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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왕조실록 속 동물과 관련한 이야기(1)
게시물ID : history_28505짧은주소 복사하기
작성자 : harussari
추천 : 13
조회수 : 1682회
댓글수 : 15개
등록시간 : 2017/07/10 20:57:5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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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창작글
 지난 번 썼던 글로 지금까지 오유 이용하면서 처음으로 베오베도 경험해보네요. 

 2008년도에, 제가 대학교 1학년 때 두서없이 썼던 여러 모로 부족한 글을(게시판에 글 올리면서 문장을 많이 다듬기는 했습니다만...) 베오베 보내주신 분들과 더불어 댓글 달아주신 분들 모두 감사드립니다. ^^

 오늘은 지난 번 글에서도 예고를 했듯이 조선왕조실록 속 동물과 관련한 이야기를 써볼까 합니다.

 대상 동물은 코끼리와 닭, 물소인데 이 가운데 물소가 가장 양이 많다보니 분량 조절을 위해서 두 번에 나누어 글을 쓰게 될 것 같습니다. 해서 오늘은 물소와 관련된 이야기를 할 거구요, 내일은 나머지 코끼리와 닭과 관련하여 글을 써보도록 하겠습니다.

 
 물소는 동남아시아와 북아프리카에서 가축화되어 농업과 사역용을로 널리 쓰이고 있는 동물로 주로 덥고 습한 지방에서 사는 동물입니다.

물소.png
< 오늘의 주인공 물소입니다 >

 이러한 물소를 사계절이 뚜렷한 조선에서 도입하고자 했던 적이 있었습니다. 덥고 습한 지방에서 사는 물소를 사계절이 뚜렷한 조선에서 들이고자 하다니 대체 뭘하려고 그러나 의문이 드실텐데 다름이 아니라 바로 활의 주재료인 물소 뿔 때문이었습니다.

 과거에도 그랬지만 활은 조선 시대에 들어서도 여전히 중요한 병기 중 하나였습니다. 조선의 활 중에서 가장 으뜸이라고 한다면 각궁을 들수가 있는데요 이러한 각궁은 보통 나무, 소의 힘줄, 쇠뿔 등의 재료를 천연 접착제를 이용하여 만들어지는 것이 보통이었습니다. 다만 여기서 사용된 쇠뿔이 국산이냐, 아니면 수입 산인 물소 뿔이냐에 따라 백각궁, 흑각궁으로 구분해서 불렸습니다.

 * 물소 뿔이 검기 때문에 물소 뿔로 만들면 흑각궁, 국산 소인 황소는 뿔이 희기 때문에 황소 뿔로 만들면 백각궁, 구분 참 쉽죠?

흑각궁, 백각궁.png
< 오른쪽이 흑각궁, 왼쪽이 백각궁 >

 각궁 중에서는 물소의 뿔로 만든 흑각궁의 성능이 가장 우수했는데요 당연히 조선 정부는 이러한 우수한 성능의 흑각궁을 많이 만들고 싶었습니다만 여기에는 한 가지 커다란 문제가 있었습니다. 바로 주 재료인 물소 뿔이 조선 내에서는 구할 수가 없는, 전량 수입을 통해서만 구할 수 있는 재료라는 겁니다. 

 때문에 조선은 우수한 흑각궁을 많이 가지고 싶었지만 재료를 전량 수입해야 하다보니 단가가 비싸지고, 이로 인해 흑각궁을 대량으로 보유하는데도 어려움이 따를 수 밖에 없었습니다.(게다가 더 큰 문제는 물소 뿔의 주 수입국이 명나라인데 이게 명나라에서 판매를 허락하지 않기도 하였다는 점입니다.)

 이러한 문제로 많은 고민을 하였던 조선은 결국 한가지 결론에 도달하게 됩니다. 

 "수입 단가가 비싸다면 물소를 도입해 우리가 키우고 재료를 자체 수급하자!"

 이에 조선은 세종 시기를 시작으로 수십 년에 걸친 물소 도입 프로젝트를 구상, 시행합니다.

