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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제 허은실 작가 <나는 잠깐 설웁다> 강정 시인 해설에 대한 의견입니다
게시물ID : readers_29413짧은주소 복사하기
작성자 : cosmoagony
추천 : 0
조회수 : 582회
댓글수 : 2개
등록시간 : 2017/08/27 17:49:31
사진으로 찍어 올렸더니 읽을 수가 없..

그래서 적어서 올립니다.

1. 이것은 Feminism에 대한 시가 아니다.

2. 분석이 '화자'로서의 여성에만 머물러 있음.

3. 그래서 창조와 생산이라는 (여성만이 아닌) 인간의,
 또는 확장하여 생명 본연의 의지, 그리고 감정 -
 요컨대 히스테리의 줄기를 거세한 해석으로 귀결되어버림.

4. 즉 남성대립적인 것으로 여성을 파악한 것이어서
 이는 Feminism이 아니라 sexism.

5. 특히나 지금처럼 아이덴티티-反아이덴티티 간의
 '나'와 '나 아닌 것'의 분리와 배척의
 내면화, 노골화가 진척되는 시기에
 이 해석은 해석이 아니라 어그로임.

6. 그래서 시비 걸기가 무의미한가 하면 물론 그렇진 않음.
 상대적 소수인 여성 입장에서 여성의 지위나 능력,
 확장하여 존재를 인정받고자 하는 것은 나쁜 일이 아님.
 당연히 해야 함.

7. 그러나 이 시집 전체를 관통하는,
 차라리 쓸쓸하다 싶을 정도의 차분함은
 무기력을 내면화한 태도.

8. 그러면 우리는 그 힘빠진 화자에게
 제대로 '체온을 나누어주어야' 할 일 아닌가.

9. 딛고 서서, 지금 일으켜 주어야,
 공동체라는 입장에서
 내가 일으킨 그 정서로서의 비대상적 대상으로부터
 언젠가 내가 앉게 될 지 모르는
 휠체어를 맡겨줄 수 있을 일 아닌가.

10. 대체 왜 허무에서 끝이란 말인가.


이런 줄기입니다.


비판이 과할 수도 있다고 봅니다만,
내용을 좀 발췌해보면


   시 쓰는 일을 '산고'에 비유하는 건 진부할 뿐만 아니라, 안일해 보이기도 한다.
   더욱이 모종의 여성성과 연관시켜 그것을 '아이 낳듯 몸을 뒤집어야만 가능한 일'
   이라 일컫는다면, '그럼 남자들은 뭔가를 질질 싸려는 충동 때문에 시를 쓰려는 것인가'
   라는 일차원적이고도 저열한 반문에 곧장 맞부딪치게 될 수도 있을 것이다.
   (중략) 그렇기에 일반적인 개념에서의 '산고'는 여러모로 부적절하다.

   그럼에도 시 쓰기는 육체의 강렬한 진동과 통증을 동반한 내파("나는 나로부터 멀다")를
   겪어야 가능한 일이라는 점에서 '산고'와 닮은 면이 있다.

  > 그니까 산고가 된단 건지 아니란 건지.
   여기에서 '산고'가 상징적 의미로 파악되어야 할 거란 걸
   못 읽을 수도 있단 말입니까?

   매우 교만한 분인 걸 알 수 있습니다. 
   
   좀 흘러가보니 더 가관입니다.


   남성의 경우, 자신의 사타구니를 언제든 힘들이지 않고 볼 수 있다. 그 모양과 색깔,
   질감에 대한 분명한 자기 인식과 분석이 가능한 것이다. 그러나 여성은 그러기가 힘들다.
   남성이 그 자신을 일차원적인 물리적 상태 그대로 직접 맞닥뜨리는 데 길들여져 있다면,
   여성은 몸이 내적으로 작동하는 체계의 미세한 결에 따라 느끼고 판단하는 데 익숙하다.

   (중략)

   남성은 여성의 말을 지나치게 곧이곧대로 듣거나, 또는 영원이 곧이곧대로 듣지 못한다.
   반면에 여성은 직접적으로 들리지도 보이지도 않는 것들로 남성(적 체계)을 체험하고 이해한다.

  일단 남성은 사실이라 칩시다. 여기에 대한 so what은 뭐죠?


    어쩌다 이렇게 됐을까. 하지만, 답을 쉽게 조작해내지는 말자.


  ???????????????????
  아니 주장해놨으면 근거가 있어야죠. 뭐하자는 건지..;;
  답없음으로, 그러니까 뉘앙스 상 분명 뭐 서로 외로워지는 맥락을 설명하고자 함인 건 알겠습니다.
  근데 그 논지의 전개가 반드시 남성을 일종의 말초적 짐승으로 정의해두고 시작하는 것이어야 했을까요?


   남녀로도, 나와 너로도, 삶과 죽음으로도 손쉽게 갈라놓을 수 없는, "허기의 무궁"(지독)에서
   솟구친 지난한 '입덧'. 그건 나의 것만도 그의 것만도 그녀의 것만도 아닐 것이다.
   "누가 부르는지 귓속이" 오랫동안 간지럽다. 바람이 불고, 누가 자꾸 이름을 부른다.
   몸안에서 수백 마리 뱀이 요동쳐 나는 지금 혀가 수천 갈래다. 시인이여, 그 혀를 썰어 재로 만들라.
  

  화날 때 쯤 저랑 비슷한 결론이 도출되긴 합니다.
  다만 결이 다른 것은,
  창조에 대한 신경증적 스트레스-히스테리-는 결국 개인이 스스로 해결할 수 없기 때문에
  사회적 시선이 필요하다는 게 제 주장이라면
  강정 시인의 해석은 내 안에도 이토록 들끓는 뭔가가 있다.
  쓰고 싶거든 갖다 쓰셈.
  이건데, 완전 무책임한 듯.

  문학이 강도나 행동과 연결되지 않으면 그게 무슨 소용일까요.
  단순히 나의 비슷한 감정으로 쓸어주어서 위안을 주는 정도에서 그칠 것 같으면
  수 년 전 불다 만 '힐링' 바람과 다름 없이 무의미하고 소비지향적으로 흐를 겁니다.

  아 정말 맘에 안 듦.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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