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왜구의 만행과 잔인성
게시물ID : history_28516짧은주소 복사하기
작성자 : 마루짜응
추천 : 16
조회수 : 3241회
댓글수 : 4개
등록시간 : 2017/07/12 07:13:58



신라~조선 초기 왜구들의 침입
현대에 왜구들은 팬티만입고 칼을찬 소규모 해적집단으로 알려져있다.
하지만 당시 그 규모는 함선 1만척,한 집단에 6천~1만명 규모의
완전무장.기마까지 갖춘 정예 편제도 체계의 군대이다.
삽화을 보면 팬티만 입고있는건 사실이지만
그건 평상시 일상 모습이고 전투시에는 갑옷을 정식으로 갖췄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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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려기록에 따르면 왜구와의 근접 전투에서 고려군은 연이어 패하자
최무선이 화약무기인 주화를 개발하는 계기가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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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로인해 1380년 8월 전라북도 군산 앞바다서 
왜구 전함 500여 척에 맞서 고려 군함 100여 척으로 대승을 이루며
왜구 500여척을 섬멸하고 진포(군산)대첩 이룬 기록이 있다.

또한 고려 말 40년간은 피해가 너무 커서 멸말의 한 요인까지 된다
한반도 뿐만아니라 동아시아 상대로한 범죄집단이기 때문에
동아시아 정세에 큰 영향을 끼쳐 중국,고려,초기조선이 해양권을 포기하게되는 한 요인이기도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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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고 왜구 주제에서 대마도를 빼먹으면 안된다.
대마도는 한국인들도 우리땅이네 아니네 논란이 많지만
왜구한테 강제 점거 당해 임진왜란 후에 완전히 빼앗기게 되는 우리나라 땅이 맞다
간혹 어떤이는 조선시대때 대마도는 독립적인 소국이며 조선의 관직도 받고 일본의 다이묘도 하며 
이리 붙었다 저리 붙었다 했다는 주장이 있지만.
그럼 그 이전 시대까지 설명해야하므로 시기가 적절하지않다.
또한 조선과 일본은 서로 교역과 외교을 하고 있었으므로 서로 몰랐을 일이 없다는 점이다.
 
또한 현대에 이르러 이를 조사하려 학자들은 대마도에 파견했지만 
일본정부에서는 대마도에 있은 한국 관련 자료와.비석들을 
내륙 박물관으로 옮겨 한국측에 공개을 거부했다고 한다

대마도가 한국땅임을 입증할 자료
16세기 도요토미 히데요시의 구기지도 대마도 조선영토 표기
18세기 일본에서 만든 조선국도 대마도 조선영토로 표기
고려시대 제작한 가장 오래된 지도 혼일강리역대국도지도 대마도 고려땅 표기
조선초기 신증동국여지승람 대마도 조선영토 표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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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786년 일본인 하야시 시헤이가 제작한 '삼국점양지도'로
당시 사용됬던 프랑스어판이다. 
현대에 일본이 가지고있는 삼국점양지도는
대마도가 일본땅인 녹색으로 표시되어 있는데
한국역사학자들에게 프랑스어판이 알려지게 되면서
일본 삼국점양지도는 조작위혹을 받고있다 
이 지도는 당시 미국과 영국,프랑스,독일이 함께 국제 공인한 지도이며
그 후 일본이 각국과 조약을 맺을 때마다 국가공식지도로 사용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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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랑스 원본)왼쪽 (일본 변재품)오른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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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본을 개항시킨 미국 페리제독의 자서전에 나온 대마도 지도(1866년)

일본 정부 대마도가 한국 땅임을 인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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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도가 일본땅임을 증명하러 일본 외무성 보도관은 조선의 지도인 '팔도총도'을 가져온다
일본 외무성 보도관이 일본 지도가 아니라 조선의 지도를 들고 나온 까닭이있다
1530년 일본은 ‘팔도총도’같은 지도를 만들 능력이 없었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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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본 외무성이 기자회견 당시 독도를 일본땅임을 입증하러 가져온
'팔도총도'에 대마도가 조선영토로 그려져 있다

또한 고려시대 편찬된 삼국사기의 영락대제기를 보면
왜가 신라의 대마도를 침공하였다는 기록이 있다
"실성제 시절에 왜는 자주 신라를 침공하였다.
실성제 7년에도 왜가 대마도를 침공하여 장악하고 신라본토를 공략하려하자
미사품이 [손자병법] 허실편에 나오는 구절을 들먹이며 이를 말렸던 것이다."라고 기록된다.

