민족 정벌론을 인정했다. 한국 사학자로는 북한의 김석형과 남한의 천관우,최태영의 연구 결과가 소개된다.
김유경씨에 따르면 코벨의 연구에 대해 한국이 정부 차원에서 베푼 지원은 없었다고 한다. 코벨은 6개월마다 있었던 비자갱신 때 입출국을 하지 않고 한국에 머물 수 있게 되기를 바랐지만 그런 도움도 없었다고 한다. 그럼에도 코벨은 말년까지 “나는 한국의 가야사가 분명하게 확립되는 것을 볼 때까지 오래 살고 싶다”고 소망했다. 이 책의 출간은 그녀에게 빚진 마음을 다소 덜어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