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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환상괴담] 제 말 좀 들어보십시오 ... (1) (원작 : K12KB)
게시물ID : panic_95705짧은주소 복사하기
작성자 : 환상괴담
추천 : 17
조회수 : 2810회
댓글수 : 4개
등록시간 : 2017/10/06 20:08:46
구름이 바람에 실린 채 푸른 하늘 사이로 유유히 흘러가고 있다.
그 구름이 학교 운동장 벤치에 그늘을 넓게 만들었다.
그늘 속 나란히 앉은 두 남학생의 근처로 다가간다,
두 사람의 밝은 표정이 보인다, 마침내 말소리까지 들린다.


" 아, 경찰대학교는 개뿔. 경찰행정학과도 겨우 붙었네. 그나마 국립대라 다행이지,
사립이었으면 집에서 한 소리 들을 뻔 했어. "

" 너희 집 잘 살잖아. "

" 그러게 말이다. 좀 도와줘도 되는데 뭘 그리 하나 밖에 없는 아들래미 강하게
키우시겠다고, 내 힘으로 혼자 벌어서 학비 내고 밥 먹고 다 하라시잖아. "

" 평소에 효자 노릇을 했어야지. 모든 결과는 습관의 거울인거야. "

" 쩝. 너답다. 너다워. 어쨌든 기원이 너는 좋겠다? 서울대를 다 붙고? "

" 고마워. 하지만 서울대는 안 갈거야. "

" 뭐? 왜? "

" 더 중요한 업이 나에게 생겼거든. "

" 업? 업이 뭔데. 새끼, 또 철학병 걸렸네. "

" 영민아. 세상에서 제일 힘든 게 뭐라고 생각해? "

" 경찰대 붙는 거? 음, 약했나. 사법고시 합격? "

" 아니. "

" 하버드 수석졸업, 빌보드 차트 1위에 오르기, 미국 대통령 당선? "

" 전부 틀렸어. "

" 하~ 스핑크스 같은 새끼. 수능도 끝난 마당에 넌센스 퀴즈나 내고 말야.
아, 자살! 자살 맞지? 버러지 같은 놈들도 죽고 싶다, 죽고 싶다, 하면서
끝끝내 살아가잖냐. 그러니까 자살이 가장 어렵지. "

" 무서운 대답이네. 하지만 그것도 아냐. "

" 으, 속 터져. 답이 뭔데. 들어나 보자. "

" 대오각성. "

" 대, 뭐? 뭐라고 했냐? "

" 대오각성. 쉬운 말로 '득도'라고 하지. "

기원의 쌩뚱맞은 답에 영민의 얼굴이 기묘하게 일그러졌다.

" 넌 어떻게 갈수록 애가 사이비 같냐. 내가 말한 건 다 평범한 수준이네. "

" 득도가 뭔지 알거야. 이른바 '깨달음'이지. 어제 난 완전히 결정했어. "

" 뭘? "

" 난 불교를 학문으로써 전공할거고, 내 인생의 가장 큰 '업'으로 여길거야. "

" 서울대도 갈 만한 네 성적이 아깝다! 등신아, 신앙도 적당히 가져야지! "

" 그렇게 말할 줄 알았어. 하지만 내 관심은 오로지 거기에만 집중되어 있어. "

" 하나님 아버지! 이 새끼를 구원해주소서, 아~멘. "

" 이미 내 인생의 진로는 결정된거야. "

" 와, 이 새끼 눈깔 보소. 대박 진심이네. "

" ... "

흘러가는 구름을 향해 시선을 멀리 둔 기원의 눈동자 너머로,
한없이 넓은 그의 포부를 읽어낼 수 있었다.

