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3년 6월 10일 안정환이 대표팀에 전격 합류했다. 당시 한국은 이틀 전 우루과이와 평가전을 가졌고, 하루 뒤 아르헨티나와의 경기도 예정돼 있었다. 아르헨티나전을 위해 안정환이 대표팀으로 온 것이다.
그런데 상황이 비정상적이었다. 안정환은 6월 2일에 백마부대에 입소해 4주 일정의 기초군사훈련을 받고 있는 훈련병이었다. 2002 한일월드컵에서의 4강 진출로 얻은 병역 혜택을 받기 위해선 기초군사훈련을 이행해야 했다. 훈련소에서 훈련 중인 선수를 대표팀에 합류시킨 것이다.
국방부는 “국민 여론을 감안한 특별 배려”로 안정환의 대표팀 일시 합류를 허락한다고 발표했다. 훈련병 안정환의 대표팀 합류라는, 지금 돌아보면 말도 안 되고 <신비한 TV 서프라이즈>에나 나올 법한 기묘한 해프닝을 만든 것은 오직 뜨거운 여론 때문이었다.
움베르투 쿠엘류 당시 대표팀 감독이 이끌던 한국은 우루과이와의 평가전에서 0-2로 패했다. 한일월드컵 성공 후 기대치가 한 없이 높아진 팬들은 경기 중 결정력을 발휘하지 못하는 최전방 공격수 최용수에게 야유를 보내는 유례 없는 행동을 했다.
우루과이전을 마치고, 아르헨티나전을 앞둔 시점에 경기장 안팎에서 안정환을 데려오자는 목소리가 형성되기 시작했다. 안정환은 한일월드컵에서 특유의 골 결정력으로 국민 영웅이 됐고, 훈련소 입소 전 있었던 한일전(원정)에서도 결승골을 터트려 인기가 절정에 있었다.
‘국민이 원하면’ 국방부가 충분히 특별 조치를 할 수 있지 않냐는 여론이 몰아쳤다. 국방부 홈페이지에는 릴레이 청원이 올라왔다. 대한축구협회도 그런 분위기에 밀려 국방부에 문의를 했다. 결국 안정환 훈련병은 ‘업무연락, 기타 공무 수행을 위한 공적인 외출을 허용하는’ 국군병역생활규정에 따라 대표팀 차출이 결정됐다. 대표팀 차출을 공익적 차원의 공무 수행으로 해석했고, 말이 안될 거 같았던 일은 현실로 벌어졌다.
하지만 그렇게 국민 여론이 만든, 한국 축구사에 다시 안 나올 특별 차출은 의미가 없었다. 안정환은 경기 하루 전 대표팀에 합류했다. 문제는 일주일 넘는 군사훈련으로 경기에 나설 몸이 안 됐다. 유격훈련까지 받은 선수를 불러 하루 만에 투입한다는 게 스포츠에 대한 지식이 없는 결정이었다.
안정환은 국민들에게 짧게 자른 머리에도 여전히 잘 생겼다는 사실만 확인시켜주고 서울월드컵경기장 벤치에서 경기를 봐야 했다. 그는 “투입됐어도 경기에 보탬이 되지 못했을 거 같다”라는 말을 남기고 부대로 복귀했다.
14년의 시간이 지나 많이 잊혀졌지만 2003년 6월의 이 해프닝은 국민 여론과 열망이 꼭 정답은 아님을 보여준 대표적인 사례다. 민심이 천심이라고 하지만, 잘못된 정보와 여론몰이로 형성된 모두의 목소리는 우리 스스로를 우습게 만드는 상황을 낳기도 한다. 그럴 때면 노도 같았던 여론은 “아님 말고” 혹은 “나는 그런 적 없다”는 식으로 금새 증발한다.
거스 히딩크 감독 ‘측이’ 대한민국 축구 국가대표팀 감독직 복귀 의사를 밝혔다. 모처럼 축구계에서 하나 된 국민 여론에 불이 붙었다. 대한축구협회로는 1분이 멀다 하고 “어서 히딩크 감독을 선임하라”는 요구의 전화가 걸려 오고 있다고 한다.
히딩크 감독은 한국 축구에서 신성불가침의 영역이다. 그도 그럴 것이 5번의 월드컵에서 48년 동안 단 1승도 거두지 못했던 한국 축구의 한을 풀어준 리더다. 긴 막힘이 뚫리자 한국은 히딩크 감독의 지도 아래 월드컵 4강이라는, 한국 축구의 객관적 위치를 훨씬 뛰어 넘는 성과를 냈다. 전국 각지에서는 국민들이 같은 색 옷을 입고 한 마음으로 한 대상을 응원하는 통합도 이뤄졌다.
한편으로는 한국 축구가 능력과 저력이 없는 게 아니라, 그 동안 대표팀을 이끌어 온 리더가 문제였다는 결론도 도출했다. 그가 이룬 월드컵 4강은 아마 한국 축구가 다시는 오르지 못할 고지일 것이다. 그래서 15년이 지난 지금도 모든 대표팀 감독은 히딩크 감독의 능력과 리더십에 비교당해야 했고, 지금도 비교 당한다.
