링크글을 읽으셔야 이 이야기를 이해하시는데에 수월할 것 같네요. 물론 삼국지 읽으신 분들이라면 필요없을테고요.
위의 이야기와 관련해서 좀더 고찰해볼까 합니다.
위진남북조 시대에 유행했던 사상들 중에 가장 유행하고 번성했던 사상을 꼽자라면 바로 청담사상이라 할 수있을 겁니다.
중고등학교 도덕책에서도 한번은 언급되는 청담사상으로 말할 것 같으면 도가의 무위사상을 바탕으로 하여 염세적인 인생관을 잣대로 형이상학적인 이야기를 나누는 것을 말하는데요. 쉽게 말하자면 세상 따위엔 관심 끊고 뜬구름 잡는 얘기나 일삼고 추구하는 몽환적인 사상입니다.
청담사상으로 유명한 사람들이 바로 죽림칠현입니다.
죽림칠현(竹林七賢).
위(魏)-진(晉)시대에 활동했던 청담가 일곱명을 말합니다.
혼란했던 삼국시대와 그 혼란한 삼국시대를 통일했다지만 역시 부패와 권력다툼으로 무너진 진(晉) 왕조의
세태에 싫증을 느껴 소위 말해 속세와의 연을 끊고 산 속에서 술이나 마시고 풍악이나 즐기며 놀던 무리입니다.
여기서 죽림칠현을 얘기하자는건 아니고.. 서두에서도 밝혔듯 위나라 조상이 집권했을때의 이야기를 할까 합니다.
조상(曹爽).
조상의 측근들 출신성분을 살펴보자라면 모두가 하나같이 청담가들입니다. 하안(何晏), 환범(桓範), 이승(李勝), 정밀(丁謐) 등..
그저 우연으로 보기엔 측근들 대다수가 청담파인데 이는 조상이 의도했다고 보는게 맞는 것 같습니다.
위의 제3대 황제 명제(明帝) 조예 사후, 조상과 사마의는 각기 탁고대신으로서 후계자 조방의 보정을 도맡았음은 아실겁니다. 그리고 사마의와 조상이 정적으로서 대립한 것까지도요.
사마의(司馬懿).
그러나 조조-조비-조예 삼대를 모신 중신 중의 중신인 사마의가 가진 기반과 또 그를 지지하는 기타 중신세력들에 비해 황족이라고는 하나 가진건 쥐뿔도 없던 조상은 상대적으로 불리했습니다.
기본으로 사마의는 위진남북조 시대 지배층의 근간을 이루던 명문호족 출신인데다 명문호족 가문의 세력이 더욱 강해지게 된 계기가 되었던 문제(文帝) 조비(曺丕)의 대에 도입된 구품관인법 덕택에 사마의와 그 가문은 물론 위나라 내부에서의 권력 밸런스는 명문호족 및 사족 쪽으로 더욱 기울게 됩니다.
이러한 배경에서 조상은 사마의로 대표되는 명문호족 및 사족세력에 맞서 자신을 지지해줄 제3의 세력이 필요했던 거죠.
그리고 점찍은게 바로 청담가들입니다.
물론 이 청담가들도 소위 말하는 명문호족 집단이긴 합니다. 다만 사상적 근거를 어디에 두고 있느냐의 차이에서 부류가 나뉘는 것이지, 뭐 청담가들이라고 해서 잘나가시는 명문사족-호족 양반들과 전혀 다른 세계의 집단은 아닙니다. 기존의 명문호족 세력들을 끌어들이자니 사마의가 가진 명성과 기반에 비해 조상의 그것은 보잘것 없었던지라 호족들이 조상을 따를리 만무했고 조상역시 단념합니다. 그래서 눈 돌린게 이 청담파입니다.
출신도 동일해서 겨루는데에 그다지 꿀릴 것도 없겠다, 더구나 그들이 가진 문학, 품성, 예술적 소양은 당시 사회에서도 널리 인정받고 있어 사마의를 위시한 주를 이루는 문벌귀족 세력과는 색다른 영향력을 소유한 집단이었기에 안성맞춤이었던 거죠.
노파심에서 말씀드리는 거지만 행여나 이런 의문을 품는 분이 계실 것 같은데요, "위에서는 청담가들이 세상과는 연 끊고 노는 것처럼 말하더니 이제는 정치일선에 뛰어드는 무리로 표현하네?"
물론 모순된 말이기는 합니다. 그런데 사실이 그러한걸요. 이상하시겠지만 저 죽림칠현도 사실은 위(魏)-진(晉) 시대에 출사하여 큼지막한 벼슬도 지내고 그랬습니다.