신라~조선초기 왜구의 만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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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라시대에 왜구의 침입은 뻔질나게 이루어 졌고
조선왕조실록에는 왜구 침입 기사가 312건이나 나온다.
그 중 가장 극심한 피해는 고려.조선초기이며 
고려 기록에 따르면 
150년간 걸쳐 10년에 4~5번꼴로 거국적인 침입을 일삼았다고 나온다.
이떄 경사도는 거의 함락된 적도 있고 
강화도가 싸그리 날라간 적도 있다고 나온다
"왜구는 타고 온 배를 밧줄로 단단히 묶어놓고 상륙해 충청·전라·경상 3도 연안의 주(州)·군(郡)을 약탈·방화·살육하였다. 
이 때 시체가 산야를 덮고, 그들이 운반 중에 흘린 쌀이 길 위에 한자나 깔릴 지경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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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로인해 최무선의 남해대첩 또한 이성계 부산 황산대첩을 이룬 뒤 기세로몰아
왜군의 해적기지화 되버린 대마도를 박위장군이 1만 고려군을 이끌고 대모도 정벌에 나서지만 패하고
조선떄는 이종무가 대마도 정벌을 나서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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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후 도요토미 히데요시의 침략의 야욕으로 왜구을 군에 편승하기위해
해적금지령을 내려 왜구의 칩입은 한동안 잠잠해지지만
일방적 전쟁준비로 선전포고도없이 비열하게 조선을 침략하여 
학살-방화-파괴-납치로 밖에 설명이 안되는 7년의 전쟁인 임진왜란이 발발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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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시 일본 유학생과 전문가들은 "조선은 백성의 불만이 넘쳐나고 친일파가 넘쳐나니
전쟁을 수행하면 알아서 반란이 일어나 정복하기 수월할것이다"라고 주장했는데 
정작 나라를 지킨것은 애국심으로 똘똘 뭉친 백성들과 의병들이여서  
일본의 왜곡된 시선과 자만으로 인해 벌어진 살육현장이 되버리고
개인적인 생각으론 일본이 저질렀던 만행의 특성상 
적이 그런 치열한 항전을 할경우 당시 일본군이 얼마나 더러운짓을 했을시 상상이 될 뿐이다.

그 당시 일본군은 조선의 전략,전술체계을 이미 모두 파악하고 있었고
선조을 잡으면 끝일 것이란 생각을 가지고 있었다
또한 조선은 동원체제이니 1선에서 막고있는동안
2선에서 병력이 집결한다는 사실 또한 잘 알고있어
조선의 1선과 2선을 동시에 공격해 집결을 무력화하고 각개격파하는 상황이 벌어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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더군다나 조선군은 전쟁경험 또한 없어서 일본군과 근접에서 상대가 되지 않았으며
대규모군이 집결하여 맞붙어도 동요되어 도망가다 아군에게 밟혀 죽은 사람이 더 많았다고 한다.
결국 몇일만에 한반도의 많은 지역이 일본군 수중에 떨어 졌으며
미쳐 대처하지 못했던 많은 동원 대상자 조선인들은 싸우지도 못하고 일본군에 학살 됬을 것이라 추정된다.

일본군의 만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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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순신 장군의 회고록 
일본군은 너무 백성들을 학살하였다
섬에 정박중이던 왜군들이 백성을 학살할까 두려워 공격명령을 하지않았다
일본군은 이성을 상실한채 죽은자의 시체까지도 난도질을하며 시체유린까지 하였다.
일본군이 지나온곳은 모든게 사라지고 남는것은 불길뿐이였다. 
굶주림에 지친 백성들은 썩은 시체까지 먹기시작했다
시체의 젖을 빠는 아기의 울음소리가 넘쳐나고 가는곳마다 피비린내가 진동을 한다.
귀와 코가없는 백성들의 시체는 성벽을 이룰정도이며 산천이 피바다라고 기록되어있다
일본 측 기록에선 부산진성이 함락되자 여자를 비롯 아이들과 개,고양이 할 것 없이
피를 흘릴 수 있는 것은 모두 살해하였다는 기록도 남아있다.
또한 임진왜란 후의 인구는 평상시의 6분의 1도 안되는 극심한 희생을당했다고 기록된다.

