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 부부는 당연한 듯이 샤워를 같이 한다.
그것은 영화에서 보듯이 애로틱한 과정이라든지 서로의 몸매를 바라보며 므흣한 장면을 연출한다든지 하는 것과는 조금 다른, 일상을 함께 보내고 서로의 신체에 대한 정보를 공유하는 일이다.
한 사람이 머리 감는 동안 다른 사람은 몸을 닦고, 같이 이를 닦고, 서로 등을 닦아주고, 못보던 상처나 멍이 있으면 왜 이랬는지, 어디서 이랬는지 대화를 하고, 건강을 체크하는 일. 물론 소소하게 서로의 몸을 닦아주면서 야한 농담을 주고 받거나 아가처럼 흥해봐 하면서 코를 풀어주고 세수를 시켜주면서 애정을 확인하기도 하지만.
며칠전, 엄마가 우리 부부 욕실에 슬리퍼를 하나 더 사다 넣어주셨다.
그 동안 왜 하나 더 살 생각을 못했을까.
엄마한테 내가 미쳐 챙기지 못했는데 고맙다고 얘기했다.
"넌 엄마앞에서 부끄러움도 없이 참......내가 민망해서 원......"
당연히 부부는 같이 샤워를 하는거라고 생각하고 있었는데 우리 엄만 상상도 못하고 있다가 얼마전 내가 기운이 없어서 남편이 데리고 들어가 씻겨 나오는 걸 들었는데 황당했다는 얘길 했다.
"마누라가 아픈데 그럼 누가 씻겨? 엄마가 할래?"
"안 아플때도 같이 했잖아. 내가 모를줄 알고?"
마치 그 전에는 몰랐다는 듯이 황당했다고 하더니 금새 이미 오래전부터 알고 있었음을 실토한다.
"그 동안에도 알았으면서 슬리퍼 하나 더 넣어줄 생각을 안했다니."
"이제 봤어. 내가 언제 니네 욕실을 들어가 볼 일이 있어야지. 너야말로 이서방 불편하게 왜 하나 더 살 생각을 안했어? 하여간 지 몸밖에 생각을 안해. 지는 슬리퍼 신고 이서방은 맨발로 들어갔겠지"
엄마한테 고맙다는 얘길 하다가 웬일인지 싸우게(?) 됐는데 처참하게 패배하고 말았다.
남편은 그날 욕실에 슬리퍼가 하나 더 등장한 것을 발견하고 큰 소리로 환호성을 질렀다.
"욕실에 슬리퍼가 두개야!! 우와!"
항상 샤워할 때 욕실 슬리퍼는 내 차지였다. 그것을 늘 당연하게 생각했던 것 같다. 그 동안 불편했을텐데 남편은 왜 내게 슬리퍼를 하나 더 사자고 얘기하지 않았을까. 꼭 필요한 것이 아니면 자기가 필요한 것은 사자는 얘기를 하지 않는 남편인데 슬리퍼 생겼다고 좋아하는 걸 보고 있으니 그 사실이 마음에 아렸다. 그깟 욕실 슬리퍼가 뭐라고. 우리 부부 욕실엔 보일러가 들어오지 않아 바닥이 늘 차갑다. 여름엔 괜찮지만 겨울엔 얼마나 불편했을까. 남편은 당연한 듯이 먼저 들어갈때도 슬리퍼를 신지 않았다. 나는 먼저 들어갈때 당연한 듯이 슬리퍼를 신고 들어간다.
"엄마가 사다놨어"
"사위 사랑은 장모라더니."
요즘들어 남편이 많이 하는 말이다. 엄마가 빨래나 욕실청소, 밥차리기 같은, 내가 하던 우리 부부의 집안일을 하면서 남편은 부쩍 편해졌고, 그래서 사위 사랑은 장모라며 감탄을 하고 있는 것이다.
슬리퍼가 하나라면 당연히 못된 딸이 쓰겠지. 불쌍한 이서방.
런닝셔츠며 팬티며 다 구멍나고 성한게 하나도 없네. 불쌍한 이서방.
찐감자 좋아하는 이서방인데 지 살찐다고 감자 한번 안 쪄주나봐, 불쌍한 이서방.
나는 그 동안 함께 한 샤워의 수만큼의 남편의 배려에 대해 생각해 본다. 왜 나는 남편의 편에 서서 세심하게 살피지 못했던가.
그러다 문득.. 수많은 남편들의 답답한 사연에 등장하는, <말을 하지 그랬어>가 목구멍까지 올라오는걸 느끼고 황급하게 다시 말을 삼킨다. 엄마가 사위를 위해서 준비한 찐 감자를 장모 칭찬을 하며 맛있게 먹고 있는 모습을 바라보자니 근질근질 목구멍을 타고 다시 올라오려는 걸 겨우겨우 눌러담고 아프고 난 후 한번도 하지 않은 설거지를 자청해본다.
"설거지 내가 할게. 당신은 쉬고 있어"
"아니. 당신 허리 아프잖아. (조용한 목소리로) 아버님 시키자 ㅋㅋㅋㅋ 그리고 어머님한테 내가 얘기했다? 슬리퍼가 하나 더 있으면 좋겠다고 넌지시. 후후"
웃다가 엄마가 빨래감을 들고 식탁 앞을 지나가자 사위 사랑은 장모라며 두 엄지를 치켜든다. 엄만 그게 싫지 않은지 실없는 웃음을 짓고 마저 지나간다.
이 남자.
사랑스럽게도.. 고단수였던 것이다.
"아버님 설거지는 제가 할게요"
"아니야. 담궈만 놔. 설거지는 내가 해야지."
하고 나를 보며 찡긋.
난 웃음이 터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