숨이 막힐 정도의 공기다. 어떻게 여기까지 왔는지 기억도 나지 않는다. 하지만 여학생 가슴을 잘라내던, 임산부 배를 가르던 저 괴물새끼들의 모습은 아직까지 눈에 선하다.
밖에 장갑차가 와 있습니다!
메가폰 든 학생의 말에 사람들이 와와 소리를 지른다. 어떻게든 희망을 보려는 눈빛이다. 학생은 내쳐 소리지른다. "기갑 특기이신 분들은 바로 나가서 타 주시면 됩니다!" 몇 명이 뛰어나간다. "대공기관총 특기!" 또 몇명이 손 들고 나온다. "지금 트럭에 싣고 있거든요. 가서 도와주세요! 박격포 특기이신분!" 또 누군가 나요 하고 나온다. 메가폰 든 학생은 목소리가 갈라져 나온다. 물이라도 먹여야 하지 않을까 "길 건너가서 왼쪽으로 가세요! 폭발물 특기 혹시 계십니까?!" "그건 내가 했어!" "길 건너서 오른쪽으로 가시면 TNT 실려있습니다. 가주시면 감사하겠습니다!"
이제 내 차례다. 묵직한 소총이 차갑다. 탄창을 확인하고 장전한다. "관등성명이요?" 총기함 앞에 서 있던 학생이 묻는다 "중위 김우남. 06-2847×××× 군의관입니다."
아 의사이시냐고, 학생 얼굴에 미세한 웃음이 걸린다. 그 웃음이 부담스럽다. 길 건너지 않고 바로 오른쪽으로 돌아가면 AMB가 있는데 거기 타면 된단다. 군용 앰뷸런스의 뒤칸에 탔다. 공포에 질려 퍼래진 얼굴을 한 청년들 몇이 보인다. 의무병들이다. 아마도 내 얼굴도 저런 꼬라지겠지. "형님!" 이건 대단히 반가운 얼굴이다. 내 학교 후배놈이 차에 올랐다! M1소총 쥔 품이 영 어색하다. 나는 처음으로 웃는다. "이 자식아. 어쩌려고 여길 왔어?" "제 여자친구가 시내 대학병원에 갇혀 있습니다. 거기까지 가려면 이 방법밖에 없잖아요."
사실 내가 이 차에 탄 이유도 마찬가지다.
"출발하겠습니다." 몸들이 흔들린다. 구급차 뒤 칸은 달릴때 앉아 있기엔 대단히 불편하다. 과속 방지턱을 넘는지 한번 우당탕 하고 흔들리더니 이내 큰길을 내처 달린다. 먼 곳에서 총성이 들리기 시작한다. 나는 바지에 땀을 한번 닦고 총을 바로 쥔다.
달린다.
지독한 폭음들 마치 벼락과도 같다. 우리에게 맞지 않기를 기도할 뿐 우리는 아무것도 할 수가 없다. 브레이크가 크게 걸리고 차가 구르듯 요동친다. 앞에 앉아있던 의무병의 몸이 내게 쏟아진다. 앰뷸런스의 뒤쪽 창으로 다리가 잘린 채 몸부림치는 시민군 병사의 모습이 보인다. 좀비들이 그에게 달려든다.
"엄호사격 할 줄 아는 사람?" 아무도 대답이 없다. "그냥 나한테 덤비는 놈한테 쏘면 돼! 씨× 그냥 갈겨버려! 저 자식 살려야될거야냐!" 나는 앰뷸런스 문을 걷어차고 달려나온다. 밖은 그대로 지옥도다. 총성 폭음 비명. 일단 부상당한 병사의 팔은 잡았다. 근처에서 박격포탄이 한 방 터지면서 나는 땅을 구른다. 이명이 울린다. "이리 와 새끼야! 기어서라도 와!" 그 병사는 물에 빠진 사람처럼 몸부림치며 내게 엉겨온다. 하늘과 땅이 구슬처럼 구른다. 후배놈이 달려와서 병사의 반대쪽 어깨를 들친다. "얼른 가시게요!" 병사를 앰뷸런스 침대에 눕혔다. 사실상 다리 절단은 필연적이다. 응급구조사 운전수에게 대단히 감사할 노릇인데 우리는 어쨌든 대학병원에 도착했다. 시간이 어떻게 갔는지 모르겠다. 오늘이 며칠인지도 기억나지 않는다. 5월 20일? 21일이더라? 아님 22일인가..