  임금이 말하기를,
 "활을 만드는데 수우(물소)각만한 것이 없다. 내가 명나라에 청하여 전라도의 춥지 않은 지대에 두려고 한다."
 하니, 병조 판서 최윤덕이 대답하기를,
 "신이 근일의 도시 무사 때 보니, 활의 시위가 자주 빠져도 부러지지 앟은 것은 모두 수우각이었습니다."
 하고, 좌의정 황희가 말하기를,
 "수우는 털이 얇고 추위를 타므로 한겨울에 우리를 지어 잘 기른다면 살릴 수 있을 것입니다. 그러나 사오기는 매우 어려우니 만약에 청한다면 황제께서 어찌 허락하지 않으시겠습니까."
 하였다. 임금이 말하기를,
 "나도 청해 보려고 한다. 반드시 구매해 오려면 어려울 것이다."
 하였다. 
<세종실록 10년 11월 9일 기사>

 (중략) 임금이 또 말하기를,
 "나귀란 놈은 중원에서도 몹시 많이들 이용하고 있으니, 요동 등지에 가서 교역해다가 기르는 것이 어떠한가?"
 하니, 허조가 대답하기를,
 "다만 나귀만이 아닙니다. 물소의 이용도 군사에 가장 긴요하온데, 혹시 들어갔다가 길이 막히면 얻기가 어려울 것이며, 또 이 물건이 북방의 소산이 아니고, 또 외국으로의 유출을 금지하고 있사오니, 활제께서 만약 남경으로 이어하시거든 이를 주청해서 교역해다가 기르고 번식시키면 그 이익이 매우 많을 것입니다."
 하니, 임금이 말하기를,
 "나도 역시 이에 뜻을 두고 있었는데 경의 말은 참 옳은 말이오."
 하였다.
<세종실록 11년 12월 9일 기사>

 (중략) 임금이 또 말하기를, 
 "물소는 힘이 세고 밭 가는 데 사용할 수 있다고 하니, 내가 중국 황제에게 주청하여 바꿔 오고자 한다. 다만 우리 나라는 중국의 남쪽 지방과는 기후가 같지 않아서 물소가 우리 나라에서 번성하지 않을까 봐 두렵다."
 하니, 상이 아뢰기를,
 "신이 들으니 물소가 밭을 가는 것이 보통 소의 두 배나 된다고 합니다. 전라도의 기후는 중국의 남방과 비슷하니 사양할 수 있을 것입니다."
 하고, 조도 또한 그것이 유리하다고 말하였다. 임금이 말하기를,
 "고려에서 타려를 교역하고 싶다고 중국 조정에 주청하였더니, 황제가 그 값을 돌려보내고 타려 30필을 하사하고, 이어 유시하기를, '내 타려를 중외에 나누어 주고자 하나, 다만 사양한 수가 적어서 뜻대로 하지 못한다.'고 하였었다. 지금 물소를 청하여도 도리에 잘못 될 것이 없으니 중국 예부에 자문을 보내어 바꾸기를 청하는 것이 좋겠다. 예부에서 허락하지 아니하는 경우에는 사연을 갖추어 황제에게 주달하는 것이 어떻겠는가."
 하니, 모두가 아뢰기를,
 "좋습니다."
 하였다.
<세종실록 14년 2월 13일 기사>

 (중략) 맹손이 또 아뢰기를,
 "일찍이 주상께서 분부하옵시기를, '배 만드는 공장과 물소를 명나라 조정에 주청하라.'고 하셨는데 이번 사은사가 가는 길에 주청하게 하시겠습니까?"
 하니 임금이 말하기를 (중략)
 "물소 같은 것은 진기한 새 혹은 기이한 짐승이라 하여 주청하는 것이 부당하다고 할지도 모르겠으나, 이 동물은 기이한 짐승이 아니고 밭을 갈며 수레를 끄는 등 소용되는 것이 매우 중요한 것이다. 다만 지금 명나라 조정에서 요구하는 소 1만 필을 만약 마련하지 못하고 면제하여 주기를 주청한다면 물소를 달라고 주청할 수는 없을 것이다. 그것을 이긍, 김청 등으로 하여금 승문원 제조에게 의논하여 아뢰라."
 하였다.
<세종실록 14년 5월 16일 기사> 

 세종실록 속 물소와 관련된 기사들을 살펴보면 대략 다음과 같은 내용을 유추해 볼 수 있습니다. 
  - 세종 10년 11월에 물로 뿔로 만든 활의 우수성이 거론되면서 처음 물소의 도입이 거론되었다.(세종실록 10년 기사)
  - 당시 조선은 명 황제에게 요청하여 물소의 도입을 시도하고 있는데 이는 당시 명나라가 물소를 외국으로의 유출을 금지하고 있기 때문이었다.(세종실록 11년 기사)
  - 활의 재료 이외에도 농업에 활용하고자 하였으며 또한 기이한 짐승이라 하여 주청하고자 생각하기도 하였다.(세종실록 14년 기사

 세종실록에 실린 물소에 관한 이야기는 여기서 끝나는데 더 이상의 언급이 없는 것을 보면 결국 세종 시기에 논의 되었던 물소 도입의 시도는 실패로 끝난 것으로 보입니다. 
 
