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때를 맞춰 물을 주고 가꿔야 하는 화분도 예쁘지만 점수를 주자면 제 뜻과 무관한 자리에서 억세게 자라나는 들풀에 후한 점수를 주고 싶다. 구름이 주는 만큼만 먹고 자란 들풀이 참으로 무성하다. 시선 한 줌 없이 자라난 것들이 이 계절에 가장 어울리는 색을 띄고 있다.
2. 오지 않아 애먹이다가 피해 없이 내려 고마운 것. 이르는 말은 단비라지만 다른 이름도 함께 떠오른다. 입에 담기는 소리는 달라도 반갑기는 서로 닮았다. 단비 같은 사람, 멀리서 응결하고 있을 이름.
3. 더위가 조금 가셨는지 저녁 공기가 선선하다. 담을 따라 걷기에 적당하고 부담이 없다. 다시 계절이 자리를 내주려나 보다. 덮었던 풍경을 덤덤히 내주는 마음이 절기마다 기특하다.
4. 사람의 언어가 발달할 때 대명사는 일인칭에서 이인칭, 삼인칭으로, 동사의 어미는 서술형에서 과거, 미래, 진행형 순으로 발달한다고 한다. 부정의 말은 '아니(안)'를 먼저, 그리고 나중에 '못'을 배운다. 일반적인 인식과 경험의 확대 과정이 유사하게 반영된다. 나와 너에서 누군가를 안다. 과거와 미래를 둘러보다 현재를 직시하고, 가능성에서 살다가 한계를 안다. 신기하다.
5. 멀어지는 것들은 가는 걸음이 무거워서 좋은 감정만 두고 떠난다. 그것이 시간에 비례하여 미화되면 전에 없던 흔적이 된다. 남은 것들은 그로 인하여 변하거나 또는 그렇지 않아도 그러하다 여기며 산다.
6. 자라지 말아야 할 감정이 있다. 감정이란 결국 상황의 결과물이어서 그렇다. 상황에 어울리지 않는 감정, 염치없고 자격이 없는 감정은 분명히 존재한다. 아낄 수도, 품을 수도 없는 감정. 억지로 안으면 죄책감에 마음만 다친다.
7. 이야기를 쓰기에는 상상이 풍부하지 못하고, 시를 적기에는 보는 눈이 맑지 못하다. 그래서 문장 몇 줄로 감정이나 풀 수밖에 없다. 그래도 꾸준히 쓰려는 이유는 있다. 사람의 정체성은 생산성으로 규정되기 때문이다. 몇 줄이라도 남겨 스스로를 규정하고 싶은 까닭이다.
8. 자라난 손톱이 사람을 할퀴고 난 뒤로 내게 붙어 자라나는 것들에 민감해졌다. 그건 넘어갈 수 있는 부주의한 실수였지만 상대의 쓰라린 모습은 완고한 사실이었다. 제때 잘라내지 못한 것들이 사람을 할퀸다. 단지 손톱에 국한되는 일은 아닌 것 같다.
9. 서로의 모순을 마주하는 일이 관계의 본모습이라 한다. 이해할 수 있다고 여겼지만 이해할 수 없었던 이들은 끼워지지 않는 조각에 실망하며 등을 돌린다. 양립할 수 없는 생각과 감정을 품고 사는 이들이 서로의 내면에 존재하는 모순에 끌리지만 결국 양립하지 못하는 관계가 되어 멀어진다. 모순과 모순이 만나 모순을 만든다. 이해할 수 없어 이 또한 모순이다.
10. 벗어날 수 없는 가로수는 박혀버린 거리를 사랑할 수밖에 없다. 당장 떠날 수 없는 것들이 대개 그렇다. 깊게 인박혀 벗어낼 수 없는 습성을 사랑하지 않으면 스스로가 부정 당한다. 그건 꽤나 아픈 이름을 세기고 사는 일이다.
11. 기억에 박제된 꽃이 있다. 훈풍이 돌 때마다 꺼내 말렸더니 시간이 지나도 향이 바라지 않는다. 마음에 들이길 잘했다. 볕이 좋은 날에는 화분이 된 기분이다.
12. 잠시 해소하여도 샘물처럼 다시 스미는 생각과 감정들이 있다. 두고두고 사라지지 않는 것들은 그만큼 뿌리에 가깝다. 분명한 무언가에는 시간이 필요하다. 결국에는 점이 아닌 선이 자신을 짐작하게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