당시 시대적 상황도 일본군이 점령한 지역은 땅이 척박하여 식량 난으로 허덕였고
일본군 보급은 일본땅에서 조선땅으로 해상으로 수송되기 떄문에
점령지의 식량 난은 최고조에 달하였을 것으로 추정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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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본군이 그 당시 얼마나 굶주리고 있었는가 하면 
많은 일본군 장수들이 집으로 돌아가 
너무 배고픔에 굶주린 기억때문에 
유사시 식량으로 삼을 '고구마 줄기 다다미'를 집에 깔았다는 전설도 전해진다.

15세기 임진왜란 당시 동래성 조선인의 원한이 현대인들에게 알려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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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산 동래읍성 해자에서 최소 81개체~최대 114개체 유골이 출토되었다
10~40대 남녀는 물론 5세 미만인 유아까지 살해된 것으로 보인다.

고인골 전문가인 김재현 동아대 교수는 2005년 5월~2008년 1월까지 경남문화재연구원이
조사한 부산 동래읍성 해자에서 출토된 인골을 분석한 결과 1592년 4월 15일 임진왜란
개전 당시의 비참했던 동래성 전투상황을 알려주는 사실들을 속속 밝혀냈다고 19일 말했다.

조사 결과 (남자 59개체 ,여자 21개체,유아 1개체)이다.
모두 잔인하게 죽은 상흔이 있으며 
이번에 분석대상이 된 두개골 상흔은
(칼에베인 상흔 4개체,총이나 활을 맞은 상흔 2개체,둔기에 위한 두개골 함몰 2개체 등) 
충격을 전해 주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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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탄에 맞아 희생된 것으로 보이는 5살 미만의 유아의 인골.
왜병은 어린이와 여성 등 힘 없는 백성들까지 죽여 해자에 무더기로 내던졌다.

20대 여성 사인은 심상치 않은 추측을 불러일으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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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 교수는 "왜병은 이 여인의 전두부(머리 앞),두정부(머리 위쪽) 두번이나 칼로 내리쳤으며
특히 전두부는 예리한 칼로 완전히 잘렸다"고 말했다.

또한 김교수는 "전투 중에 칼을 휘두르면 얼굴 양쪽에 상흔이 남을 가능성이 크지만 
이 20대 여인의 경우 전두부와 두정부를 잘렸는데 이는 왜병이 여인를 끓어 앉혀놓거나
고개를 숙이게 한다음 칼로 두차례 내리쳤을 가능성도 있다"라고 말한다.

김교수는 "이밖에도 상흔이 반듯하지 않은 인골과 두개골이 함몰된 인골 등도 확인된다"면서
"이는 칼 이외에 다른 도구로 무참하게 살해되었음을 뜻한다"고 전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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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래성 전투는 왜장 고니시 유키나가가 이끈 일본군이 1592년 4월 15일 동래부사 송상현이
지킨 동래성을 공격하면서 시작되었다.
송상현은 "죽더라도 절대 길을 내줄 수 없다"면서 버텼지만 그만 순절했고,함락되고 만다.

-임신동래유사-
"성은 협소하고 사람은 많은데 적병 수만이 일시에 다투어 들어오니 성중은 메워져 움직일 수 없을 정도였다"
이런 대혼란에서 조선군병사는 물론 백성들도 "막대기와 괭이,낫,도끼,칼 등을 들고 백병전을 벌였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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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제 시대 

일본군에게 사망한 아시아인
미 국립문서기록보존서 - 2천 5백만 사망 추정.

조선의 인적 피해
미 국립문서기록보존서 -조선인 사망자 총계 530만명 추산
한국 일본 공동 조사 - 총 300~400만 (군대,일반,위안부)징병291만명 사망 추산

조선인 생체실험 - 277명 사망
제암리학살 - 29명 사망
훈춘에 한인학살 - 3만명 사망
간도 한인학살 - 1만명 사망
관동 대진진 학살 - 1만명 추정 사망
맹산학살 - 60명 사망
대구학살 - 115명 사망
합천학살 - 42명 사망
남원학살 - 11명 사망
이리장난학살 - 10명 사망
미즈호학살 - 27명 사망
강서학살 - 9명 사망
사천학살 - 73명 사망
정주학살 - 120명 사망
밀약 학살 -150명 사망
화수리학살 - 수십명 추정
해삼위학살 - 추정불가 한인학교.한민회관,그밖에 민가 학살
강계학살 - 4명 사망
강서학살 - 46명 사망
니이카타현학살 - 100명 추정 사망 등등...