그런 상황에서 히딩크 감독 측이 명장의 복귀 가능성을 언급했다. 의외다. 그를 잘 안다는 많은 이들이 그 동안 “히딩크 감독은 절대 다시 한국을 맡을 일은 없을 것이다”라고 말해왔다. 그 누구보다 명석하고 상황 판단이 뛰어난 히딩크 감독이 신화의 위치로 올려놓은 자신의 성과에 흠이 될 수 있는 계기 자체를 만들지 않을 것이라는 게 그들의 한결 같은 답변이었다.
추억의 힘은 강하다. 좋았던 장면 위주로 보정돼 기억된다. 히딩크라는 세계적인 감독의 능력, 리더십, 영감이 4강 진출의 중심이 된 건 사실이다. 한편으로는 히딩크 감독 취임 후 1년 6개월 동안 32번의 A매치와 월드컵 개막 6개월 전부터 사실상 대표팀 상시 합숙 체제를 만든 대대적인 지원도 있었다. 개최국으로서 16강 진출 실패의 망신을 당할 수 없고, 라이벌 일본에 성적으로 반드시 앞서야 한다는 절실함이 있어서 가능했던 일이다.
15년이 지난 지금은 저런 지원이 불가능하다. FIFA가 규정한 A매치 주간은 확고해 졌다. 과거에는 K리그의 협조를 얻으며 대표팀 명단의 70% 가량을 상시 소집할 수 있었지만 현재는 대표팀에 필요한 선수 절반 이상이 해외에서 뛰고 있다. 히딩크 감독이 그 같은 성과를 재현하기 힘들 거라는 주장의 근거들이다.
한국 축구가 다시 월드컵 4강에 갈 수 있는 방법은 단 하나다. 1명의 특출 난 외국인 감독에 의존하고, 리그 일정까지 멈춰가며 총력 지원하는 방식이 아니라 시스템 자체를 조금이나마 세계 정상에 가깝게 끌어 올리는 것이다. 히딩크 감독이 15년 전 이뤄낸 성공이 한국 축구에 던진 진짜 질문은 남들과 같은 여건 속에서도 그와 같은 성과를 낼 시스템을 갖출 수 있는지였다.
국내에 있는 히딩크 재단 측이 언급한 히딩크 감독 복귀설에 반응이 이처럼 뜨거운 것은 15년의 시간 동안 그 시스템이 크게 개선되지 않았다는 반증임을 부인할 수 없다. 같은 실수를 반복하며 월드컵 최종예선에서 숙적의 도움 덕에 본선행에 성공하는 치욕의 상황이 뭔가 특별하고 극적인 전환이 없으면 본선에 가서도 달라질 건 없다는 불안을 만들었다.
그때 타이밍 절묘하게 히딩크 감독 측의 입장이 전달됐다. 다만 아쉬운 것은 한국 축구가 가장 우왕좌왕하고 있던 지난 6월에도 히딩크 감독이 그런 마음을 품고 있다는 걸 알았다면 그때 얘기했다면 더 적절하지 않았을까? 감독 선임의 고민이 컸던 시점에 히딩크 감독이 관계자를 통해 현재와 같은 봉사의 자세를 전달했다면 모두가 쌍수를 들고 그의 복귀를 환영했을 것이다.
지난 최종예선 2경기는 어떤 세계적 명장이 왔다고 해도 ‘본선에 못 갈 수도 있다’는 불안감을 안고 뛰어들 수 밖에 없었다. 비록 그 2경기의 과정과 결과가 만족스럽지 못하고 해도 그 불안을 이겨낸 신태용 감독과 선수들에겐 최소한의 존중이 필요했다.
본선행이 결정되면서 모든 위험성과 불안감은 사라졌다. 이제 평가는 내년 6월 본선에 가서 이뤄진다. 하필 이 시점에 히딩크 감독 측이 3개월 전의 메시지를 전달한 것은 본의든 아니든 험한 길은 남이 가고, 잘 닦인 길이 나올 때 운전대를 잡겠다는 걸로 다가온다. 우리가 아는 리더, 히딩크 감독의 모습과는 거리가 있다.
월드컵 본선에 대한 불안과 우려를 낳은 대한축구협회를 옹호할 생각은 없다. 러시아 월드컵에서 성과를 내더라도 변화와 개혁은 진행되어야 한다. 어쩌면 최종예선이 끝나고 본격 논의됐어야 할 변화를 위한 과제들이 ‘히딩크 감독님만 오면 만사형통’이라는 여론에 가려진 건 아닐까? 대한축구협회는 계약대로, 원칙대로를 강조하며 신태용 감독 체제를 지켜가는 데 집중하게 됐다.
조금만 이성을 갖고 상황을 바라봤으면 한다. 왜 어디에도 구속되지 않은 신분인 히딩크 감독이 직접 그 의사를 밝히지 않고 ‘측을’ 통해서 여론을 확인해 보는지. 히딩크 감독이 와서 극적인 구원을 한다고 과연 한국 축구는 바뀌는 것인지? 과거의 사례를 볼 때 이성적 고민이 담보되지 않은 국민 여론은 훗날 우리 스스로를 부끄럽게 할 결과를 낳을 수 있다는 점을 잊고 있는 것은 아닌지를 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