귀신 없는 방
‘침대, 책상, 옷장, 서랍장, 인터넷, 전자렌지, 비데 있음.’
조건이 좋은 방이었다. 마지막 한줄만 빼면.
‘20xx년 10월. 자살자 1명 있음.’
불과 1년 전이다. 1년이면 귀신이 나타날지 안 나타날지 모르지만, 문제는 과연 그 자살자 이전에는 자살자가 없었느냐 하는 것이다. 법규에는 ‘모든 임대주택은 해당 임대거주구 내에서 발생한 자살 내역을 밝혀야 한다.’고 했지, ‘모든’ 자살자라고는 하지 않았다. 1년 전 자살자는 귀신한테 홀려서 죽은 게 아니라 자기 스스로 죽은 거란 걸 어떻게 알 수 있겠는가.
그래도 넉넉치 못한 주머니 사정과, 수입이라곤 월급밖에 없는 처지에 이것저것 조건 따지기 어려운 게 현실. 그래도 혹시 모르니 주인에게 질문글을 남겼다.
‘입주 전 굿 해주시나요?’
TV 고발 프로그램에서 말하길, 굿을 하거나 안 하거나 귀신이 나타나는 확률은 변함이 없고, 한 번 나타난 귀신이 사라지지도 않는다고 했지만 그래도 사람 심리라는 건 무엇이든 기댈 곳을 찾기 마련이다. 굿이라도 하면 맘이라도 편해지겠지 했는데 주인의 답변이 빠르게 등록되었다. 실망이다. 굿을 한 적 없지만 이 방에서 자살자의 귀신이 나왔다는 말은 한 번도 없었다고 한다. 그래도 굳이 굿을 하려면 입주자가 비용을 부담해야 한다고 한다.
일단은 보류. 다른 방을 찾아본다. 검색 필터에 ‘무사고 인증’을 선택해 본다. 무사고 인증, 그러니까 3년 내 그 방에서 죽거나 해를 입은 사람이 없는 방이라는 게 인증된 방은 그렇지 않은 방보다 값이 더 비싸다.
이달 카드값과 대출금이 떠올랐다. 그걸 다 내고 이 가격의 월세까지 내면 다달이 적자다. 다시 조금 전 검색한 방으로 돌아갔다. 그래, 자살자가 한 명 있었다는 것만 제외하면 다른 조건이 만족스럽다. 특히 근방의 다른 방보다 저렴한 월세가 마음에 들었다. 굿이야 ‘집 주인이 해주었으면 좋겠다’였지, 크게 기대도 하지 않았다. 그래도 방을 한 번 보기는 해야지 싶어서 주인에게 연락하여 시간을 정했다.
방은 예상보다 넓고 쾌적했다. 나 혼자 살 건데 방이 8평은 되었고 화장실에는 샤워부스까지 딸려 있었다. 거기다 딸린 가구는 화장대, 화장거울, 옷장, 나무로 된 서랍장에다 밥을 먹을 수 있는 라운드 테이블에다 스툴까지 있었다. 벽지는 너무 튀지도 않고 그렇다고 후지지도 않고 무난한 디자인이었지만 누렇게 뜬 부분 같은 게 하나도 없는 것이 새로 도배를 한 지 얼마 되지 않았다. 건물에 엘리베이터도 있고 방범 장치도 도어락이 되어 있다.
이런 방이 정말 그 가격이란 말이야? 누가 죽었건 말건, 반드시 이 방을 잡아야 한다고 마음 깊은 곳에서 외쳤다. 하지만 모름지기 계약이란 안달 난 쪽이 손해인 법이다. 난 일부러 미적미적 거리면서 계약할 거냐는 주인의 물음에는 딴청을 부렸다. 그러다 전에 자살했던 사람이 어떻게 죽었느냐고 물으니, 이번에는 주인이 얼버무리다가 마침내 답을 주었다.
‘젊은 여자인데 실연을 당했나 봐요. 난 그 일 있고 나서 여기 인수한 거라 자세히는 모르지만…’
놀라는 척하며 굿 비용에 대해 물으니 마지못해 자기 쪽으로 비용을 입금하면 나중에 환급해서 돌려준다고 한단다. 냉큼 계약서에다 사인을 했다. 환급 받은 비용은 1년 지나서 돌려받겠지만 공으로 날리는 것보단 훨씬 낫다. 내친 김에 이사 날짜도 바로 잡았다.
짐을 옮기고 채 다 풀지도 못한 채 침대에 누웠다. 그제야 굿하는 걸 잊었다는 게 떠올랐다.
불이 꺼진 천장을 바라보자 희끗희끗한 무언가 눈에 들어왔다. 귀신이었다.
