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 생의 신조로 삼는 문학 작품 세 개가 있다. 정글북 작가 러디어드 키플링의 ‘만일’이라는 시와 생텍쥐페리의 ‘어린왕자’, 세르반테스의 ‘돈키호테’가 그것이다. ‘만일’은 악과 오기를 자극하여 내가 끈질긴 인간이 되도록 돕고, ‘어린왕자’는 목적보다 중요한 삶의 가치를 일깨워 자아를 들여다볼 수 있도록 이끈다. ‘돈키호테’는 열정 그 자체다. 무기력과 나태를 물리치고 현실과 타협하지 않는 도도한 꿈을 추진해나갈 힘을 준다. ‘만일’은 손 글씨로 다이어리에 적어 수시로 보고, ‘어린왕자’는 매년 새해 첫날 전체를 다시 읽는다. 의기소침해지는 순간에는 어김없이 ‘돈키호테’를 꺼내 든다. 꾸준히 책 읽는 편이고 취향 따로 없어서, 독서 범주 넓은 편이라 해도 좋을 텐데 여태 저 세 권에 사로잡혀 산다.
이 글에서는 그중 ‘돈키호테’ 이야기를 해보고자 한다. 단, 서평은 아니다. 평론은 할 깜냥도 안 되고. 그저 문장 하나를 소개하려 한다. 새삼 소개라기엔 워낙 유명한 구절이라 생색낼 것도 없겠지만, 그중 특별히 내가 품고 사는 몇 줄이다. 그 말들이 내 맘을 왜 사로잡았는지, 얼마나 대단한 영향으로 영혼을 휘감아 힘을 끌어내는지 들려주고 싶어서, 문득 그러고 싶더라.
한번 더 새삼, 돈키호테 소개부터 간단히. (어떤 작품으로부터 영감 받은 글을 쓸 때 거치는 절차 같은 거다. 작품에 대해 잘 아는 사람은 넘어가도 되는 부분.)
안 읽고 넘어가도 좋은 돈키호테 소개
도스토예프스키, 톨스토이, 셰익스피어, 헤밍웨이, 찰스 디킨스, 허먼 멜빌, 헤르만 헤세, 오 헨리, 생택쥐페리, 앙드레 지드, 빅토르 위고, 프란츠 카프카, 알베르 카뮈…. 기타와 등등
세계적 작가들은 많다. 그들과 그들의 작품에 대해 누가 낫네 어떤 작품이 못하네 해봤자 답 없는 논쟁이다. 그럼에도 이 기라성 같은 리스트 사이에서 세계 최고의 작품으로 선정된 소설이 있으니, 바로 스페인의 대문호 세르반테스의 ‘돈키호테’다.
돈키호테에 대한 찬사는 특히 문인들 사이에서 더 찬란하다. 2002년 노벨연구소는 세계 유명 작가 100인에게 의뢰해 문학사상 가장 위대한 작품을 선정했다. 물론, 돈키호테가 1위를 했으니 선정 결과를 여기 쓰는 거고. 셰익스피어와 톨스토이를 압도적으로 제친 순위다. 역사적으로 손꼽히는 작가들 다수 역시 돈키호테에 지극한 찬사를 보냈다. 어느 정도 레벨이냐면 도스토예프스키, T.S 엘리엇, 윌리엄 포크너, 토마스 만, 밀란 쿤데라, 뭐 이 정도 네임밸류. 호들갑 좀 더 떨자면, 프랑스의 비평가 생트 뵈브를 비롯 19세기 미국의 작가 워싱턴 어빙은 돈키호테를 성서에 비교하며 극찬했다. 이건 뭐.
돈키호테는 특히 뛰어난 캐릭터성으로도 많은 인정을 받았는데, 영문학자 이언 와트는 <근대 개인주의 신화>에서 서양 근대문학사에서 가장 널리 알려진 캐릭터로 파우스트, 돈 후안, 로빈슨 크루소와 함께 돈키호테를 꼽은 바 있으며, 밀란 쿤데라는 돈키호테보다 더 살아있는 캐릭터는 없다고 말했다. 읽어본 사람은 동감할 테고, 아직 읽지 않은 이는 보면 안다. 돈키호테는 뭍에 올려진 산 물고기처럼 펄떡이는 생명력 그 자체다.