여자친구가 있는 대학병원 앞 일방로의 원룸 비밀번호를 누른다. 열리지 않는다. '나야 제발.' 괜찮은거지? 아무 일 없는거지? 문이 열리면서 내 이마를 친다. 나는 기진맥진한채로 문 안으로 쓰러진다. 여자친구의 비명 소리가 들린다. 피범벅이 된 채로 손에 총까지 쥐고 있으니 그 아이에게는 다른 세계의 괴물처럼 보였을 께다. 나는 정신 없는 상황에서도 일어나 문을 단단히 잠근다. 여자애가 내 뺨을 내려치고 대성통곡한다. 어디 있었냐. 무서워서 죽는 줄 알았다. 이 피는 대체 뭐냐. 어디 다쳤냐. 진짜 죽여버린다. 왜 연락도 안하냐. 진짜 다친거 아니냐. 말좀 해봐라. 나는 간신히 손을 뻗어 그 애 눈물을 닦아준다. 나 괜찮다고
21일. 기쁜 소식이다! 시내에서 놈들을 몰아냈다!
22일. 전기와 가스는 이미 끊어졌다. 군대의 트럭이 돌아다니고 있는 걸 보아 치안은 문제 없는 것 같지만 모든 시장과 상점이 문을 닫아 식량을 구할 길이 없는 것이 큰일이다. 천만다행으로 10kg짜리 쌀포대가 3분의 1정도 남아 있고 언젠가 여행가서 고기 구워먹자고 준비해두었던 부루스타와 부탄가스통이 두개 남아 있다. 수도도 언제 끊길지 모르기 때문에 우리는 욕조는 물론이고 옷장, 케비넷 등등 뭔가 담을 수 있는 용기를 전부 비우고 거기에 물을 채웠다. 부르스타로 냄비에 밥을 해 먹었다. 밑에 누룽지처럼 조금 타긴 했지만 먹을 만 했다.
23일. 수도가 끊어졌다.
24일. 라디오가 다시 나오기 시작했다. 하지만 대부분은 우리가 알 수 없는 언어가 섞여나온다. 무서워서 밖으로 나갈 수도 없다. 믿을 것은 침대 밑에 숨겨둔 M1카빈 소총뿐이다. 여자애에게는 우리가 놈들을 몰아냈으니 이제 아무 일 없을 거라고 안심시켰다. 저녁 식사로는 마지막 남은 달걀을 간장과 김치와 함께 밥에 비벼먹었다.
25일. 길거리를 돌아다니던 군인들도 거의 보이지 않는다. 물도 반 이상 떨어졌다. 대체 도움은 오기는 하는 걸까. 혹시 우리가 살아남은 유일한 사람들인건가. 하지만 이런 이야기는 여자애한테는 하지 않는다. 저녁을 먹고 주변을 좀 살펴볼 겸 트랜지스터 라디오를 들고 옥상으로 올라갔다. 여전히 알 수 없는 언어가 나온다. 나는 무심히 운동 겸 스트레칭을 한다. 그때 라디오에서 분명한 인간의 언어가 들렸다! 나는 그대로 굳어버린다. 라디오는 분명히 "너희가 좀비다." 라고 말했다. 잘못 들었을지 몰라 라디오에 귀를 비비듯이 갖다댔지만 비슷한 소리는 다시 들리지 않았다. 이 이야기는 여자애한테는 하지 않는 편이 나을 것 같다.
26일. "오빠 이게 무슨 소리야?" 다시 들렸다. 분명 너희가 좀비라고. 나는 라디오를 꺼버렸다. "이상한 소리야. 신경쓰지마. 좀 있다 내가 다시 들어볼게. 밥 먹자." 여자애는 잠자코 몇 술 더 뜨다가 말한다. "오빠 구조대가 올까?" 나는 짐짓 코웃음친다. "당연한거 아냐? 이미 시내도 다 확보했고 우린 안전해. 쓸데없는 걱정 하지 말게. 응?" "근데 라디오는 조금 이상해. 구조 방송이 나와야하는거 아냐?" 여자애의 눈에서 내 공포를 읽는다. 이 아이는, 이 아이만은. 제발.
27일 새벽
첫번째 사이렌이 울렸다. 여자애는 등을 돌리고 자는 척 하고 있지만 나를 안심시키려고 그러는 줄 안다. 나는 조용히 M1소총을 꺼내들고 라디오를 쥐고 옥상으로 올라간다. 라디오를 켠다.
너희가 좀비다! 너희가 좀비다 너희가 좀비다 너희가 좀비다 너희가 좀비다 너희가 좀비다 너희가 좀비다너희가 좀비다 너희가 좀비다 좀비들을 죽여라 좀비들을 죽여라 좀비들을 죽여라 좀비들을 죽여라 죽여라 죽여라 죽여라 이제 라디오는 확실한 인간의 언어다. 나는 그 자리에 주저앉는다. 다시 사이렌이 울리고 중기관총의 총성이 터지기 시작한다.
나는 풀려버린 다리를 움직여 간신히 콘크리트 난간 너머를, 그리고 시내, 도청을 향해 새까맣게 몰려오는 좀비 떼들을 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