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결혼하기 전 남편은 인터넷상에서
"와이프 몰래 남자의 취미 (게임기/카메라/프라모델 등등) 삽니다" 류의 글을 볼때마다 이해가지 않는다는 듯 말했다.
" 왜 와이프 몰래 하는지 몰라. 와이프에게 당당하게 말하고 하면 되지. 그걸 못하나?"
나는 대충 어떠한 심리로 그 글상의 남편들이 와이프 몰래 하고 싶어하는 지는 알것 같았지만 굳이 내색하지 않고 방긋 웃으면서 남편에게 말했다.
" 그러네. 오빠는 당당하게 말하고 살텐데. 그치?"
내말에 남편은 어깨를 쫙 펴고 의기양양하게 말했다.
" 그래, 당연하지."
그런 당당한 모습에 " 우와, 우리 오빠 멋지다~" 라고 대답을 해주었다.
내 반응에 으쓱으쓱하는 남편을 바라보며 나는 속으로는 '한번 두고보자고...'라고 중얼거렸던 것 같기도 하다.
2.
예상외로 남편은 결혼 후에도 모든 것을 당당히 오픈했다.
돈관리따위는 귀찮다며 나에게 다 일임하고는 본인은 용돈 안에서 자유롭게 사용한다.
하지만 용돈액수를 정할때 만큼은 수술을 집도하는 외과의사마냥 날카롭고 빈틈없다.
혹여 그 달에 결혼식이 많아 경조사비가 들거나, 갑자기 사정이 생겨 남편에게 생활비를 대신 결제해달라고 할때가
있으면 쓴 돈보다 더 메꿔줬으면 메꿔줬지, 돈을 안주는 것도 아닌데 언제 메꿔주려나 노심초사한다.
계좌이체가 아닌 현금으로 주는 경우에는 몇주 있다 혹시나 자신이 안받았나하고 다시 물어보기도 한다.
이미 현금으로 주었다고 하면 마치 도토리 잃은 다람쥐마냥 시무룩해서 지갑을 살펴보기도 한다.
남편의 지갑은 저주라도 걸렸나, 왜 돈을 넣어도 넣어도 항상 비는 걸까.
지갑을 바꿔줘도 해결되지 않는 그 저주. 언제 풀릴수는 있을까.
3.
남편은 단순히 돈만 오픈한것은 아니다.
매일 한시간정도,
저녁에 따뜻한 차를 마시며, 혹은 저녁 공원을 산책하며 도란도란 그날 하루에 있던 일에 대해 이야기하기도 하고
둘중의 하나라도 시무룩하거나 화가 나있다면
에라, 술파티다 하고
해물파전에 막걸리나, 닭똥집볶음에 소주 혹은 치킨에 맥주 등 술과 함께 그날 하루 속상한 일을 모두 쏟아내기도 한다.
하지만 그런 남편에게 내가 정말 공개좀 안했으면 하는 것이 있다면
바로 남편의 신기기에 대한 관심도 (이하 남편의 희망 지름 위시리스트) 다.
나는 관심도 없는데
최신 타블렛이 뭐가 나왔는데- 기능이- 가성비가- 포지션이-
이번에 나온 메인보드가- 기능이- 가성비가- 포지션이-
요즘 나오는 핸드폰이- 기능이- 가성비가- 포지션이-
이런식이다.
듣고 있다보면 알아둬도 쓸데없는 신기기에 대한 잡지식만 자꾸 축적되고 있는 기분이고
한시간을 듣던, 삼일을 듣던, 한달을 듣던 결론은 [사고싶다]다.
그렇게 듣고 듣고 또 듣다보면 차라리 남편이 그걸 제발 사버렸으면 좋겠다라는 착각도 들고
어느날 남편이 데려온 새 타블렛이 한달째 듣고있던 그 아이템이라는 것을 알면
이제 끝이났다, 라는 일말의 안도감까지 드는 것이다.
4.