원제는 ‘재치 있는 시골 귀족 돈키호테 데 라만차’고 익히 알려진 것처럼, 기사소설에 심취한 시골 노인이 세상을 떠도는 편력기사가 되어 좌충우돌 모험을 겪는 이야기다. 아둔하지만 약삭빠른 종자 산초 판사와 야위고 기운 없는 말 로시난테가 돈키호테의 모험에 함께 하며, 돈키호테의 존재조차 모르는 시골 여인이자 그의 상상 속 공주인 ‘둘시네아 델 토보소’가 늙은 노인의 아집 넘치는 모험의 원동력이다. 중세에서 근대로, 낭만주의에서 사실주의로의 이행을 보여주는 작품으로 최초의 근대소설이란 평가를 받기도 한다. 이야기 도중에 작가가 개입한다거나 소설의 등장인물들까지 돈키호테라는 책에 대해 의견을 나누는 장면 덕에 현대적인 메타 픽션의 선구적인 사례로도 설명된다.
이상과 꿈을 대표하는 인물 돈키호테와 현실적 인물 산초는 끊임없이 대립하고 갈등하지만, 주인과 지내며 산초는 차츰 변화하여 작품 말미에는 돈키호테에게 동화된다. 이는 인간이 지니고 있는 양면성을 상징하는 동시에, 이상과 현실의 완벽한 분리란 없다는 것을 보여준다. 그럼에도 끝내 산초가 돈키호테에 가까워지는 모습은 꿈을 간직하는 것이 인간에게 무엇보다 소중하다는 것을 말하는 듯하다.
꿈이 지배하는 이야기지만 꿈을 가장 하찮게 다루면서, 시종일관 불가능을 생각하도록 만든다. 그래서 더 꿈에 대한 간절함이 도드라진다. 누가 봐도 미친 노인의 절대 실현되지 않을 이상이지만, 그 행보는 단호하고 집요하다.
항간에는 돈키호테가 모험소설이라는 명성에 비해 지루하다는 평도 있다. 미국의 작가 클리프턴 패디먼의 지적처럼 돈키호테는 오늘날 사람들이 ‘읽기보다는 인용하기를 더 많이 하고, 즐기기보다는 칭찬하기를 더 많이 하는 책’이다. 또한 그는 세르반테스야말로 역사상 최악의 시인 가운데 하나라고 말하며 돈키호테를 읽을 때 곁다리 에피소드나 시가 나오면 무조건 건너뛰라고 조언한다. 영국의 작가 서머셋 몸도 비슷한 견해를 밝힌 바 있다. 돈키호테를 칭송하는 사람들은 많지만 정작 완독 한 사람은 별로 없는 이유다.
한국에는 오랫동안 중역본이나 축약본만 나와 있었다. 스페인어 번역의 어려움 탓이었는데, 고맙게도 2004년 돈키호테 출간 400주년을 기념해 완역판을 내주었다. 산문시에 가까운 작품 원본을 고증한 덕에 장황하고 철학적인 대사들로 도배되어 있고, 매우 두껍다. 그래도 도전해볼 만한 가치는 있다. 클리프턴 패디먼의 조언처럼 난해한 부분들은 넘어가고, 그저 스토리만 따라가도 좋다. 당신에게도 꿈이 있거나, 있었다면 읽는 방법 따위 상관없이 작품에 담긴 가치는 구구절절 전해질 거다.
이제, 본론.
작품 소개 (읽은 사람들에게) 들어가며 ‘간단히’라 말해 미안하다. 본론은 군소리 없이 바로 시작하겠다. 이런저런 찬사와 어떤 비판을 받기도 한 정신없는 모험 소설 돈키호테. 숱한 명대사가 담겼지만, 그중에서도 –
이룰 수 없는 꿈을 꾸고
이루어질 수 없는 사랑을 하고
이길 수 없는 적과 싸움을 하고
견딜 수 없는 고통을 견디며
잡을 수 없는 저 하늘의 별을 잡자
– 이 구절을 젤로 좋아한다.