제암리 학살 사건 - 일본군경들이 강제로 예배당에 마을사람들을 가두고 불을 지르는 것으로도 모자라 
용캐 탈출하려는 몇몇 사람들을 젖먹이까지 총칼로 찔러 학살하였다.

북해도 탄광 강제 징용자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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징용된 사람의 증언 "몇일간 굶어서 죽을 지경이였는데 자기 동료가 죽으면 다음날 고기가 나왔다"

조선인 동물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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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07년 3월 일본에서 열린 '도쿄권업박람회' 조선인 전시

인종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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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제시대 일본학자들의 조선인 두개골을 수집

일제 강점 초기 인종론 - 일본인은 우수하고 한국인은 열등하다는것을 학문적으로 입증하고
강제병합을 정당화 하기 위해 시작
천민,백정,무녀등의 사회 최하층 계급의 조선인들을 앞세워,봐라 조선인은 이런 열등한 민족이다.
그러니 그런 조선인들을 우리 우월한 일본이 돌봐주어야 한다.그해줘야 한다.그게 거룩한 행동이다 주장.

일제 강점 후기 인종론 - 3.1운동 등으로 식민지배에 대한 격한 반발이 일어나자 내선일체,황국 신민 등을 주장
한국과 일본은 인종적으로 부모 형제간이다.
원래는 같은 민족이다
고로 하나의 나라가 되는것이 당연하다
내선일체,조선과 일본이 하나의 나라란걸 인류학적,유전학적으로 증명하려고 생체조사.
일본은 한국인을 보다 편리하게 이용하고 지배하기 위해 조선 인종 연구를 시작.
조선인들의 표본을 채집하고 유골을 불법으로 도굴 또는 수집하기 시작했다.

식민사관에 대한 반박
신분제페지 
형식상 갑오개혁때 신분제 페지조건이 걸려있었다고하나.
신분제 페지는 정확히 언제 사라졌는지 모른다.
왜냐하면 역사적으론 오히려 일본이 그 구조를 이용해 먹었기 때문이다. 
조선 식민화을 수월하게 관리하기 위하여 일제 통치에 협력하는 
친일 양반은 그 댓가로 기득권을 받았고 
사회적 통념으로는 자기 신분대신 직업을 썻다고는 하지만
양반의 토대가 견재하였기 때문에 
천민은 천민 양반은 양반으로 지내는것이 없어지지 않았던 시대이다.
따라서 백성들은 친일파에게 움직여지는 제국주위의 노예나 다름없었다.

인구가 늘었다?
확실히 일제가 조선을 강점한 이후 인구가 증가하고 수명이 늘어난 것은 사실이다. 
하지만 이것은 일제와는 전혀 무관한 것이고 우연히 시기가 맞아떨어졌을 뿐이다.
1876년 강화도 조약 이후 조선은 서양에 문호를 개방하여
이후 조선은 근대화의 길을 걷게 되고. 이때 들어온 문물들이 인구의 증가를 가져왔기 때문이다..
서양의 선교사들이 와서 의술을 편 덕택에 수명도 증가하게 되고,
영아 사망률도 줄어들었으니 인구는 늘게 된다 
그러니 일제가 없다 하더라도 조선은 독자적으로 외래 문물을 받아들여 인구를 증가시켰을 것이다.
그렇다고 외래 문물의 영향만은 아니다.
이미 조선 중기 이후 농민들은 이앙법(모내기)을 비롯하여 농업생산력을 증대시켜 왔고
농업생산력이 증대되었다는 말은 식량이 부족하지 않고 잉여 생산물이 늘어났다는 말이다.
식량이 부족하지 않으니 굶어죽는 사람은 줄어드게 되고 잉여생산물이 늘어났으니 상업이나 공업이 발달하게 된다.
실제로 조선 후기에 문호를 개방하기 이전에도 조선의 인구를 꾸준히 늘어나고 있었다.
그리고 상업을 비롯한 산업들도 발달을 막 하려고 하고 있었던 시기다.
다시 말하자면, 일제가 억지로 문호를 개방하지 않아도 조선 스스로 근대화로 나아가고 있었다는 말이며
일제로 인해 조선 스스로의 근대화는 좌절되고 외세에 의한 근대화가 진행됬다는 말이다.
한 예로 유럽의 1600~현재까지 인구변화 통계치을 봐도 1차대전과 2차대전을 치룬 이후에도  
인구는 근대화로인해 지속적으로증가한다. http://blog.naver.com/minjae217/220187751851
-누락된 인구 집계
조선시대때는 양반들도 조세를 내지 않기위해 노비와 첩을 줄여서 신고하거나, 호에 넣었고
하물며 평민들은 아예 호를 신고하지 않고 살아가는 사람들이 대부분이었고 
그결과 조선 후기때는 누락된 인구가 50%에 이르렀다.
이부분은 세계 인구를 통계, 연구하는 외국학자들이 직접 밝힌 부분이다.

