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명(明) 왕조 멸망사 : 명을 죽입시다 명나라는 나의 원수 - (10)
게시물ID : history_13833짧은주소 복사하기
작성자 : 별짓을다하네
추천 : 25
조회수 : 4037회
댓글수 : 13개
등록시간 : 2014/01/29 12:31:35
 
 
 
- 명나라를 죽입시다. 명나라는 나의 원수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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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淸) 팔기군.
 
 
 
누르하치에 대한 명(明)의 불안과 의혹은 서기 1616년, 후금(後金)의 건국으로 가시화되었다. 설마하던 일은 기어코 벌어지고야 말았다. 이전부터 일탈을 예고하는 듯한 움직임은 종종 있었으나 애써 달래고 윽박지르면서 어떻게든 잡아두려했던 그동안의 일련의 노력들은 모두 물거품이 되어 버렸고 명은 누르하치라는 야생마를 길들이는데에 완전히 실패했다.
 
 
그리고 머지않아 이 실패에 대한 값을 톡톡히 치르게 된다.
 
 
 서기 1618년, 대소신료들과 하늘에 제사를 지내는 자리에서 누르하치는 칠대한(七大恨)이라 하는 조칙을 반포한다. 칠대한이란 일곱가지 원한으로, 누르하치를 비롯한 여진족이 명에게 품은 원한들을 말한다. 그 내용은 이렇다.
 
 
1. 명나라가 누르하치의 조부 교창가와 부친 탑극세를 이유없이 죽인 것.
2. 명나라가 합달부(哈達部)와 엽혁부(葉赫部)만 편애하고 그에 비해 건주여진은 차별한 것.
3. 명나라가 누르하치와 맺은 영토협상을 파기하고 되려 침공한 것.
4. 명나라가 엽혁부를 도와 건주여진을 공격한 것.
5. 엽혁부가 같은 여진인임에도 불구하고 명나라와 손을 잡고 앞잡이 노릇을 한 것과 누르하치의 약혼녀를 몽골인과 혼인시킨 것.
6. 명나라가 건주여진의 영토를 시하, 무안, 삼차 땅을 내놓으라고 협박한 것.
7. 명나라의 요동총독 소백지(蕭伯芝)가 권한을 남용하여 건주여진을 비롯한 여진인들을 괴롭힌 것.
 
 
누르하치 개인의 원한과 관련된 항목도 보이는데, 무엇보다 당시 명의 학정에 대한 여진족의 불만과 분노를 짐작할 수 있는 항목들이 다수 보인다. 누르하치가 개인의 원수도 갚으려 했지만 여진족의 민심도 나름 이용했다는 것을 알수있다. 명에 대한 반란이 비단 누르하치 개인의 일에서만 비롯된게 아니라는 것이다. 개인의 원한에다 여진족의 적개심까지 겹쳐 상당히 시기가 좋은 때였다고 할 수있겠다.
 
 
칠대한의 선포는 사실상 명나라에 대한 선전포고였다. 노골적으로 명에 대한 적개심을 드러내는 반포내용 뿐만 아니라 이전의 관계로 따져보았을 때 한낱 속국이 감히 상국이자 종주국에게 어쩌고 저쩌고 따지며 대든다는 모양새부터가 이미 작정하였음을 의미했다. 긴 세월간 속내를 숨기고 칼을 갈아오던 누르하치가 드디어 명에게 칼을 겨눈 것이다.
 
 
누르하치는 신속했다. 말에서 그치지 않고 즉시 행동으로 옮겨 칠대한을 반포한지 불과 몇달 후인 서기 1618년 7월, 동북방의 변경도시 중 하나인 무순(撫順)을 급습하여 점령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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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순(撫順)의 위치. 오늘날 요녕성(遼寧省)에 해당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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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순(撫順)에 입성하는 누르하치.
 
 
 
무순은 전략적 요충지도 아니고 별특별할 것 없이 말그대로 일개 변방도시에 불과했으나 누르하치가 처음으로 명에게 공격을 가했다는 점에서 그 의의를 찾을 수있다. 무순점령은 명청전쟁의 서막을 여는 신호탄이었다. 대륙의 주인이 교체되는 약 30여년에 걸친 명청전쟁은 이렇게 시작되었다.
 
 
여기서 이런 의문이 들 법하다. 누르하치가 공식적으로 명에게 도전하는 때인 서기 1616년, 후금건국 시점부터 서기 1618년, 무순점령 때까지 길다면 길다고 짧으면 짧다고 할 수있는 대략 2년의 기간동안 명에서는 뭐하고 있었는가?  
 
 
사실 이 부분에 대해서는 나도 달리 말할게 없다. 개인적으로도 의문인지라.
 
 
2년전에 누르하치가 후금을 건국하는 사상 초유의 사태에도 별다른 반응을 보이지 않던 명은 무순점령 이후에야 비로소 대응에 나선다. 그나마 이전까지는 누르하치의 성장에 반응하여 엽혁(葉赫) 여진을 지원함으로서 견제라도 했다고 하지만 누르하치가 여진족을 통일하고 나서는 견제가 뚝 끊기는 느낌이다.
 
그렇다고 이 2년의 기간 동안에 무슨 일이 있었던 것도 아니다. 여전히 만력제(萬曆帝) 치세로 그 무렵에는 중앙에서의 환관세력과 동림당의 당쟁이 격화되는 시기였다는 점을 제외하고는 동북방에서의 누르하치 발흥 외 각지에서는 누르하치의 경우처럼 반란과 같은 별다른 움직임은 없었다. 차라리 누르하치의 반란에 필적하는 규모의 반란사건이 있었더라면야 그곳에 신경쓰느라 누르하치의 폭주를 허용했다는 이야기가 성립하여 그나마 설명이라도 가능해지지만 이건 뭐... 달리 설명할 방도가 없는 마당에서 말그대로 '방심' 이것이 답이 되지 않나 싶다.
 