피학성 성격장애는 아니다. 피날 때까지 엄지손톱 끝 살 뜯는 버릇은 있지만 고통에 고무되거나 학대를 즐기지는 않는다. 내가 저 구절을 좋아하는 이유는, 없음 너머 있음의 희열을 상상하기 때문이다. 그래서 나는, 저 다섯 줄에 쓰여 있지 않은 결과에 대해 쓰고자 한다. 모든 결과엔 과정이 있고, 시도를 통해 실현으로나아간다. 가능성 없어 보이는 도전에 대한 시를 담담히 노래할 수 있을 때, 차분함과 의연함이 갖춰진다. 현실이 우리 앞에 세워둔 단단한 장벽은 단숨에 허물어지지 않으니, 모서리부터 조금씩 갈아 나갈 끈기가 필요하다. 인고를 인내하지 못한다면, 꿈은 단어의 사전 정의 1번 항목처럼 잠결에나 볼 수 있는 정신 현상에 그치고 말 테다.
이룰 수 없는 꿈은 성장 한계를 높여준다.
목표는 가까이 두되 꿈은 길게 보라. 목표는 단계별로 설정되어야 하며, 각 단계의 성취는 꿈의 실현으로 가는 과정이다. 하루 목표가 모여 1주 목표가 달성되고, 4주 목표가 월 목표로, 그렇게 계절과 년, 연령대마다의 목표들을 이루어 나간다. 꿈은 클수록 좋다 하는데 영 허황된 말만은 아니다. 이룰 수 없어 보일만큼 큰 꿈은 거기까지 가기 위해 달성해야 할 목표를 세분화시키니까. 꿈의 크기를 잴 순 없겠지만 가능성을 논할 순 있다. 쉽게 될 성싶은 꿈을 목표로 전환하고, 가능성 없어 보이는 거대한 꿈의 실현 과정으로 삼는다면 기대치 이상의 성장을 이룰 수 있다.
내 꿈은 노벨문학상 수상이다. 아직 등단조차 요원하지만. 그래도 꿈은 굳건하다. 서른다섯되는 2018년부터 소설을 공모에 내기 시작할 거고, 마흔에는 이상문학상을 받을 예정이다. 매일 A4 한 장을 채우고 매주 완성된 글 두 편 이상 작성한다. 매 월 습작 단편 소설 하나는 반드시 써낸다. 이런 것들 전부가 이룰 수 없는 노벨문학상의 꿈을 이루기 위한 목표다. 독서, 한국어 공부 등 수시로 반복되는 작은 목표들은 더 많다. 아마 나는 평생 꿈을 이룰 수 없을지 모른다. 하지만, 꿈이라 불러도 무방할 목표들을 많이 이룰 수 있다. 이미 몇 개는 이루었고.
꿈을 이루는 건 황홀한 일이지만, 이룬 뒤 막상 허망해질 수 있는 것도 꿈이다. 이왕이면 진압되지 않는 큰 불을 지르자. 영영 꺼지지 않는 뜨거운 동경 하나 가슴에 품는다면 일생의 동기부여로 삼을 수 있다.
이루어질 수 없는 사랑을 통해 겸허해지는 법을 배운다.
너무 아픈 사랑은 사랑이 아니었음을 나 역시 절절히 느끼지만, 그 사랑들이 나를 성숙하게 만들었다는 건 부정 못하겠다. 이룰 수 없는 사랑을 쟁취하기 위해 더 나은 사람이 되고 싶었다. 숱한 상처와 어찌 못할 좌절을 겪는 동안 피폐해졌으나, 회복하고 일어서는 과정 속에서 한층 단단해졌다. 사랑은 열정과 노력으로 쟁취 가능한 목표가 아니라서 겸허해지는 것 외엔 상대할 방법이 없더라. 그 사랑에게 잘 보이려 애쓴 일들이 결국 나를 발전시켰다는 걸 나중에야 알았다. 기다림과 인내를 배웠고 집착하다 집착을 놓고 의연해졌다. 마침내 나를 사랑하는 법을 깨우쳤을 때, 이루지 못했던 사랑에게 감사마저 느껴졌다. 서투른 사랑 솜씨로 이룰 수 없는 사랑에 모든 것을 걸어보았기에 나는 지금의 사랑에 배운 것을 다 쏟을 수 있다.
이길 수 없는 적과 싸우기 위해서는 영리해져야 한다.