조선시대보다 삶이 풍요로웠다?
백성들의 세금으로 걷어들인 국고는 일제에 넘어간 상태이며
일제는 회사령과 토지사업에 들어오게되는데 그당시 3.1 운동이 괜히 일어난게 아니다.
수탈과 횡포를 견디지 못한 백성들이 애국심으로 일어난 것이다.
무단통치가 문화통치로 바뀐시기에 일본내에서도 쌀문제로 인한 폭동이 일어나면서 
일본은 자국의 쌀을 채우기 위해 산미증식계획을 세우는데
농사는 조선인이 짓고 그 수익은 일본이 가져가는 정책이였다.
더군다나 농촌에 필요한 자금은 모조리 농부들이 감당해야했고
학생은 필요한 지식을 원할히 받을수 없었다.
일본은 더더욱 친일파를 양성하는데 온힘을 쏟아 붙고
미국의 대공황으로 시작된 일제의 경제수탈은 더욱 심해지고
황국 신민화 정책으로 조선은인은 완전한 억압에 처해지게 된다
우리말도 못하고 글도 못쓰고 내 이름으로 불리지도 못하고
아직도 해결되지 못한 위안부문제 또한 공출제와 식량 배급제등등
또한 중일전쟁으로 조선은 병참기지가 되었는데
그말의 속뜻은 한국 인적,물적자원을 무단으로 전쟁물자에 공급한다라는 뜻이다.
이로인해 한국의 금매장량 24톤 일본이 20톤으로 한국이 훨씬 많이 지녔지만 
한국의 금은 모두 일본에 채석되어 반출되게 된다.
더군다나 미국의 대일 철광석 수출을 전면금지하자 일본은 조선의 철광석을 대대적으로 자원싹쓸이에 나서게 되고
전쟁으로 수요가 늘어나면서 600만톤 이상의 철광석을 일본에 반출된다
그 밖에도 텅스텐.형석.몰리브덴.흑연,니켈,망간,납,아연,운모,석면,마그네슘 등
특수광물은 제조,도금,합금등을 채굴해 싹쓸이 수탈을 하고
일본 특수광물 총생산에서 흑연,운모,마그네사이트 등은 100% 조선에서 생산된 것이었으며
형석 95%, 텅스텐 88%, 몰리브덴 85%, 중정석 70%가 조선에서 생산된 것이다.
거기다 금속회수령을 내려 조선인이 가지고있는 금속물자들을 무단으로 전부 수탈해가고.
문화재는 물론이고 건물간판 생활에 필요한 모든 금속물들을 가져간다.
2년뒤에는 조선중요물자엄단령을 내려 국민들의 철 구리까지 모두 수탈한다.
거기다 일본인들은 조선이 재개하지 못하도록 수맥에 말뚝까지 박는 의식을 치뤘으며 
조선의 상징적 문화재들은 일제의 우선시대는 말살정책중 하나로
200여기가 넘는 왕릉이 파헤쳐지며 보물들을 약탈하고 
2천여기 넘는 고분을 도굴해 전부 일본박물관에 전리품으로 전시하게 된다.
데라우찌은 조선문물을 보전한다는 구실로 조선의 유적들을 허물고
400여기의 낙랑득 고분을 무단 도굴해간다
그외 유물은 일본박물관에 받쳐야하는 법령을 선포하고
이조실록,오대산본,일성록,승점원정기,의정부비변사등. 수만권에 달하는 국가서적을 약탈해가며
또한 길을내거나 건물을 만든다는 핑계로 
78개 이상의 문화유산 궁궐,기념비,산성,유적지에 불을 질렀고 하나하나 철거했으며
한국사의 역사을 날조하고 조작하였다.