" 땡중 되는거야 네 맘인데. 하나만 묻자. 대리운전인지 대오각성인지,
그걸 이루면 뭐가 되는데? 신이라도 되게 해준대? "

" 진리. 이 세상을 관통하는 진정한 깨달음을 얻게 되겠지. "

" ... 참, 별난 놈이다. 너는. "






" 너희 아버지 알면 어쩌려구 그래, 서울대 가라니까, 서울대가 아니면
아무데나, 너 좋으면 괜찮으니까 제발 사람 구실 할 수 있는 곳으로 가야지! "

" 어머니. 들어가세요. 날씨 추워요. 감기 드니까 나오지 마세요. "

" 네가 우리를 내팽개치고 간다는데 어떻게 내가 안 나와! "

" 따라오실거면 거기 가방이나 좀 들어주시구요. "

" 땡중 동영상 몇 개 보더니만 미쳐버렸구나! 너 어쩌려고, 돈은 있어?
밥은 어떻게 먹고! 아아아, 어흐흑ㅡ. "

'불효막심'.
네 글자가 머릿속에 떠오르자 기원은 씁쓸히 웃었다.
인생에는 많고 많은 인간관계에서 비롯된 번뇌가 따라붙는 법.
상처주고 상처받고, 혈관처럼 서로 이어진 인연의 고리가 따뜻하고도 따가운 것.

' 죄송해요. 하지만 저에겐 이 길 밖에 없어요. 이해 받으려는 게 욕심인거죠. '

바닥에 앉아 통곡하는 어머니를 애써 외면한 채 집을 나서는 기원의
주머니에서 금방이라도 떨어질 듯 부산행 기차표가 달랑거렸다.
매서운 추위가 불어닥치는 2월 어느 날이었다.


" ... "

불교에 귀의할 뜻 없이 평범한 학생으로 살아온 지난 날들,
마치 헤어진 연인의 사진을 한 장 한 장 불태우듯 하루하루의 기억을
기원은 버리고 또 버렸다.

마음아, 가벼워져라.

몸아, 홀가분해져라.

비워라, 비워라.

공허(空虛)로 가득 채워라.

ㅡ 편안한 여행 되시기 바랍니다, 감사합니다.

어느새 기차는 선로 위를 달리고 있었고,
기원의 눈은 자신도 모르는 새 꼭 감겨 있었다.
그는 꿈 속에서 몇 해 전 혼자 찾아갔던 고성 폭포암에서의 기억을 만나고 있었다.

많은 사람들이 모여 그야말로 '야단법석'을 떨었다,
장군 같은 기세의 주지 스님은 군중에 굴하지 않고 한 명 한 명 모두에게
똑똑히 각인되는 큰 목소리로 가르침을 이어갔는데,

수십가지의 이야기 중에서 특히 기억에 남은 말이 기원의 등골을 타고 흘러
다시금 그를 찌릿찌릿하게 만들었다.

" 사람 몸 나기 힘들고, 불법 만나기란 더욱 어렵도다. "

그렇다.
사람이 태어나는 건 기적과도 같은 확률을 넘어 그리 된 것이다.
그런 기적 속에서 불법을 만나기란 얼마나 더 어려운가?

그 깨달음 이후 기원은 불교 서적을 읽어나가기 시작했고,
마침내 '상식'의 수준을 넘어 '진리'에 이르고자 하는 경지까지 오르게 된 것이다.

기차는 여전히 달리고 있었다.
기원의 마음은 공허로 메워지고 있었다,
허무로 채워지고 있었다.

하루를 일이라 하여,
칠 일이 주,
주가 모여 월,
달이 빙긋 눈웃음을 몇 번 치더니,
지구가 몇 번이고 스스로 돌고 태양과 춤을 추면 비로소 한 해.
한 해, 두 해,
해가 열 번을 지나 그간 얼고 녹던 땅이 다시 얼고 또 녹았을 때.

바스락,

겨울잠에서 깨어난 개구리가 방금 밟고 지나간 자리 위로 검은 구두 하나가 올라섰다.

" 여긴가. "

제대로 찾은 모양이다.
고등학교 동창회 현수막이 걸려있는 한우 전문식당 앞.

