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 오는데 새벽부터 오라고 난리야 난리가."
커피를 홀짝거리며 김경사가 말했다.
"그... 경사님이 꼭 오셔야 할 만한 사건이라서요... 와서 보시죠."
박순경이 허리 높이의 폴리스라인을 들어올리며 손짓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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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로등은 아직도 나간 상태였다. 수업을 끝내고 집에 가는 길인 태권도 강사 세영은 휴대폰을 꺼내 갤러리를 열었다. 사진첩 가득 들어있는 지후와의 사진들을 빨리 지우다가, 제주도에서 찍었던 사진--마지막 사진--을 발견하고는 잠시 걸음을 멈췄다. 한참이나 엄지를 휴지통 아이콘 위에 들고 있다가 체념하듯 화면을 껐다. 세영은 문득 인기척을 느꼈고, 재빨리 뒤를 돌아봤다. 한 30미터 뒤에서 누군가 오고 있었다. 마르고 키가 큰 남자같았지만 확실히 알 수는 없었다.
잰 걸음으로 길을 재촉했는데, 그 사람이 계속 따라오고 있었다. 한참을 걸었는데도 더 가까워지지도 않고 멀어지지도 않았다. 세영이는 이제 뛰다시피 걷다가 앞에 편의점을 발견했고, 재빨리 뛰어 들어갔다. 편의점은 세영이가 자주 가는 곳으로, 뒷문이 건물 뒤로 이어지는 곳이었고, 세영이는 뒷문으로 나가서 집을 향해 뛰었다. 드디어 아파트가 시야에 보였는데, 아까의 남자가 아파트를 등지고 서 있는 것을 보고 세영이는 담 뒤로 숨었다. 머리를 담 위로 약간 들어서 남자쪽을 봤지만 남자는 아직도 아파트를 등지고 있었다.허름하고 빈 집이 많은 아파트인데다가 달도 없는 밤이라 어두웠지만, 그 남자가 확실했다. 'ㄷ'자 모양으로 아파트 담 안쪽으로 돌아 들어간 세영은 집에 들어가려다가 궁금증을 참을 수 없었다. 남자라 해도 마른 체형이었고, 태권도 강사인 세영이었다. 세영은 아파트 현관에서 자신을 등지고 있는 남자에게 달려가서 단번에 넘겨트렸다. 남자는 힘 없이 쓰러졌고, 세영은 그의 두 팔을 뒤로 해서 단단히 잡았다.
"너 누구야!"
세영이 소리질렀다.
"나 그런데 있잖아."
엎드린 채로 고개를 돌린 남자가 말했다. 그 얼굴을 본 세영은 비명을 지르지 않기 위해 입을 막았다.
"나 그런데 있잖아..."
세영은 붙들었던 남자의 손을 놓고 뒤로 앉아버렸다. 발과 다리를 사용해서 뒤로 도망쳤지만 다리에는 힘이 들어가지 않았다.
"어... 어떻게..."
"나 그런데 있잖아..."
"너... 어떻게 된거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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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야, 이거 타자!"
지후가 세영의 손목을 잡고 롤러코스터쪽으로 뛰며 말했다.
"재미있겠다! 그런데 줄이 좀 긴데..."
"아냐 기다렸다가 타면 되지."
줄에 서서 기다리면서 지후와 세영은 신혼여행을 어디로 갈까에 대한 논쟁을 벌였고, 이야기에 집중하다 보니 어느 새 줄의 앞에 있었다.
"맨 앞에 타자."
"좀 무서운데..."
"우리 귀여운 세영이 어린이, 무서워요? 괜찮아. 무서우면 오빠 꼭 잡으면 되요~"
"크크킄 너나 오줌 지리지 마시구요."
말은 그렇게 했지만 롤러코스터가 철컹철컹 소리를 내며 올라가자 세영은 겁이 났고, 지후의 손을 꽉 잡았다. 바로 며칠 전에 샀던 약혼반지의 차가운 금속의 촉감과 따듯한 그의 손의 열기가 느껴졌다. 지후는 세영을 바라보고 미소 지었다. 지후는 "나 그런데 있잖아"라고 말했다. 세영은 긴장한 표정으로 "나 너무 무서워. 있다가 말해"라고 하고는 그의 손을 잡고 눈을 질끈 감았다.
롤러코스터는 순식간에 한 바퀴를 돌았고 탑승했던 곳으로 돌아왔다. "어휴 10년 감수했네. 넌 안 무서웠어?" 지후는 대답이 없었고 세영은 주변에서 들리는 사람들의 비명 소리에 어리둥절하며 눈을 떴다.
세영은 "뭐야?"라고 하며 눈을 떴지만, 지후는 답이 없었다.
세영이 의아해하며 지후를 돌아봤을 때, 지후의 가슴에 길고 두꺼운 금속 막대가 꽂혀 있었다. 입에서는 피를 흘리고 있었다. 세영은 비명을 지르며 지후를 흔들었지만, 지후는 이미 없었다.
나중에 밝혀진 것이지만, 롤러코스터가 내려갈 때 앞쪽의 레일이 탈선하면서 금속 봉이 일어섰고, 지후를 관통한 것이다. 막대는 정확히 지후의 왼쪽 가슴을 관통했고, 그의 심장을 뚫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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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 그런데 있잖아."
"..."
지후였다. 세영은 믿지 못할 광경을 그냥 보고만 있었다.