일제시대 덕분에 현대가 발전하고 일본의 영향을 받았다?
이 말대로라면 북한,필리핀.베트남 같은 한때 일본식민지였던 나라들은 어떻게 설명할수 있는가?
일본이 우리나라를 식민지배할때 우리나라를 위해서 펼친 정책은 단하나도 없다.
일제가 지어놓은 기반시설들은 일제를 위해 지어진 것이고 더 빠르게 수탈하기위해 지어놓은 것이다.
식민지화가 계속되었다고 한다면 현재 우리 민족자체가 일제에 위해 말살되었을 것이다..
따라서 한국의 발전의 계기는 미국이 모든 틀을 마련해 주었으며 
한국 국민이 민주화 운동으로 스스로 쟁취하고 발전시킨것이다.
오히려 일본은 패망직후 모든것을 가져가 버렸다.

베트남전쟁.625 전범인 한국이 할말이 아니다?
한국은 역사적 사실들을 여러매체을 통해 교육받으며 국민적인 반성을 한다.
반면 일본은 역사적 만행을 은폐하며 국민적 무관심은 물론 반성도 하지 않으며
왜곡을 통해 날조와 영웅서사시로 날조해 신사참배을 한다.
그러므로 전혀 비교가 될수없다.



한국 일본 국민성 비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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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
역사적문제로 일본에 악감정을 가지고 있지만
일본인들에 대한 악감정은 가지고 있지 않고 
폭력적인 행동을 하지않는다.
오히려 한국 우익들은 친일파들이기도 하다.

일본
일본은 반한감정을 이용해 부추겨
최근에 지난 몇년동안 빈번히 발생하는 한국인 관광객들에 대한 테러와 욕설등을 일어나고있는데
이런걸 보면 일본 국민에의해 자행된 관동대지진 학살사건이 재연되는것 같다.


루스 베네딕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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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국 인류학자 루스 베네딕트는 ‘국화와 칼’에서 일본인 잔혹성의 실마리를 문화적 특징에서 찾았다. 

일본인에게 도덕적 의무란 지역적이고 제한적이어서 다른 곳에서는 쉽게 파괴된다는 것이다.
특히 천황을 제외한 모든 사람의 목숨, 자신의 목숨조차 가치없는 것이라고 교육받은 탓에 도덕적 테두리를 벗어난 지역에서는
거리낌없이 살인을 저지를 수 있다는 게 베네딕트의 분석이다

전차남(電車男)'이란 일본 영화가 있다. 영화 속 주인공은 사회에 잘 적응하지 못하는 '오타쿠'지만,
전차 안에서 부잣집 아가씨가 치한에게 희롱 당하는 모습을 보고 치한들에게 그만두라고 말한다. 이 장면은
일본에서 한동안 화제가 됐다. 이런 일은 일본 사회에서 일종의 간섭, 즉 '은혜를 입히는 행위'로서 암묵적으로
금지돼 있었기 때문이다. '전차남'은 그런 금기를 깼던 영화다. 일본 사회에서 다른 사람에게 은혜를 베푸는
행위는 '덕(德)'이 아니다. 그러나 어쩔 수 없이 은혜를 입었을 때 거기에 대한 '보은(報恩)'은 덕으로 간주된다.
은혜는 '보은'이 전제되기 때문에 그것을 베푸는 것도 신중해야 하는 것이 일본의 룰이다.

자연과 미를 아끼는 친절한 일본인과, 잔인하고 냉혈한 일본인이라는
양면성, 일본인의 이러한 이중적 감성은 집단 속에서 살아남으려는 생존의 본능과 맞닿아 있다

일본은 겉으로 국화처럼 평화로워 보이면서도 때가 되면 칼처럼 일어날 수 있다는 말이다

일본인들은 평상시에는 신중하지만
특수한 상황에 놓여지면 집단적 광기가 발휘, 국가 전체가 순식간에
180도 방향 전환할 수 있다”면서 “그것은 역사가 증명하고 있다”고 말했다

내가 경험한 일본의 실체

개인적으로 일본인들은 참 좋은 사람이다. 그러나 일본이라는 국가 문제가 되면 이야기가 전혀 다르다.
국가적으로 큰 일이 있으면 자칭 '천황'을 중심으로 전국민이 단결해 초개같이 생명을 버리는 무서운 민족이다.

빨간신호등 으로 보는 일본인 성격

닛폰리포트 93페이지:일본에는‘신호등이 빨간 불이라도 모두가 건너가면 문제가 없다’는 말이 있다.
모두가 함께 법을 어기면 문제가 되지 않는다’는 뜻이다.

우리가 모르는 일본인 71페이지:집단주의 문화로,일본인은 뭉쳐서 행동한다고 한다.
기타노 다케시北野武 라는 연예인이 ‘빨간 신호등도 모두 건너면 무섭지 않다’라고
일본인의 심리를 표현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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