도가의 노장사상에 기초하여 제아무리 세상과 연 끊고 사는 것을 추구하는 청담사상이라지만 기본적으로 등따시고 배불러야 사상이란게 있고 철학이란게 존재하지 않을까요. 기본적인 생활도 영유하지 못하고 보장받지 못하는 일반 백성들이 이런 형이상학적이고 뜬구름 잡는 이야기에 귀기울리가 만무하고 애초에 이런 생각 자체가 들리 없죠.
즉, 이 청담사상이란 것도 결국에는 높으신 지배층 나으리들 가운데 한가로운 양반들이나 즐기고 영유했던 사상이란 겁니다. 막말로 무위자연을 논하더라도 직장은 가져서 밥벌이는 했다라는 거죠.
얘기가 다른데로 샜네요. 다시 본론으로 돌아가자라면..
아무튼 명문호족 세력의 지지를 등에 업은 사마의에 대항하기 위해서 조상은 청담파 인사들을 대거 기용해 자신의 세력의 근간을 이룹니다.
그 덕택인지 조상 집권기인 서기 240년 ~ 서기 249년, 약 10여년의 기간동안에는 문학이 발달하게 됩니다. 왜 그런지 생각해보면 답은 저절로 나옵니다.
청담가들이 그저 하는 것이라고는 풍류를 즐기며 시 짓는 것 뿐이니까요. 허구헌 날 경치좋은 곳에서 술잔을 주고받으며 시 짓고 놀던 경력이 여기서 빛을 발했던 겁니다. 아무래도 이런쪽으로 더 깊이 파고들던 양반들이라 그런지 위에서도 언급했다시피 이들의 문학적 수준은 상당했습니다. 더불어 당시 사회에서도 그들의 학문과 예술은 널리 인정받고 있었고요.
혹자는 과거 후한(後漢) 말에 조조(曺操)-조비(曺丕)-조식(曹植) 이 삼부자에 의해 발흥했던 건안문학(建安文學)의 뒤를 이어 중국문학사에 한 획을 그었다고 평가하기까지 합니다.
조조(曺操).
워낙 유명해서 설명은 생략합니다. 다만 첨언하자면 영웅이라는 칭호답게
다분야에서 두각을 드러내던 사기캐인지라 문학적 재능도 뛰어났습니다.
조비(曺丕).
조식과 마찬가지로 조조의 아들로 위의 초대 황제 문제(文帝)입니다.
아버지 조조의 재능을 물려받아서인지 동생 조식과 더불어 예술에 어느정도 일가견이 있었습니다.
이렇듯 문화면에서는 상당한 발전을 이루어 청담사상의 황금기를 맞이했다지만 아시다시피 조상과 청담파는 결국 사마의와 명문호족 세력과의 대립에서 패하고 맙니다.
패인에는 아무래도 조상의 방심이 크게 작용했겠지만, 근본적으로 이들 청담파들이 정치에서 잔뼈가 굵은 노련한 정치인들의 상대가 되지는 못했다라는 부분도 나름 있지 않나 싶습니다. 아닌게 아니라 사마의를 필두로 한 조정의 중신들은 말그대로 중신이란 단어에 걸맞게 선대로부터 쭉 공신행세를 해왔고 그만큼 정치경력도 길었습니다. 한마디로 프로들이었다는 거죠. 반면에 비교적 그 경력도 짧은 탓에 노련하지 못했던 우리 청담파 양반들은..
계속 반복해서 말씀드리는 것이지만 이들 청담파가 애시당초 추구하는 것은 무위자연이자 정신적 자유요, 또 지양하는 것은 속세의 찌든 때라 할 수있는 정치권력입니다.
보면 볼수록 이상합니다. 이미 정치에 몸담은 양반들이 또 꺼리는건 정치권력이라니.. 정치 OUT을 모토로 풍류나 즐기며 놀던 시인들이 활동하기엔 정치판은 온갖 권모술수가 난무하는 음험한 곳으로 애초에 맞지도 않았을 뿐더러 그동안 정치란걸 등한시해 온 탓에 얼떨결에 정계에 뛰어들었다고는 하지만 쥐뿔도 모르는 판국이었으니 여러모로 불리한 형국이었을 겁니다. 아마 사마의가 조상일파를 숙청하면서 외치고 싶었던 말은 "인생은 실전이야 X만아!" 가 아니었을까요.
이것도 문제지만 또 청담파 특유의 염세적이고 유약한 태도에서도 문제를 찾을 수 있습니다.
청담파의 문학을 보노라면 이건 뭐 암울하기 짝이 없습니다. 보는 사람마저 슬퍼지니까요. 물론 주제에 따라 우울한 시가 나올 수도 있겠지요. 하지만 짓는 시들이 죄다 하나같이 속세를 바라보며 비운에 잠긴 심정과 슬픈 정서를 노래하니..