 
이전의 몽골족 보배의 난이나 묘족 양응룡의 반란처럼 변방에서의 일개 오랑캐의 소란정도로 간주했을 수도 있다는 얘기가 있는데, 하지만 앞서 보았겠지만 이 두 사례에서도 명나라가 늦장대응하는 모습은 보이지 않았다. 오히려 난을 진압하려 다른 곳에서 병력을 빼오는 노력을 보였지 설령 일개 오랑캐의 난이라도 즉시 진압에 나섰다는 얘기다. 더구나 누르하치의 발흥을 오랑캐의 소란으로 간주했다면 그동안 명나라가 누르하치에게 보여온 의혹을 설명할 길이 없다.
 
 
결론은 명나라는 이때도 병크를 저질렀다는 얘기다. 어디까지나 내 생각이다.
 
 
 
아무튼, 순전히 '방심' 으로 누르하치의 폭주를 허용해버린 명에서는 놀라다 못해 경악했다. 오랜세월 간의 불안은 곧 현실이 되어 닥쳐왔다. 울타리를 벗어나 제멋대로 날뛰며 이제는 정식으로 맞짱을 신청해온 누르하치는 말그대로 아웃 오브 컨트롤이었다. 예전처럼 말로 달래고 윽박질러 해결될 수준의 일이 아니라는 것을 직감한 명 조정에서는 즉시 토벌군을 편성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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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누르하치 이 새끼가 기어이 일을 벌였구만. 후딱 처리해야 하지 않겠음?"
 
"양호(楊鎬)더러 족치라 하지 뭐."
 
 
 
괘씸한 반란괴수 누르하치를 진압하러 갈 토벌군의 사령관은 과거 임진왜란에도 참전하여 이순신의 공을 추켜세워 줬다는 요동경략(遼東遼東) 양호(楊鎬)였다.
 
 
양호는 만력제로부터 사령관으로서의 권위를 인정받는 보검을 하사받고 출정진을 꾸렸는데, 그 엔트리는 다음과 같다.
 
 
요동경략(遼東遼東) 양호(楊鎬).
 
산해관총병관(山海關總兵官) 두송(杜松).
개원총병관(開原總兵官) 마림(馬林).
요동총병관(遼東總兵官) 이여백(李如柏).
관전총병관(寬甸總兵官) 유정(劉挺).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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두송(杜松).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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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정(劉挺).
 
양호와 마찬가지로 유정 역시 임진왜란에 참전한 경력이 있었다.
 
 
 
이여백은 이성량의 아들이자 역시 임진난의 참전장수 이여송(李如松)의 동생이다. 각각 여진족과 몽골족 때려잡는 아버지와 형을 둬서인지 이여백도 이 토벌군의 장수로 참전하게 된다.
 
 
 
초장에 누르하치에게 기선제압 당하여 무순을 넘겨준 실책을 만회하려는 듯 명나라는 대군을 동원하여 누르하치를 짓밟아 버리고자 했다. 규모는 대략 8만여명. 수십만은 거뜬히 동원하는 삼국지를 봐서 그런지 8만의 숫자는 적어보일 수 있으나 따지고 보면 결코 적은 숫자는 아니다. 특히 누르하치의 병력에 비하면. 게다가 여기서 그치지 않고 제후국 조선과 누르하치의 건주여진의 라이벌, 엽혁여진에게도 손을 벌려 원병을 뜯어낸다.
 
 
이때 조선에서 강홍립의 조선군이 원병으로 갔음은 국사를 배웠으면 누구나 아는 사실일터. 징발한 조선군의 규모는 대략 1만 3천. 엽혁여진도 요청에 응하여 2천의 병력을 내어준다.
 
 
이렇게 마련된 명군의 숫자는 도합 10만을 웃도는 규모의 대군이었고 이에 맞서는 누르하치의 후금군은 고작 2만이었다.
 
 
병력수의 우세에서 비롯된 자신감에서인지 유정은 정식으로 출정하기 전에 서신을 보내 누르하치에게 항복할 것을 권한다. 그러나 병력숫자를 보고 쫄아 항복할 것 같았으면 애초에 대국 명나라에 대항하여 반란도 일으키지 않았을 누르하치였다. 유정의 항복권유에 오직 명을 멸하고 원수를 갚는 일만이 있을 뿐이라며 코웃음으로 대꾸한 누르하치는 머지않아 진격해올 명군에 맞설 준비에 박차를 가한다.
 
 
누르하치가 최후통첩에도 불구하고 전쟁도 불사할 것을 표명하자 유정 역시 이듬해인 서기 1619년, 토벌군을 휘몰아 후금의 수도, 혁도아랍(赫圖阿拉)을 목표로 하고 진공한다.
 
 
오늘날 요녕성에 위치한 혁도아랍으로 가기 위해서는 필히 살이호(薩爾滸)란 곳을 거쳐가야 했는데, 누르하치는 이 살이호를 전장으로 정하여 일생일대의 승부를 보기로 결정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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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녕성(遼寧省) 무순(撫順)시의 동쪽에 위치한 살이호(薩爾滸).
 
이곳에서 그 유명한 살이호 전투, 흔히 부르는 사르후 전투가 벌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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