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릴적 기억 속의 어머니는 책을 즐겨 읽으셨다. 불안정한 살림으로 이리저리 이사를 다닐 때면 잔뜩 쌓여있는 책을 몇 권씩 집어 나르는 게 초등학생이었던 나의 역할이었다. 어려품한 기억에 어머니를 떠올리면 가지런히 정리된 서가가 함께 떠오른다. 혼불, 태백산맥, 장길산, 토지 같은 장편소설들이 유독 많았다. 책이 숱하게 많은 이유 보다는 숱하게 많은 사실 그 자체에만 관심이 갔다. 머리가 조금 큰 뒤에는 어머니는 어찌 저리 많은 책을 모았을까? 하는 궁금증이 일었지만 그때는 이미 어머니와 책들이 떠난 후였다. 여린 체구만큼이나 마음도 여렸던 어머니는 불행에 힘겨워하다 병을 얻어 영영 떠났다. 유품을 정리하며 그 많던 책들도 함께 떠났다. 나는 커가며 어머니를 늘상 그리워했다. 때문에 어머니에 대한 애정과 그리움의 투영으로 좋아하지도 않는 책을 멀리 두지도 않았다. 삶이 팍팍해서 어미의 정이 필요할 때면 책에 기대 숨을 달랬다. 그러다 보니 뒤늦게 어머니가 그 많은 책을 곁에 둔 이유를 어렴풋이 짐작할 수 있었다. 아마도 어머니는 외로운 사람이었다. 책에 기대 버거운 삶을 버틴 여인이었다. 그런 여인이 떠난지가 올해로 20년이다. 문득 떠올리니 어머니의 산소에 수국을 놓고 온 적은 있지만 그토록 좋아하던 책을 두고 온 적은 없다. 다가오는 기일에는 책을 몇 권 두고 올 생각이다. 두고 간 자식 걱정은 잊고 한동안 책에 빠져 편하시길 바란다. 길고 재밌는 소설을 몇 권 살펴봐야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