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쉬운 남자
게시물ID : wedlock_9318짧은주소 복사하기
작성자 : 허니순살치킨
추천 : 5
조회수 : 1230회
댓글수 : 1개
등록시간 : 2017/07/19 02:58:0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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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과는 달리 다소 다른 내용으로 글을 시작하자면..

나는 네츄럴 본 저녁형 인간이다.

태어난지 100일이 안되었을 때부터 밤에 잠을 자지 않고 낮엔 오직 엄마 등 위에서만 잠을 자서 엄마의 육아 강도를 헬 수준으로 높였고
유치원 때는 다른 아이들이 다 보는 일요일 아침 만화나 아침 어린이 대상 프로그램이니 하는 것을 한번도 본 적이 없다.
초등학교때부터는 단골 지각생이었다.

오전 4시 새벽기도로 하루를 시작하는 네츄럴 본 아침형 인간인 엄마는 오전 4시에 비로소 하루 일과를 마치고 잠드는 내가 이해되지 않았고, 어릴때는 내가 딸이 아니라 당신을 괴롭히는 밤의 화신인 악마 같았으며, 끊임 없는 기도의 결과 마침내 내가 10살 즈음에는 당신이 낳은 것이 단지 게으른 인간일 뿐이라는 결론을 내리고 더 이상 고민하는 것을 멈추었다. 단지 저녁형 인간일 뿐인데.

엄마와의 다툼이랄까 의견 충돌, 아니 일방적인 잔소리 세례가 가득한 고등학교 시절을 지나, 엄마는 내가 대학가던 해에 딱 너같은 딸 낳아 고생해봐라라고 (엄마 생각엔) 저주를 내리며 이제 다시는 내 생활 패턴에 신경쓰지 않겠노라고 선언하였고 나는 딱 나(엄마) 같은 딸 낳아보라고 했으면 무지 우울했을텐데 너같은 딸을 낳으라고 하기에 이상한 덕담이네 하면서 땡큐베리머치를 외치고 알아서 살기로 했다. 

대학은 천국이었다. 시간표는 거의 내 마음대로였으며 아무도 아침 일찍 학교에 나오라는 말을 하지 않았다. 나는 야간 대학생 1호(2호와 3호가 절친이다)라는 별명을 얻어가며 느즈막히 등교했고 대학에 와서 비로소 커밍아웃을 시작한 수 많은 동지 저녁형 인간들과 함께 밤을 세워가며 술을 마시면서 무사히 졸업을 했다.
직장은 출근이 비교적 늦거나 자유로운 회사만을 골라다녀야했기에 다소 불편한 점들을 감수하며 경력을 쌓아야했지만 그래도 꽤 자유로운 저녁형 인간의 삶을 살 수 있었다. 지금도 아침 10시 미팅이라도 잡히는 날엔 왜 새벽(!)부터 사람을 못살게구는걸까 하며 좀비 상태로 미팅에 임하게 되고 이젠 거래처도 알아서 오후 약속을 잡는 래디컬 네츄럴 본 저녁형 인간.(살면서 하나의 수식어가 더 붙게됨)

이런 나이기에 당연히 아침엔 시체이거나 좀비이거나 억지로 잠에서 깬 헐크이거나 아니면 동시에 그 모두이거나.
20대의 내 연애들은 아침에 출근 잘 하라는 연락을 하냐 마냐, 나중에 결혼하면 아침밥을 얻어 먹을 수 있냐 없냐, 출퇴근을 같이 할 수 있냐 없냐, 오후 4시에 일어나 첫끼를 먹다니 넌 평생이 라마단 기간이냐 따위의 비난으로 어그러지기 쉽상이었고 나는 다시는 아침형 인간과는 만나지 않겠다는 결심을 하기에 이르렀다. 그들은 우리 엄마처럼 나를 이해할 수 없었고, 아침해가 멀쩡히 떠 있는데도 침대에 누워있는 내가 천하에 몹쓸 게으름뱅이로 보였으며, 무엇보다 아침형이 되면 더 좋은 직장에 갈 수 있는데도 저녁형 인간을 고수하는 나를 야망도 미래도 없는 멍청이 취급을 하기 일쑤였다.(뭐 이건 나름 맞을 지도.. 야망따위..췟)  

남편은 네츄럴 본 정도는 아니고. 그래도 다행히 꽤나 경도된 저녁형 인간이라고 칠 정도(10시에 일어나냐 10시반에 일어나냐 정도의 차이지만)는 되기에 우리 부부는 이 문제로 별로 다툼이 없다. 둘 다 억지로 좀비 상태로 일어나 출근 버스에 몸을 실어 큰 돈을 벌어야 겠다는 야망도 없다. 다툼이 없다기 보다는 적극적인 합의만이 존재한다고 하는 편이 맞겠다. 그간 그래 왔고 앞으로도 그럴거라 생각했는데 오늘 아침. 일이 있어서 둘다 8시에 일어나는 대 기적을 행한 후 함께 샤워를 하고 나오면서 남편이 다소 의아한 말을 했다.

" 아무래도 아침형 인간이 되어야겠어"
" 주어는 누구야? 우리 둘다? 나? 아님 당신?"
" 난 지금도 아침형 인간이니까.(여기서 1차 어이상실) 당신이 아침형 인간이 되는게 맞겠지(여기선 멘붕)"
" 흐응...."

새벽 4시에 잠들어 10시 반에 일어나는 것도 힘겨워하는데다 문명의 힘으로 8시에 일어나는 기적을 겨우 행하게 된 주제에 지.금.도. 아침형 인간이라고 스스로를 정의하는 것도 어이없는 일이지만 남편이 내 생활 패턴에 참견을 시작하는 건 더더욱 이상한 일이다.(이제껏 한번도 없었던)
나는 머리를 말리면서 남편을 흘끗흘끗 쳐다보았다. 어떤 옷을 입을까 내게 묻는 남편은 방금 한 말 따윈 잊은 듯 아무렇지도 않다. 나는 두뇌를 풀가동해서 그 원인을 탐색하기 시작했다. 왜냐고 물으면 되지만 우리 부부는 왜라는 질문을 어지간해서는 하지 않는다. 왜냐고 물으면 대답하는 게 인지상정이기에 꼭 대답을 해야 할 것 만 같고, 그렇게 대답을 하게 되면 뭔가 대화의 함축성이랄까 맛이 떨어지는 것 같아서. 우리 부부에게 있어 대화는 서로의 마음속을, 사고 패턴을 얼마나 읽어내는지 일종의 대결인 셈이다.(대부분 내가 일방적으로 이기지만)

그러니까....

아.... 

그러니까 남편은...

나는 깨달음이 와서 단호하게 즉답했다.

"아침형 인간이 된다고 해서 매일 모닝 섹스를 하게 될거라는 기대는 하지마."
"에에에에? 그런거야?"

남편은 오랜만에 일찍 일어났고, 그 김에 단지 모닝섹스가 하고 싶었던 것이었다.

그렇게 오늘 아침. 한 명의 저녁형 인간이 아침형 인간이 될 뻔 했다. 아니. 엉뚱한 야망에 아침형 인간이 되고 싶었다.
그리고 남편은 다소 미련이 있는 듯 하다.

"아까운걸.. 새벽이 컨디션이 좋은데..."

남편은 정말이지 쉬운 남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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