"나 그런데 있잖아."
드디어 일어난 세영이 그에게 다가갔다.
말도 안 되지만 눈 앞에 있는 지후를 보고 뭐라 생각해야 할지 알 수 없었다.
갑자기 일어나서 지후에게 다가선 세영은 손을 올려 지후의 왼쪽 가슴에 댔다. 세영은 지후의 남방을 찢었다. 지후는 세영의 손을 잡아 자신의 가슴쪽에 댔다.
그의 왼쪽 가슴에는 큰 구멍이 있었다.
지후가 말을 이어갔다.
"나 그런데 있잖아."
갑자기 그의 말이 늘어진다. 오래된 카세트처럼 그의 목소리가 매우 깊다.
"나... 그런...데... 있..잖아..."
갑자기 기침을 하는 지후의 입에서 피가 나오기 시작한다.
한 두 방울이 떨어져 아직 지후의 가슴에 대고 있던 세영의 손에 한 방울이 떨어진다. 세영은 눈물을 흘리며 이제 허공이 된 그의 가슴을 어루만진다.
"그런..."
갑자기 지후의 입에서 피가 왈칵 쏟아진다. 피가 입에서 쏟아지는 중에도 지후는 말을 이어갔다. "나..." *울컥울컥* "그런데" 피가 철철 흐른다... "있잖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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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가씨. 일어나요."
누군가 건드리는 느낌에 세영은 일어났고, 아파트 주차장에 누워 있는 자신을 발견한다. 경비 아저씨가 말을 이어간다.
"술을 마셨나? 여기서 자면 안되요."
아침이다. 그때 어제의 일이 일어난 세영은 벌떡 일어선다. 지후는 없다. 꿈이었구나...
집에 들어가서 세수를 하려던 세영은 손등에 있는 핏자국을 발견했다.
"그럴리가... 없잖아..."
손을 씻은 세영은 단단한 주차장의 아스팔트에 쓰러진 것이 기억났다.
"꿈이었구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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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지만 지후는 매일 찾아왔다.
지후는 매일 같은 말을 반복했고, 매일 피를 흘렸다. 그리고는 세영의 손을 잡아 자신의 가슴에 댔다.
"나 그런데 있잖아..."
"응, 지후야, 말해봐. 말해줘."
"나 그런데 있잖아..."
이런 일은 매일 일어났다. 지후는 매일 살아 있는 것 같은 모습으로 지후는 세영을 찾아왔다. 그렇지만 항상 홀연히 나타났다 사라졌다.
"나 그런데 있잖아..."
"응, 내가 뭘 해줘야 하는지 말해줘."
"나 그런데 있잖아..."
또 지후가 찾아왔다 사라진 어느 비오는 밤, 세영은 지후가 묻힌 묘지로 갔다. 무덤을 팠다. 손으로 판다. 아직도 빼지 않고 있던 지후와의 약혼반지와 손가락 사이에 흙이 박혔지만, 계속 팠다. 손에서 피가 났지만 계속 팠다. 드디어 관을 발견한 세영은 지후의 관을 열었다. 5년 전에 죽은 사람이라고는 믿어 지지 않을 만한 모습 그대로였다. 오히려, 관은 썪어 문드러졌지만, 지후의 모습은 그날 그 모습 그대로였다. 세영은 관 안에 지후의 옆에 누웠다. 그를 꽉 껴안고, 눈을 감았다. 그리고는 나지막하게 말했다. "나 너무 무서워. 하지만 이젠 말해줘."
'나 그런데 있잖아...'
'사랑한다고.'
'너 없으면 안 된다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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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경사가 폴리스라인 아래로 허리를 굽혀 몸을 넣었고, 관 안의 모습을 봤다.
김경사는 놀라서 박순경을 쳐다보기만 했고, 말을 하지 못했다. 박순경은 작게 한숨을 쉬며 말했다.
"사인 안 궁금하세요?"
"그래, 사인이 뭔데?"
"그게 이상한데요. 남자는 2012년에 놀이공원 롤러코스터 탈선 사고 있잖아요. 기억나시죠? 뉴스에 많이 나왔잖아요. 그때 죽었어요."
아직도 살아 있는 것 같은 모습을 한 두 남녀를 보고 김경사가 말했다.
"그럴리가..."
잠시 놀랐던 김경사가 물었다.
"그럼 여자는?"
그때 경찰차 한 대가 옆에 정차하고 경찰 한 명이 내려서 박순경에게 뛰어와서는 서류를 건냈다. 박순경은 열어 보더니 잠시 머뭇거리다가 말했다...
"말도 안돼..."
박순경은 말을 멈추고 서류를 김경사에게 주고는 관쪽으로 들어가서 남자 시신의 손을 가리켰다.
"여기 손에 피 묻은거 보이시죠? 남자 손톱 끝에... 거기 보시면 이게 이 여자 피라네요." 박순경은 김경사가 들고 있는 서류를 가리키며 말했다. "거기 보시면..."
김경사도 읽어보고는 이해를 하지 못하겠다는 표정을 지었다. 박순경이 말을 이어갔다.
"그런데요, 더 이상한건... 없어요..."
"뭐가 없다는거야?
"심장이요."
"누가? 남자가, 아니면 여자가? 남자는 그때 심장 없어졌다고 뉴스에 나오지 않았나?"
박순경이 말했다.
"둘 다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