' 많이 변했을까, 다들. '

영민은 신발을 벗어 정리해둔 채 직원의 안내에 따라 안쪽에 있는 방으로 들어섰다.

" 와~ 영민아! 진짜 오랜만이다! "

살짝 어색할 것 같던 마음은 변하지 않은 얼굴, 변하지 않은 목소리에 곧장 녹아버렸다.
봄이 올까 싶은 겨울이 그렇게 물러나듯, 순식간이었다.

" 야, 너 하나도 안 변했냐? 페이스북이랑은 또 다르네. "

" 그래, 몇 년 만이냐. 대학 다닐 때 한 번 보고. "

" 와, 애들 다 온거야? "

" 몇 명 더 올건데 우선 앉아. 한 잔 받아. "

" 그래. 좋지. 오늘 아주 죽어보자. "

짠,
몇 번을 부딪친 잔이 다시 깨지기라도 할 듯 강하게 맞닿았다.
그 안에 담긴 소주가 찰랑거렸다.

" 크으으. 너 만나고 싶었는데, 서로 바빠서 연락하기 좀 그렇더라. "

" 그래, 알다시피 나 경찰 아니냐. 요새 정말 바빠. 인력을 늘려도 일이 안 줄어. "

" 그래 그래.. 너 경찰이지. 고생 많다. 짭새 새끼. "

" 까불기는. 확, 체포해버릴라. "

" 잡아가라, 얼마나 좋냐. 헬조선에서 유일하게 공짜로 밥 주고 운동 시켜주고,
나름대로 그 정도면 헤븐조선이지. "

" 헛소리는~... 잔 비었어. 잔이나 채워줘. "

" 어어어, 누가 한 명 온 거 같은데. "

" 다 지금 술 취해서 헤롱거리는데 오긴 누가 와. "

" 왔잖아아. "

" 으엑, 진짜네. 우리 동창 맞아? 무슨 도사가 왔어... "

" 영민아, 쟤 기원이 같은데. "

" 그 도사 이름 좋네에. 기원... 기원? 기원?! "

방에 들어와 호쾌한 웃음을 지으며 동창들을 바라보는 남자.
수염이 덥수룩하게 자라 산에서 호랑이라도 잡다가 나온 듯한 풍모의 남자.

" 다들 오랜만이다! "

알아보는 사람은 알아보고, 가물가물한 사람은 고개를 갸웃거릴 때,

" 야, 구기원! 새끼야! 너 살아있었구나! "

별안간 벌떡 일어난 영민이 비틀비틀 다가가 기원을 꽉 안았다.

" 너 불교 배운다더니 심마니가 된거야 뭐야? 꼴이 왜 이래? "

" 그렇게 됐다. 하하. "

" 완전- 도사가 되가지고. 뱀 몇 마리 잡아왔냐? 앉아.
다들 기억 안 나? 서울대 갈 줄 알았더니 스님 되러 간 기원이!
우리 학교 전교 1등! "

" 아ㅡ! 구기원! 진짜? 야, 너 어떻게 된 거야, 진짜 궁금했었는데! "

생각도 못 한 인물의 등장에 모두들 술기운도 잊은 채
다시 이야기보따리를 풀었다.

육회 몇 접시와 소주 열댓병이 다시 들락날락거렸다.

" 안주도 못 먹고, 술도 못 먹고, 대체 왜 왔냐? "

" 너희 보러 왔지. 잘들 지내는구나 싶어서 기분 좋네. "

" 만족은 하는거야? "

" 살아있는 거 보면 가끔 웃고 지낸다는 말 아니겠어? "

" 야, 여전히 철학자네. 대단하네. 대국적으로 한 잔 하자! "

" 전부 잔 들어봐~ 기원스님께 한 말씀 들어보게. "

다들 잔을 들고 기원의 말을 기다릴 때 영민이 기원의 귓가에 속삭였다.