세상 앞에 선 개인은 필연적으로 게릴라다. 규모 앞에 정면승부는 무모하다. 게릴라의 싸움은 전략적이어야 한다. 기지 넘치는 전술을 통해 조금씩 상대를 무너트려 나간다. 치열한 세상 속에서 꿈과 사랑을 추구하려면 먹고사는 것을 간과할 수 없다. 결국, 생존을 위한 싸움에서 먼저 승리해야 한다.
삶은 탄생부터 하드모드다. 아가들에겐 걸음마 한 발 떼는 것도 버거운 게 여간 아니다. 적의 난이도를 선택할 권한 같은 건 없다. 우리를 둘러싼 사회와, 그 속 구성원들의 시선과 말, 세간의 평가와 점점 발전이 요구되는 역량의 폭과 깊이. 심지어 어떤 일에 있어 스스로의 만족도까지. 그때마다의 성장치만큼 만만찮은 적들은 어김없이 나타나고, 헤쳐 나오기 위해 영리해져야 한다. 나는 이길 수 없을 듯 보이는 적을 ‘한계’ 라 부른다. 최악의 상황에서도 최선을 생각하는 사람만이 한계를 넘을 수 있다. 방법을 강구할 때 끈기도 발휘되는 법. 한 번이라도 한계를 넘어본 사람은, 기어이 적들 앞에 이길 수 없는 적이 된다.
견딜 수 없는 고통을 견뎌낸 사람은 쉽게 무너지지 않는다.
물론, 한계를 넘는 건 고통스러운 일이다. 때론, 견딜 수 없을 만큼. 받아들여야 하는 사실은 삶의 많은 부분이 고통으로 이루어져 있다는 거다. 아침에 눈 떠 일어나는 사소한 일조차 이불 속 평안을 깨야 하는 고통이다. 크고 작은 고통들을 이겨내며 사람은 생을 이어간다. 견디는 삶은 우리의 숙명이다. 경험과 성취는 안정을 깨는 행위로부터 시작되니까. 매일 반복되는 일상 속 익숙해진 고통은 견디기 수월하지만, 때로 생소한 고통을 접하게 되면 실제 힘든 것보다 훨씬 크게 느껴진다. (질병으로 인한 고통은 제외다. 그건 여기서 다루는 주제와 다른 영역의 이야기고, 자력으로 어찌할 수 있는 게 아니다.)
하지만 한계 앞에서 딱 한 발 더 나아가면, 고통을 견디어 마침내 이겨내면 가파른 성장을 이룰 수 있다. 헬스장에서 기구를 더 이상 못 들 것 같을 때 이 악물고 해내는 마지막 한 개 동작이 근육을 키우는 것처럼. 평소 푸시 업 10개가 한계였던 사람이 어느 날 기필코 11개를 성공해내면, 그 다음부터 평소 분량은 아무렇지 않게 11개가 되어버리지 않던가. 운동이 예들기 쉬운 영역일 뿐, 다른 전문 영역에서도 다르지 않다. 픙파를 헤쳐 온 사람의 아우라는 압도적이다. 고통의 역치가 높아질수록 역량이 강화된다.
사실, 인생의 희열은 여기에서 온다. 힘들게 이룬 일일수록 보상의 기쁨도 커지고, 그 한 순간을 위해 무수한 고통의 나날을 이겨낼 가치가 있다. 짧은 행복이지만 자주 느끼기 위해 고통에 뛰어든다.
저 하늘의 별을 잡을 순 없어도 별처럼 빛나는 사람이 될 수는 있다.
우주에는 동서남북이 없으니, 우리 입장에선 별이 위에 있지만 별의 입장에선 우리가 위에 있을 수도 있다. 그렇다면, 사람은 중력에 이끌린 별과 같을지니. 저 하늘의 별을 잡진 못해도 반짝반짝 빛나는 사람이 된다면 인구가 바로 은하수겠다.
이룰 수 없는 꿈을 진지하게 말하는 사람, 이루어질 수 없는 사랑에 진심을 내 보이는 사람, 이길 수 없는 적 앞에 주눅 들지 않는 사람, 견딜 수 없는 고통 너머 행복을 맛 볼 줄 아는 사람, 그리하여 별처럼 빛나는 아름다운 사람.
그런 사람이 되어, 그와 같은 사람의 손을 잡고 함께 나아간다면 저 하늘에 별을 잡은 것과 무엇 다를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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불가능은 가능에 불붙은 단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