나이는 26, 27살 정도 되었을까. 머리카락이 긴 여자 귀신이 천장에서 나를 똑바로 내려다보고 있었다. 죽기 전에 입었던 옷인지 초록색 스트라이프 원피스를 입은 채였다. 눈동자는 찻잔 접시만큼 크고 피부는 회색인 것이 전형적인 여자 귀신의 모습이었다. 계속 쳐다보고 있으려니 뭔가 차가운 것이 뚝뚝 하고 떨어졌다. 물인 줄 알았는데 녹슨 쇠냄새가 났다. 여자 귀신이 점점 침대로 내려왔다. 그제야 여자 귀신의 손목이 보였다. 어찌나 지독하게 파헤쳤는지 손목 한쪽이 아예 떨어질 것 같았다. 손목에서 흐르는 피가 여자 귀신의 팔뚝을 타고 목덜미로 흘러 턱선을 따라내리다 코끝에서 방울 맺히곤 내 위로 떨어졌다. 귀신과 눈이 마주친 나는 의식은 또렷하지만 몸은 꼼짝도 하지 못하고 떨어지는 피를 맞을 수밖에 도리가 없었다.
재수도 오질나게 없지. 첫 날부터 귀신이라니. 내일 당장 무당을 불러 굿을 해야겠다 생각하고 눈을 꾹 감았다. 다음 날 아침, 여름도 아닌데 온 몸이 땀으로 축축하게 젖었다. 몽정은 안 한 거 보니 귀접은 없었나보다. 얼른 씻고 출근하여 일을 보는데 마침 월말 정산하는 기간이라 제령굿 견적 생각할 겨를도 없었다. 간신히 일을 마치고 집에 도착하고 나서야 굿을 안 했다는 게 떠올랐다. 하릴없이 천원 마트에 들러 그래도 가장 좋아보이는 향과 부적을 사다 향은 머리맡에다 피우고 부적을 천장에 바닥에 붙였다. 그래도 안심이 되지 않아 취침등을 켜놓고 잠자리에 들었는데, 아니나 다를까 불이 있건 말건 서늘한 느낌과 함께 여자 귀신이 다시 찾아왔다.
대체 무슨 한이 있어 자살했길래 매일 같이 나타나는 걸까. 가위눌린 채 움직이지도 못하는 상태에서 투덜거리는데 어제와 다른 여자귀신의 모습이 눈에 들어왔다. 취침등을 켜놓아서 그런가. 여자 귀신의 몸은 굴곡이 여느 여자들과 조금 다른, 그러니까 배쪽이 조금 나온 모양이었다. 그게 무엇을 뜻하는지 깨닫자 단번에 돈 걱정이 먼저 되었다. 여자 귀신만 굿하면 모르겠는데 그 뱃속에 있는 아기 몫까지 굿 하려면 돈이 두 배나 더 든다. 싸지른 놈한테 가서 화풀이 할 것이지 대체 왜 생전 면식도 없는 나한테 와서 이 난리를 부리느냐 말이다. 그런데 그러고보면 여자 귀신의 얼굴은, 학생 때 사귀다가 임신해서 헤어진 전 여친을 닮은 것 같았다. 그 여자는 지금 다른 남자랑 결혼해서 잘 살고 있지만… 영 상관없는 건 아니란 뜻인가.
그래도 그렇지, 첫날이랑 연속해서 이틀째 귀신이 나올 줄이야. 돈이 조금 들어도, 오늘은 꼭 제령굿 서비스 업체에다 전화를 해야겠다. 그렇게 마음 먹고 출근하여 업무를 보다가, 집 근처의 업체에다 전화를 걸어 견적을 받았다.
세상에, 죽은 귀신 없애자고 산 사람 장기 내다팔 일 있나. 가장 기본인 베이직 코스 굿만 해도 무려 내 석 달치 월급이다. 장기할부가 되지만 그 돈이면 무사고 인증된 방의 월세가 그대로 나간다. 가격도 합리적이고 시설도 괜찮은 좋은 방이지만 매일 귀신이 나오면 정신적 스트레스 때문에 나도 따라서 자살할지도 모르는 일이다. 어쩔 수 없이 주인에게 사정을 얘기하고, 계약금을 빼달라고 했다. 그러자 집주인은 조금 망설이는 듯 하면서도 한 가지 제안을 했다.
‘귀신 없는 방이라고 후기에 써주면 계약금 돌려줄게요. 이번 달 월세는 빼고요.’
마다할 이유가 뭔가. 그러고마 하고 나는 당장 다른 방을 찾기 시작했다. 이번에는 조금 비싸도, 꼭 귀신 없는 방으로 구해야 겠다 다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