' 기원아, 나중에 따로 얘기 좀 하자. '

' 그래. '

덕담 한 마디 이후 잔이 오가고, 그 자리가 한 시간을 더 가서야 끝났다.
이미 고주망태가 되어버린 몇 몇은 대리운전을 불러다가 짐짝처럼 실려가고,
할 얘기가 남은 몇몇은 짝을 지어 저마다의 방향으로 흩어졌다.

깊은 새벽, 그때는 해가 떴었지만 지금은 달이 높이 떠있었다.

" 너, 앞으로는 어떻게 지낼거야? 스님이 되긴 된거야? 머리는 왜 산발이야.
난 처음에 무슨 거지가 들어온 줄 알았어. 아. 기분 나쁘게 들리겠구나. 미안. "

" 하하하. 전혀 안 나빠. 난 내일 다시 산으로 들어갈거야. 산에서 또 들어가야
갈 수 있는 동굴로 들어가서 마음을 다시 닦아야지. "

" 좋겠다. 아니, 외롭고 힘들겠지만... 뭔가 홀가분할 것 같네.
난 경찰이라 그런가, 요즘 좀 그렇다. "

흐려지는 말꼬리에 기원의 눈썹이 갸웃거렸다.

" 고민 있구나. 말해봐. "

" 아냐, 아냐. 경찰 일이란 게 다 그런거지. 신경 쓰지 마. "

" 괜찮아. 말해봐. 내가 어디 가서 그런 걸로 소문낼 것도 아니고. "

" ... 그래, 너는 말해도 될 놈이지. 너한테는 털어놓을 수 있겠어. "

기원의 따뜻한 말씨에 영민은 속내를 털어놓기 시작했다.






소매치기, 도둑놈, 길거리 양아치, 온갖 사회의 시정잡배들과 조우하면서
단 한 번도 쫄아본 적 없는 영민은 그야말로 경찰이 천직인 사내였다.

발에 땀나도록 뛰어 사건을 해결하고, 파출소로 돌아와선 다시 막내직원으로서
온갖 잡무를 도맡아하며 얻은 신뢰는 그에 대한 소문을 만들었고,

소문은 마침내 경찰서 내를 돌고 돌아 그를 본청 수사과로 발령나게 했다.

순경 임용 후 심사로 한 번, 특진으로 또 한 번, 5년만에 경사로 진급한 뒤
경위 승진 후보자 목록에 당당히 이름을 올린 그였다.

장래가 촉망받는 수사과의 젊은 피.
그런 그에게 주어진 새 사건은 의문투성이의 '연쇄자살' 사건이었다.

언제부터인가, 관할 구역 내에 자살사건이 빈번해지기 시작했다.
그저 불황 탓, 사회 분위기 탓으로 돌렸으나 전년 대비 자살자 수가 2배 이상을
넘어가자 사태는 심각해졌다.

막노동꾼부터 대학교수까지, 남녀와 노소, 능력의 높고 낮음을 가림없이
자살자는 다양했고, 한 가지의 공통점을 지니고 있었다.

'웃는 시체'.
연쇄 자살로 희생된 자들의 시체는 모두 기쁘게 웃고 있었다.
분명히 스스로 목숨을 끊었건만 헤벌쭉 웃고 있었다.

그러던 어느 날, 단서 하나가 포착된다.
증인 A, 증인 B, CCTV 1, CCTV 2,
짧은 목격담과 짧은 영상기록이 모자이크처럼 모이고 모여 하나의 사실이 되었다.

자살자들의 두번째 공통점.
그들은 죽기 전 '한 여자'를 만났다.
그리고, 꽤 오랜 시간 대화를 나누었다.
대화를 나눈 사람은 스스로 자살하거나, 사라졌다.

CCTV에 포착된 인상착의와 얼굴을 바탕으로 본격적인 수배 절차에 돌입하려던
어느 날, 상부의 지시가 내려졌다.

