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5년 국립민속박물관에 전시되었던 풍산류씨 집안 유물전을 보면서 눈에 띄었던 것이 1564년 갑자년 사마방목록이었다.
당시 휴대폰 배터리가 다 되어서 사진을 촬영하지 못한 것이 아쉬워진다.
풍산류씨 서애 류성룡은 1564년 사마시에서 3등으로 급제하여 성균관진사가 되었고 그 2년 후에 별시문과를 통해 괸직에 출사하게 된다.
1564년 사마시에 참여한 인물들을 보면 그야말로 역대급 올스타전이었다.
당대의 기라성같은 인물들의 응시를 보면 어마어마하다.
1564년 사마시에서 1등을 차지한 인물이 바로 아홉번에 걸쳐서 과거에 장원을 차지한
구도장원공九度壯元公이자 조선중기 최고의 석학이었던 율곡이이였다.
2등은 부여서씨 만죽헌 서익(徐益:1542~1587)이란 인물이다.
부여서씨 가문은 그 시조가 백제 마지막왕 의자왕의 아들 부여융인데 부여융이 당나라에 항복한 후 당나라에 의해 서씨가 되었다고 한다.
서익은 충무공 이순신을 싫어하기로 유명하다.
1579년 이순신이 훈련원 봉사(종8품)로 재직할 당시 군의 인사행정을 담당했었는데 이 때 서익이
이순신에게 자신의 친척을 훈련원 참군(정7품)으로 승진시켜 달라는 청탁을 해오게 된다.
이순신은 청탁을 거절을 하였고 3년 후인 1582년 1월 이순신이 발포수군만호로 봉직하던 당시
서익이 군기경차관으로 와서 군기가 보수되지 않았다는 이유로 이순신을 무고하였다.
그래서 이순신은 생애 첫번째 파직을 당하게 된다.
서익은 그 후 안동부사, 의주목사 등을 지내고 46세의 나이로 사망한다.
그의 서얼 서양갑은 아버지 서익을 닮아 재능은 좋았으나 서얼의 신분때문에 관리로 등용되지 못했던 인물이다.
그는 다른 서얼출신들인 박양갑 등 6명과 함께 스스로 강변칠우라 칭하고 탈선하여 산적질을 하기도 했다.
조령에서 은을 취급하던 상인을 죽여 700냥 정도를 탈취하다가 관군에게 체포당하게 된다.
이것이 칠서七庶사건인데 대북파는 이 사건을 계축옥사로 발전시키고 인목대비의 아버지 김제남과
인목대비 소생 영창대군이 죽게 되는 계기가 된다.
이 서익의 뒤를 이어 3등을 차지한 이가 바로 서애 류성룡이다.
그리고 그 뒤에 줄줄이 기라성 같은 인물들...즉 흔히 아는 역사적 인물들이 이 사마시에 대거 합격하였다.
종척대신으로 임진왜란 당시 류성룡과 함께 국난을 평정하는데 힘썼던 오리 이원익 대감.
동서분당을 일으켜 서인이 되어 붕당정치를 열었던 외척출신 심의겸의 동생 심충겸.
심의겸에 맞서 동인의 영수가 되었던 성암 김효원.
임진왜란 당시 형조판서를 지낸 평산신씨 신점.
서애류성룡의 절친이자 임진왜란 당시 경상우도 관찰사로 진주성을 사수했던 김성일.
류성룡, 김성일과 함께 퇴계 이황의 제자이면서 이순신이 정유년 이후 백의종군을 하던 당시
구명운동을 벌였던 백암 김늑.
임진왜란때 한성판윤과 염철사, 진휼사를 지내면서 백성들을 구제하는데 힘썼던 퇴촌 홍진.
조선팔대문장가의 한사람이면서 시인이었던 옥봉 백광훈.
율곡 이이역시 조선팔대문장가 중 한 사람이므로 이 사마시에는 팔대문장가 2명이 응시한 셈이다.
쟁쟁한 인물들이 대거 응시했던 사마시는 아마 1564년 갑자 사마시가 유일하듯 싶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