여태까진 남편이 자신의 용돈으로 뭘 사던 한번도 크게 게의치 않았는데
이번에 한번 남편이 사고싶다는 물건을 사지 못하게 막은 적이 있었다.
시동생이 플스4를 '어쩌다보니 두대'나 가지게 되어
공짜로는 못주겠고 남편에게 $$한 가격에 중고로 넘기기로 했다던데
도대체 어찌하면 플스4가 '어쩌다보니 두개'가 생기는지 이해도 못하겠지만
(보통 자신이 가지고 있다면 그것을 잊어버리거나 할일도 없을 텐데. 아니 그전에 시동생도 XBOX니 그런류가 넘치도록 많은걸로 알고있는데? )
집에 타블렛도 엄청많고,
그 타블렛들을 다 쓰지도 못하면서
잘 하지도 않을 플스4를 집에 두겠다니
이해가 되지 않아 사지말라고 반대를 했었다.
내 반대는 생각지도 못했던지
남편은 사탕뺏긴 어린애마냥 그렁그렁한 눈으로 안되냐고 나에게 반문했고
단호한 나의 대답에 급 땡깡을 피우기 시작했다.
사실은 원래부터 가지고 싶었었느니, 자기 친구들은 다 가지고 있다느니 그런 류의 핑계였는데
듣자듣자 하니 이건 무슨 초딩이 장난감 사달라는 수준의 논리여서 시끄럽다고 단호하게 입을 막았다.
그랬더니 남편은 비맞은 강아지꼴로 시무룩해져서 책생위의 타블렛중 하나를 들고는
쇼파 구석에 쭈그리고 앉아 눈보라사의 돌겜이나 하고 있는 것이었다.
그렇게 시무룩해진 남편을 보자니 내마음도 조금 안좋아졌다.
그리고 한달정도 지난 후 퇴근하고 돌아오니
플스4가
당당히!
거실의!
..... 커튼뒤에 있었다.
우선 문을 열자마자 보이는 거실이었고, 딱 봐도 커튼 뒤에 뭔가 있는 것이 보였는데
뭔가 당당히 거실에 놓은 것도 아니고, 숨겨놓은 것도 아니고 꽤 웃겼다.
남편은 모른척하는건지, 아무 생각이 없는건지, 항상 그렇듯 쇼파에 앉아 타블렛을 가지고 놀고 있었다.
남편이 딱히 말을 하지 않기에 나도 굳이 모른척 했는데 그렇게 한주가 지나고 주말이 될 때까지도 그 커텐뒤에는 플스4가 그대로 있었다.
아니 이걸 내가 모를거라고 생각하는 것도 아니고,
왜 계속 그곳에 두는지 이해가 가지 않아 (그리고 커튼 뒤라니 청소하기 번거롭다!) 주말에 아침먹고나서 남편에게 물었다.
" 플스4 설치는 할거야?"
하고 물으니 남편이 배시시 웃으며 짠하고 플스4를 커튼 뒤에서 꺼내더니 부랴부랴 설치를 하기 시작했다.
남편은 신이나서 나는 묻지도 않았는데 변명조로
'동생이 줘서 어쩔수 없이 가져왔다, 자기는 산적없다'는 등 그런류의 이야기를 했는데,
뭐 그건 당연한거다.
돈은 내가 줬으니까.
....뭐 엄청 저렴하게 넘겨서 샀을뿐! 딱히 시무룩해서 산건 아니라고!!
물론 남편에겐 비밀이다.
5.
커튼뒤의 플스 이야기를 친구에게 카톡으로 이야기 했었는데,
친구가 빵터져서 그걸 친구 남편에게 보여줬고,
친구남편이 플스게임 시디를 빌려줬다.
(어째서?!?)
....
...
음..
제가 남편에게 너무 맘 약한 와이프인건 아니겠지요..? ㅠㅠ
이야기하다보면 친구들은 남편에게 넘 약해지지 말라고 혼도 내고 그래야 한다 하던데... 하지만 도저히 음... 시무룩하면 맘도 아프고요.
아직 이정도는 괜찮겠지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