" 과장님, 무슨 말씀입니까? 수사를 끝내자니요. 이제 증거가 나오고 있는데요. "

" 영민아. 이건 좀도둑 잡아서 건수 하나 올리는 수준의 일이 아니야.
내 말 들어라. 참고로 더 윗선에서 압력 넣은거야. 우리 생각보다 더 큰 사건이야. "

" 우리 관할에서 벌어지고 있으니 이때 우리가 먼저 검거해야 하는 거 아닙니까? "

" 이 자식이, 과장한테 바락바락 소리 지르고. 짜식아, 나도 너 용감한 줄 알아!
나도 너 좋아해, 근데 임마, 이건 그냥 용의자 A만 잡으면 끝나는 그런 일이
아니더라니까? 이럴 줄 알았지, 자, 명함. 본청 국장이 직접 서명해놓은 명함이다.
만나볼 수 있을거야. 관외출장신청서 올리고 바로 다녀와. "

" 국장님만 설득하면 제가 그 여자 잡아서 감방 쳐넣어도 됩니까? "

" 그래. 사실 국장은 네가 올 줄 알고 있는 눈치야. 만약 이 사건 맡게 된다면
하나 충고, 충고라기보다는 부탁이지. 부탁하건데, 목숨 조심해. 잡범이 아냐. "

" 다녀오겠습니다! "

" 내 말을 듣기는 들은거냐, 저 자식... "


평소 올 일 드문 본청에 들어서자마자 경비원들이 영민에게 신분증과 방문 목적을
요구했다. 영민은 대답 대신 국장의 명함을 내밀었고, 경비원들은 미리 언질이
있었는지 고개를 끄덕이며 엘리베이터까지 그를 안내했다.

국장실에 들어서자 국장은 영민의 공무원증에 적힌 이름 석 자를 보더니,
비서 직원에게 자리를 비워달라고 요청한 뒤 방의 불을 끄고 모니터를 주시하게 했다.

" 자네가 용의자로 지목한 여자를 우리는 이미 50년 전부터 추적하고 있었어. "

" 50년이라구요? 국장님, 죄송하지만 그 여자는 많이 쳐줘야 삼십대 초반입니다. "

" 외양은 그렇지. 기막힌 건 일본은 200년 전부터 추적하고 있다네. "

" 예? "

" 그녀의 본명을 아는 사람은 아무도 없어, 행정상 몇 번이나 기록이 바뀌었고
지금도 다른 이름을 쓰고 있겠지만 일본에서 부르기를 '아카이 사쿠라',
우리는 그녀를 '홍벚꽃'이라 부르고 있지. "

" 홍벚꽃...? "

" 그래. 모든 게 의문투성이인 여자. "

" 우리 수사력에 포착되었으면 지금 감방에 있어야 하는 거 아닙니까? "

" 죄목이 뭐지? "

" ... "

" 그녀가 사람을 직접 죽이기라도 했나? "

" 겉으로 보기에는 전원 자살이죠. "

" 그래. 그녀는 사람을 자살에 이르게 하는 화술을 지녔네. "

" 화술이라구요? "

" 믿기 힘들겠지만 사실이야. 최면도 아니고 환각도 아냐. '자살 당한' 사람들은
모두 제정신이자 스스로의 의지로 자살한걸세. 그녀의 설득에 의해서. "

" 설득이라고 하셨지만, 거기까지 파악되었으면 굳이 살인죄가 아니더라도
그녀의 범죄를 입증할 수 있었을텐데요. "

잠시 정적이 돌더니, 국장의 입이 천천히 열렸다.

