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초에 감칠맛을 즐기는 방법은 고기같이 단백질이 풍부한 식품을 먹는 것이고, 다음은 숙성이나 발효로 단백질을 분해해서 먹는 방법이다. 사실 일본의 다시나 스톡이 대중화된 것은 아주 오래전 방법은 아니고 아주 효율적인 것은 아니다. 처음에 MSG를 생산하는 과정은 단순했다. 다시마와 같은 해조류에서 뜨거운 물로 추출했다. 물론 지극히 비효율적이었다. 40kg의 해조류에서 겨우 30g을 생산할 수 있었다. 가격이 비싸고 귀할 수밖에 없었다.
일본의 이케다 박사는 감칠맛의 핵심성분이 글루탐산임을 확인하자 이 글루탐산을 대량생산하는 방법을 찾기 시작했다. 그래서 결국 발효를 이용한 아미노산(글루탐산)의 대량 생산시대가 열린 것이다. 당밀(糖蜜)이나 설탕 공장의 부산물을 이용하여 글루탐산을 대량생산하게 되자 우리는 드디어 누구나 만난 고기 맛을 즐길 수 있게 된 것이다.
MSG 생산 공정은 김치나 된장을 만드는 과정과 다르지 않은 미생물 발효 공정이다. 모든 생명체는 크렙스 회로를 통해 글루탐산을 만든다. 하지만 체내에 축적하는 량은 적다. 그런데 미생물(코린박테리움 글루타미컴)은 과잉의 글루탐산을 체외로 배출할 수 있다. 미생물에게 크렙스 회로의 글루탐산 합성 이후의 기작을 억제시키면 미생물은 계속해서 글루탐산을 합성하고 체외로 배출하여 매우 저렴하게 다량의 글루탐산을 얻을 수 있다. 사탕수수의 당 1000g이 MSG 300g으로 바뀌는 것이다. 이 수율이 회사의 생사를 결정한다.
우리나라는 일본과 함께 아미노산이나 핵산계 물질과 같은 1차 대사산물의 발효기술에서 세계 어느 나라보다도 앞서 나가고 있는 선두주자. 사실 우리나라 발효공학의 눈부신 발전은 조미료 때문이었다고 해도 과언은 아닐 듯하다. 70∼80년대 미원과 미풍. 두 브랜드의 끈질긴 싸움이 발효공학의 발전에 준 자극은 대단한 것이었다.
소금이 사용된 것은 5000년 전이고 꿀이나 설탕이 사용된 것도 4000년 전, 식초가 사용된 것은 3500년 전이다. 아주 맛있는 음식에는 뭔가 맛있는 것이 있는데 그것이 글루탐산임을 알아 체는 데 수천 년이 걸린 것이다.
그래서 감칠맛이 높은 맛있는 식품은 아무나 먹을 수가 있었던 것은 아니다. 장을 담그기도 어렵고, 김치나 치즈도 쉽게 만들 수 있는 것은 아니다. 해물이나 육류를 우려내서 육수를 만들려면 많은 시간과 연료가 필요하다. 결국 감칠맛이 나는 음식은 충분한 여유가 있는 극소수의 사람들이나 즐길 수 있었고, 굶주림조차 해결하기 어려웠던 사람들에게는 그림의 떡일 수밖에 없었다.
그런 감칠맛을 누구나 즐길 수 있게 된 것은 동경대의 화학자 이케다 기케나에 덕분이었다. 감칠맛을 발견하고 아지노모토라는 회사를 세우고 감칠맛의 대량생산 시대를 연 것이다. 처음에는 밀가루 단백질인 글루텐을 분해하여 MSG를 제조·생산해 ‘아지노모도’라는 이름으로 1909년부터 일본에서 판매되기 시작하여 대만과 한국은 1910년, 중국은 1917년 판매를 시작했다.
하지만 이때 MSG는 고가여서 누구나 쓸 수 있는 것은 아니었다. 요즘 사용되는 발효법은 1953년에야 파일럿 규모로 생산되기 시작하여 1957년부터 대량생산 체제에 들어갔다. 그리고야 점점 일반인도 쉽게 쓸 만큼 가격이 저렴해졌다.
발효기술의 도입과 업체 간의 경쟁은 여러 분야로 파급되었다. 글루탐산 이외의 다른 아미노산을 생산하는 박테리아 균주들이 개발되었다. 이들 아미노산은 제약용으로 식품용으로 쓰이지만 사료에도 다양하게 쓰인다. 합성색소와 향료의 생산에서 시작된 화학 산업이 제약용으로 발전한 것과 동일한 방식인 셈이다. 이케다가 설립한 아지노모토사는 지금도 세계 시장에서 막강한 점유율을 자랑하고 ‘코쿠미’ 같은 새로운 맛의 연구도 선도하고 있다.
