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편의 탈모가 시작되었다.
아니 꼭 시작되어야 하는 것은 아니고 시작이 되었다면 끝장이 나야 할 듯한 불길한 서막 같은 느낌이 드니 최근 탈모 현상이 생겼다 정도로 정리해두자.
아침에 일어나서 베개를 보면 남편의 머리카락이 대여섯도 아니고 열댓개 정도 떨어져 있다.
머리를 감을 때 보면 마치 항암을 하고 있는 내 머리카락이 빠지는 것처럼 손가락 사이에 한움큼이 빠져 있다.
마누라가 아파서 스트레스를 받고 있기 때문인지 아니면 간이라도 나빠진건지... 남편의 빠진 머리 카락은 약물로 빠지고 있는 내 머리카락 보다 한없이 서럽다.
"대머리 되면 어쩌지?"
"그래도 귀여우니까 괜찮아. 혹시 모르니까 병원에 가보자"
"귀여우면 뭐해 대머린데!!! 당신은 바보야!"
뭐 이런 대화가 매일 이어지고 있는 가운데 날씨 추워지면서 털옷을 준비하는 고양이들과 함께 우리집은 집사 포함 대 털갈이 시대에 돌입해 있다.
청소는 (엄마가 하니까) 둘째치고 사실 심각한 문제는 집사 그루밍을 열심히 하는 우리집 냥이들이 사람 머리카락 헤어볼을 토한다는 것.
그 고통스러운 몸부림과 토해낸 머리카락을 보고 숱이 좀 많이 빠지더라도 버텨보자고 생각했던 나는 머리를 면도까지 해서 아주 짧게 밀고 보온용 수면 모자를 도입하였고 남편은 간기능 검사를 받았고 건강 문제는 아니라서 냥이 그루밍 방지용 수면 모자를 도입하였다.
이왕이면 귀 옆으로 늘어지는 고깔이 귀여우니까 억지로 고깔모자로, 시판 모자가 마땅한게 없어서 면 티를 오려서. 같은 색은 좀 그러니까 커플 모자로 색은 달리하는게 좋겠어. 하필 희생된 티는 빨간색과 녹색이어서 색은 크리스마스. 다만 바느질이 귀찮았던 나머지 잘라낸 소매를 위쪽은 묶어 방울을 만들고(방울이라고 치자) 목둘레의 시보리만 잘라내서 머리 둘레에 붙이고 그냥 머리에 뒤집어쓰는 형태라 우리 부부가 수면 모자를 쓰고 있는 장면은 덤앤더머의의 할로윈 쪽에 더 가깝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녹색 모자를 쓰고 있으니 당신은 요정 같아. 까르르"
"빨간 모자를 쓴 당신은 산타클로스야? 선물 주세요. 까르르"
"귀여운 코끼리를 가지고 왔는데 호.호.호. 한번 만져볼테야?"
와 같은 몹쓸 대화를 하고 있는 것이다. 그래. 알고 있다. 할로윈 요괴들의 크리스마스 코스프레라는 사실을 말이다.
결국 급조한 수면 모자는 연휴 내내 거실에 누워서 밍기적거리다가 청소하는 엄마의 진공청소기에 방울이 빨려서 청소기를 막는 일이 몇번 발생한 후 성질이 난 엄마가 '그런 거지 같은건 당장 갖다 버리라'고 소리지르면서 강제로 벗겨서 버려지는 운명을 맞이했다.
그리고.
아무것도 한 거 없이 기적처럼 남편의 탈모 문제가 갑자기 줄어들었다.
나는 머리 카락 길이가 밀리미터급이기 때문에 빠지는게 거의 보이지 않는다. 냥이들은 여전히 털뿜뿜을 하고 있긴 하지만 그래도 사람 머리카락 헤어볼을 토하지는 않게 되었다. 모두가 해피. 메데타시 메데타시
이것을 남편은 크리스마스의 기적이라고 부른다.
2017년 크리스마스의 기적이라고 (쓰지도 않는)일기에 써야겠다며.
어디서부터 어떻게 지적해야 할지 결정 장애가 올 정도로 지적할 곳이 산더미고 굳이 제목을 붙이자면 추석에 일어난 털 해프닝쪽이 더 맞겠지만 아직 한쪽 팔이 남아 있는.. 목시보리도 없는 빨간 티를 입고 맨살이 드러난 쪽은 이불속에, 긴팔이 남아 있는 쪽은 이불 밖에서 나를 안고 잠드는 남편이 행복해보여서 더는 지적하지 않았다.
그래.
크리스마스 기적이라고 치자.
이렇게 우리가 행복한게 그냥 기적이니까.
다만.. 아무리 치고 넘어가자고 생각해도... 크리스마스는 좀 마음에 걸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