" 그녀를 취조한 건 한 두 번이 아냐, 물리적으로나 정신적으로나 평범한 인간은
버티지 못 할 수준의 강력수사를 감행했으니까. 결과? 전부 자살했어. "

" 경찰들도 당했단 말입니까? "

" 그녀를 담당하던 나의 선배, 그 선배의 동료, 그 선배의 선배,
그들보다 앞서 그녀를 담당하던 자와 팀원들, 그보다 더 앞선 자들,
무수히 많은 우리의 선배 동료들이... 자살 당했지. "

" ... "

" 행복에 겨운 새신랑, 쌍둥이 애 아빠, 냉철한 엘리트 수사관,
어떤 조건, 어떤 능력을 가진 그 누구라도 그녀의 설득 앞에선 무너지고 마는걸세. "

" 대체 무슨 설득을 하길래 자살한단 말입니까. "

" 녹음해본 적이 있었어. "

" ... "

" 그 설득, 녹음한 적이 있었어. 하지만, 녹음을 하기 위해 들었던 담당자가 죽었고,
그 녹음을 복구한 후 듣던 기술자와 동료 세 명이 각각 한 두시간을 전후로 자살했네.
우리는 그 테이프를 증거나 자료로 채택할 수 없었어. 결국 그 계획과 관련된 모든
기록은 폐기되었네. "

" ... "

" 말을 잊은 모양이군. 그러니 누가 이 사건을 맡으려 하겠나? 혹시 자네가? "

" ... "

" 자네, 인사기록카드를 보니 지방에서 상당히 장래가 유망한 경찰관이던데.
적당히 경제사범이나 잡다가 간부로 승진해서 결혼도 하고, 후배들도 길러야지.
잘 생각해. 아무리 유능한 경찰관이더라도 목숨은 오직 하나뿐이야. "

" ... "

" 자네 관할에서 벌어지는 연쇄 자살 사건의 진범은 이 수사국장이 즉보해주겠네.
홍벚꽃. 그 여자가 범인이다. "

" ...홍, 벚꽃. "

" 그녀를 잡을 수 있다면 잡아봐. 하지만 잡지 않는다고 해서 내가 자네
관할 경찰들에게 불이익을 주는 일은 절대 없을거야. 그녀는 애초에 인간이 아니니까. "

" 국장님. 감사했습니다. "

" 택시 불러놨으니 타고 내려가게. 자네 정도 열정을 가진 경찰관이라면 이런 사실을
듣고선 다리가 풀려서 제대로 걷지도 못 할거야. 삼일 밤낮 잠 설치겠군. 잘 가게. "

" ... "

벙어리가 된 듯 아무 대꾸도 하지 못한 채 영민은 본부를 나와,
국장이 불러놓은 택시에 올라타야만 했다.






" 어떨 것 같아, 너라면 어떻게 할 것 같아? "

" ... 우선, 굉장히, 신기하네. "

영민의 물음에 기원이 조심스레 대답했다.
그러나 기원의 눈에는 오래 전 그의 눈에서 볼 수 있었던 총기가 빛나고 있었다.

" 오직 말로 사람을 자살에 이르게한다. 그 말이지... "

흠~, 으흠~ 거리는 추임새와 함께 생각에 깊이 잠겨버린 기원을 보며
영민은 입을 쩝쩝 다셨다.

" 미안하다. 내일 산에 들어가는 스님한테. 신경쓰지마. "

순간 기원은 별안간 박수를 크게 쳤다.

" 결정했어! "

" 뭘? "

" 산으로 가는 건 미뤄도 괜찮으니까 그 여자를 만나보고 싶어졌어. "

" 새끼야, 너 그러다 죽어. "

" 내가 깨우친 쪽이 진리에 가는 길이 맞다면, 홍벚꽃을 깨우치게 하지 못 할
이유도 없지 않겠어? 너 출근 시간 언제야? 가서 수사기록 좀 보자! "

" 완전 막무가내 아냐, 저 자식. "

자신의 만류에 답도 없이 성큼성큼 앞으로 걸어가는 기원을 쫓아가며,
영민은 십 년만의 동창 상봉이 뜻밖의 방향으로 나아가고 있음을 직감했다.




- 2화에서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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