아이노모토의 맛의 대혁명은 충분히 인정받을 가치가 있다. 왕, 귀족, 부자 같이 전문 요리사를 둔 사람뿐 아니라 누구든 손쉽게 맛있는 요리를 만들고, 즐길 수 있는 맛의 민주화를 완성한 것이다 .
거의 매일 아지노모토 광고 만화를 새로 그리고, 경복궁이나 영등포역 등 사람이 많은 곳에는 항상 아지노모토 광고가 있었다고 한다. 지금은 식품회사의 광고가 드물지만 1980년대 까지만 해도 식품산업은 가장 규모가 크고 광고도 활발한 산업이었다. 그런데 일본이 태평양 전쟁에서 패하면서 일본과 한국의 교류가 끊기면서 MSG의 공급이 끊기게 된다.
아지노모토가 없어지자 동안 한국에서 천시되던 멸치가 육수로 사용이 시작되었다고 한다. 정약전 선생의 <자산어보>에서는 업신여길 멸(蔑) 자를 써서 멸어(蔑魚)라 하였고, ‘물 밖으로 나오면 급한 성질 때문에 금방 죽는다’는 뜻에서 멸할 멸(滅) 자의 멸어(滅魚)라고도 적혀 있다.
영어로는 앤초비(anchovy)라 부르고 일본에서 가다구치이와시(カタクチイワシ, 片口鰯)라 하는데, 이는 아래턱이 위턱에 비하여 작아 정어리류 중 턱이 한쪽에 치우쳤다는 뜻에서 붙은 이름이다. 제주도 사람들은 멸치란 놈이 모슬포 연안 수역에 떼를 지어 들어와서는 이리 갔다 저리 갔다 하다가 제풀에 모래 언덕에까지 뛰어 올라가는 모습을 보고는 잘 헤엄쳐 다닌다는 뜻에서 행어(行魚)라고 불렀다 한다.
지금은 맛있게 그냥 먹기도 하고 육수로도 쓰고 볶음도하고 하지만 그 육수로 쓰기 전 한국에서 멸치는 멸시당하는 생선이였다. 하지만 멸치는 놀라운 생선이다. 유리 이노신산이 가장 많은 재료이고 글루탐산과 만나면 감칠맛이 7배나 증폭된다. 다시마와 멸치의 결합 효과는 정말 놀라운 것이다.
하지만 그런 멸치 육수로는 도저히 만족하지 못하고 1956년 드디어 국내에서 MSG를 처음으로 생산하기 시작했다. 대상그룹 명예회장인 임대홍은 1955년 일본 오사카로 건너가 조미료 성분인 ‘글루탐산’ 제조법을 배운 뒤 이듬해 1월 31일 부산 동래구 대신동에 동아화성공업㈜를 설립한다. 이 회사는 국산 기술로 만든 ‘미원’을 대량으로 생산하기 시작하였다. 동아화성공업㈜은 1959년 부산 서면으로 공장을 이전했고, 1962년 12월에는 상호를 아예 ‘미원㈜’로 바꿨다. 1965년 12월부터는 본격적으로 발효법을 통한 조미료 생산에 들어갔다. 그리고 미원은 조미료의 대명사가 되었다.
미원이 엄청난 인기를 끄는 것을 보고 제일제당(CJ)에서 미풍을 만들면서 나중에는 경쟁사끼리 폭력사태도 일어날 정도로 격렬하게 마케팅 전쟁을 벌렸다. 대상(당시 미원주식회사) 과 CJ(당시 제일제당)의 1세대 발효 조미료 시대는 미원의 압승으로 끝나고 ‘1가구 1미원’이라고 부를 정도로 미원은 가정의 필수품이 됐다. 현재의 삼성의 기반을 마련한 탁월한 경영자 이병철 선대회장이 끝내 1등을 하지 못한 거의 유일한 것이 바로 미원이다.
도저히 미원으로는 이길 수 없자 제일제당은 고육지책으로 1975년에 다시다가 내놓고 멋지게 성공하였다. 하지만 이것은 MSG 유해성 논란의 불씨를 남기기도 하였다. 다시다는 MSG로만 만들었던 1세대 조미료에 차별화해 소고기와 양파․마늘․파․후추 등 여러 재료들을 복합했다. MSG는 25%만 넣고 나머지 재료들을 추가한 것이다. 그리고 자신의 맛은 천연의 맛이라고 자랑하기 시작하여 멋지게 성공했다.
