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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는 서애 류성룡 선생의 14대손입니다.
개인적으로는 제 조상이지만 참담하고 비극적인 상황에서도 전란조정을 이끌며
전무후무한 임진왜란을 극복하는데 힘쓴 서애 할배를 생각하면 가슴이 아픕니다.
징비록의 징비란 제목은 시경 소비편에서 여기징 이비후환予其懲 而毖後患에서 징과 비를 따온 것으로서
지난 일을 징계하여 앞일을 대비한다라는 뜻입니다.
서애선생이 징비록을 쓴 이유가 당시 서인측 인사들로부터는 자기변명에 지나지 않는다는 비난도 있었습니다만
1598년 전쟁끝무렵, 선조임금에게서 버림받아 북인들에게 탄핵받아 삭탈관직당하고 충무공 이순신이 노량해전에서 전사합니다.
또 고향으로 돌아온 후 줄줄이 이어지는 가족들의 죽음은
지금 보아도 너무나 가혹한 비극이었습니다.
재산도 축적하지 않아 청렴하기 그지 없었던 한 재상에게 모함이란 치욕은 더욱 견딜수 없었을 것입니다.
류성룡 자신이 행하고 이루었던 이순신, 권율 등의 명장 천거, 훈련도감 창설, 여러 사회개혁정책들..
그것들이 한순간에 물거품처럼 사라지고 오히려 동탁보다 더 탐학하다는 가짜뉴스에 비난여론들이 촘촘히 조직적으로
형성된 당시의 상황이 전혀 정상적인것은 아니었습니다.
가까운 예를 들자면 노무현 대통령이 퇴임한 후 당했던 것과 비슷한 상황이었다고 볼수 있겠지요..
오죽하면 서애선생과 당색이 다른 오성부원군 백사 이항복 상공이 서애를 청백리로 추천했겠습니까?
서애 류성룡의 말년은 매우 쓸쓸하고도 우울했습니다.
실제로 우울증이 겹쳐 고향으로 낙향 후 만남을 요청해 와도 응하지 않았었지요..
심지어 선조임금이 호성공신 2등에 책록하고 다시 조정에 복귀하라며 명예회복의 기회를 주지만
그것 역시 응하지 않았습니다.
고향 안동으로 낙향 한 후 자식들과 조카들이 어리고 젊은 나이에 요절하는 것도 보고 잇따라 어머니와 친형님이
돌아가시는 것도 보면서 그렇게 66세의 나이로 세상을 떠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