청담파의 시 주제는 다 거기서 거기입니다. 사회현실에 대한 원망과 분노. 시풍과 정서의 차이라 할 수있겠지만 이들의 시는 항상 문제에 부딪치면 이걸 어떻게 타파하고 극복하겠다라는 얘기보다는 그냥 현실의 벽을 절감하고 이를 한탄하고 슬퍼하는 식으로 귀결되고 허무주의로 빠져버립니다.
죽림칠현 중 하나인 완적(阮籍)의 <영회(詠懷)>라는 시를 봅시다.
완적(阮籍).
삼국시대 중말기에 활동했습니다.
좋은 나무들 사이에 길이 있어
동편동산에 올라보니 복숭아와 배나무
가을바람 콩잎에 날아들고
이제 콩잎이 떨어지기 시작하누나.
화려했던 곳이 폐허가 되니
마당에는 가시나무 나고
말 몰아 이곳 떠나
가서 서산 옛터에서 살아야지.
내 한몸도 보존하지 못하면서
어찌 처자를 걱정하리오.
서리 엉기어 들풀을 감싸고
한 해가 또 저물어 가는구나. - 영회2
밤은 깊은데 잠을 이룰 수 없어,
일어나 앉아 거문고를 탄다.
엷은 휘장에 밝은 달빛 비쳐들고,
맑은 바람이 옷깃을 스친다.
외로운 기러기 들에서 울고,
북쪽 숲에서는 철새들이 운다.
무엇을 보려고 배회하는가?
근심 걱정 홀로 마음 졸인다. - 영회1
단순 슬픈정서를 주제로 한다는 것 자체를 두고 뭐라하는게 아닙니다. 당연히 이 시들은 아름답고 훌륭하며 완적이란 시인 역시 아무 문제 없는 사람입니다. 다만 이러한 시들이 문학적 가치는 높을지언정 이렇듯 염세적이고 문약한 느낌의 시를 짓는 시인들은 권모술수가 판치는 정계라는 약육강식의 세계에서 좋은 먹잇감에 불과했을겁니다. 사마의와 같은 노련한 정치인들의 상대가 될 것 같지는 않아 보인다라는 거죠. 창작물을 통해 사람의 성향을 가늠하듯 말입니다. 어디까지나 제 생각입니다.
댁들은 그냥 정치판에 뛰어드는게 아니었어..
우두머리 조상은 물론 그 측근 청담파 인사들은 집권기 동안 많은 폐단을 낳습니다. 대개가 조상의 권력을 등에 업고 전횡한 경우들인데, 아이러니하게도 정치를 멀리하고자 했던 사람들이 권력의 참맛을 알기라도 했는지 빠르게 타락해버립니다.
조상도 다른 청담파 인사들과 매상 어울려 풍류나 즐기며 시간을 보냅니다. 순전히 정치적 이유로 접근한 청담파에게 마치 물들기라도 한 듯 말이죠. 우두머리고 휘하 똘마니들이고 노상 풍류객들과 놀며 시 짓고 놀던 그들에게도 최후가 닥칩니다.
머지않아 그동안 기회만 노리던 사마의가 쿠데타, 일명 고평릉 사변을 일으켜 조상과 청담파는 모조리 제거됩니다. 나름 정적 사마의에 대한 감시도 게을리 하지 않았다지만 결국은 사마의의 계략에 속아 넘어가 버렸던 것인데 방심이 불러온 참극이었습니다.
여담이지만 이 사례와 비슷하게 위에서 언급한 죽림칠현도 권력자들의 조롱거리 내지 놀림감으로 전락하여 대다수가 해를 입습니다. 권력을 비웃고 찬탈을 비판하는 그들의 목소리가 아무래도 지배층에겐 거슬렸던 겁니다.
그 가운데 거문고 타는 솜씨가 뛰어났다는 혜강이란 인물은 그 솜씨를 한번만 보여달라고 부탁한 촉(蜀) 정벌로도 유명한 종회의 요청을 거부했다가 분노를 산 탓에 여기에서 연루되어 죽임을 당하는 등, 여러모로 여기서도 청담파와 명문호족 간의 신경전이 빚어낸 사건들이 여럿 있었습니다.
오늘날에도 청담사상은 그 폐해가 주로 부각되는 사상입니다. 현학에 물든 탓에 나라의 기강이 문란해졌다느니 어쩌고 저쩌고..등 말이죠. 아닌게 아니라 훗날 삼국을 통일한 진(晉) 왕조도 이 폐해를 겪은 케이스입니다. 그렇다고 사상자체를 까는건 아니고 제가 생각하기에 다만 이 이야기와 관련해서 청담사상에 이러한 부분이 있는 것 같다.. 정도로 이해해주시고 그냥 이야기로만 즐겨주셨으면 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