결국 1980년대 초에 정부가 나서서 ‘천연’과 ‘자연’에 의존하는 광고를 금지했다. 서로 경쟁하면서 승승장구하던 조미료 시장은 1993년 12월 럭키(현 LG생활건강)가 ‘맛그린’을 시판하면서 흔들리기 시작했다. “타사 제품에 유해성 논란이 있는 MSG가 99~100% 들어있다”고 강조하면서 마케팅을 펼친 것이다. 이때부터 국내 소비자들에게 MSG는 몸에 나쁘다는 인식이 확산됐다.
하지만 ‘맛그린’도 MSG만 뺐을 뿐 다른 첨가물을 여전히 사용해 천연 조미료는 아니라고 시정명령을 받았다. 결국 ‘맛그린’은 MSG에 대한 유해성 논란만 남기고 사라졌다. 이후에도 벌어진 천연조미료 선전은 결국 MSG는 천연이 아니라는 것과 MSG는 나쁘다는 이미지만 남겼다.
MSG가 가장 풍부하게 들어간 제품은 무엇일까? 곡류 중에는 글루탐산이 가장 많은 것이 밀가루다. 무려 단백질의 30퍼센트가 글루탐산이다. 밀가루 반죽에 야채 중 글루탐산이 가장 풍부한 토마토로 만든 소스를 바르고, 전체 식품을 통해도 유리 글루탐산 함량이 가장 높은 치즈와 글루탐산과 핵산이 풍부한 버섯과 고기를 토핑하고 하고, 오븐에서 잘 구우면 MSG를 단 한 톨도 넣지 않고도 MSG가 가장 풍부한 맛좋고 영양 많은 피자가 된다.
MSG의 백년 역사가 짧은 것도 아니다. 피자는 이탈리아의 오랜 전통식품이라 생각할지 모른다. 하지만 실제 역사는 50년에 불과하다. 모차렐라치즈가 피자에 처음 사용된 건 공식적으론 1889년부터다. 일부 지역에서 유명해 졌지만 전국적으로 확산되지는 않았다.
피자의 팔자가 바뀐 계기는 2차 세계대전이었다. 이탈리아에 상륙한 미군 병사들은 피자에 열광했다. 군 복무를 마치고 고향에 돌아간 병사들은 미국에도 이탈리아 이민자들이 만들어 먹는 피자집이 있다는 걸 발견했다. 이들이 먹으면서 피자가 미국 사회 전반에 알려졌다.
그리고 이탈리아를 찾은 미국인 관광객들이 피자를 찾자 피자집이 이탈리아 전역에 들어섰다. 피자 먹는 미국인을 보면서 이탈리아 북부 사람들도 피자를 알게 되었다. 특히 미국 문화를 선망하던 젊은 층을 중심으로 피자를 먹기 시작하여, 1960~70년대부터 이탈리아에서 피자가 본격적으로 소비됐다. 피자가 이탈리아의 국민 음식이 된 것은 50년 정도에 불과하고 피자를 알아봐준 사람은 외국인이다.
일식하면 생각나는 초밥도 현대와 같은 형태는 냉장·냉동기술이 보편화된 1950~60년대 이후에 나왔다. 이전까지는 갓 잡은 생선을 도시에서 먹는다는 건 불가능했다. 선어(鮮魚)와 활어는 1950년 가공·냉동시설을 갖춘 저인망 어선 등장, 1956년 컨테이너 발명, 1960년 저온냉장 화학기술 이용 저온 유통체계가 구축되는 등 기술적 발전 이후 가능해졌다. 신선한 날생선을 사용하는 초밥가게가 도쿄에 퍼진 건 1960년대 이후라고 하니 실제 역사는 50년도 안된다.
사실 대부분의 나라에서 전통음식들은 역사가 그리 길지 않다. 우리가 전통한식이라고 하는 음식들은 대부분 만들어진 지 100여 년에 불과하다. 김치라고 하면 보통 통배추 김치를 떠올린다. 배추는 오래되었지만 요즘 먹는 배추는 1906년 외국으로부터 품질이 우수한 배추 품종을 도입하여 육종 연구가 시작한 이후의 결과물이다. 김치소의 형태도 불과 50여 년 전에야 현재의 맛과 모양을 갖추었다.
삼계탕은 어떨까. 조선시대 닭을 이용한 대표적인 음식은 백숙(白熟)이다. 간장, 된장 등 장류도 사용하지 않았는데 귀한 인삼을 썼을 리는 없고 오늘날 같이 수삼을 사용하는 것은 불가능했다. 오늘날 우리가 먹는 삼계탕은 1960년대를 넘기면서 나타났다는 것이 정설이다. 이때의 삼계탕은 “인삼을 넣고 푹 고은 닭백숙”이었다. 제법 자란 닭이라야 살이나 뼈에 맛이 드는데 지금은 영계만 사용되니 지금의 삼계탕은 현대식 음식인 것이다.
사실 요즘 먹는 음식은 대부분 현대식 인데 유난히 MSG에 대한 편견이 심한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