 물소 도입 시도는 이후 문종 때에도 언급됩니다만(문종 즉위년 8월 11일 기사) 역시나 이후 별다른 이야기가 없는 것으로 보아 세종 때와 같이 실패한 것으로 보입니다. 

 결국 명나라를 통한 물소 도입은 더 이상 가망이 없어 보이던 찰라에 조선의 물소 도입은 전혀 엉뚱한 곳에서 성과를 맺게 됩니다. 바로 일본에서 물소 암수 한 마리씩을 조선에 바쳐온 것입니다. 

  이보다 앞서 물소를 일본국 대내전에 찾았었는데 이때에 이르러 대내전에서 중 능면을 보내어 암수 두 마리를 가지고 와서 바쳤다. 경상도 웅천에 이르니, 행 상호군 조득림에게 명하여 웅천에 가서 조심해 기르다가 봄을 기다려 가지고 오도록 하였다.
<세조실록 7년 10월 21일 기사>

 이 앞서 유구국에서 올린 물소 2두를 웅천에 두고 기르다가, 이에 이르러 사복시윤 박서창을 보내어 취하여 오게 하였는데, 물소의 성질이 더위를 두려워하고 물속에 깊이 엎드려 있거늘, 명하여 창덕궁 후원에서 기르게 하고, 사복시 관원으로 사여금 윤차로 보살펴 기르도록 하였다. 또 의경과 제서의 양우법을 초록하여 의생 4인으로 하여금 익히도록 하였다.
<세조실록 8년 4월 13일 기사>
 
 우여곡절 끝에 마침내 조선에 도입된 물소는 이후 일본을 통해 더 도입이 되었는지, 아니면 중국 명나라를 통해 도입이 되었는지는 기록이 없어 알 수 없으나 다만 성종 10년의 기록을 보면 '새끼 친 것이 겨우 70여 마리'라는 기록을 통해 두 마리로 시작했던 물소의 수가 상당 부분 늘어나게 되었음을 알 수 있습니다.

  상참을 받고 정사를 보았다. 좌승지 김승경이 사복지 제조의 단자를 가지고 아뢰기를,
 "여러 고을에서 나누어 기르는 물소가 임오년부터 올해까지 새끼 친 것이 겨우 70여 마리입니다. 이제부터 잘 번식시키는 수령이 있거든 가자하여 권장하소서."
 하니, 임금이 좌우에게 물었다. 우의정 윤필상이 대답하기를,
 "후하게 상주어도 괜찮겠습니다."
<성종실록 10년 2월 24일 기사>

 이 과정에서 한 가지 재미있는 사실이 있는데 정작 조선에 물소를 바침으로써 조선이 물소를 도입하는데 큰 역할을 하였던 일본이 정작 본인들은 물소 번식에 실패하여 그 종자가 끊기는 모습을 보이기도 하였다는 점입니다.

 그러나 결론적으로 물소를 도입하여 자체적으로 물소 뿔을 생산하자라는 계획은 실패한 것으로 보입니다. 번식에 성공한 물소를 대상으로 뿔을 얻었다는 내용도 없을 뿐더러 성종 11년 12월 9일 기사에서는 중국의 물소 뿔 판매를 감사해하는 내용이 보이기 때문입니다. 

 (중략) "신이 가만히 생각하건대, 궁재에 소용되는 물소 뿔은 본래 우리 나라에서는 생산되는 것이 아니므로, 오로지 중국에만 의존해 왔었습니다. 그런데 지난 번에 금약으로 인하여 수매를 허락하지 않았는데, 성화 13년 8월 26일에 사유를 갖추어 진청함에 따라 공경되게 성은을 입어 매년 한 차례씩 궁각 50부를 수매하도록 허락하시니 신은 감격함을 이길 수가 없었습니다. 단지 생각하건대 우리 나라는 세 방면으로부터 적의 침입을 받는 데다가 근일에는 또 야인이 변경에서 흔단을 꾸려 여러 번 침요하니, 병비가 더욱 소흘할 수 없습니다. 더욱이 나라 사람들이 참검을 익히지 아니하고, 오직 궁시만을 업으로 삼아 적을 방어함에 있어서는 활에만 의존하니, 비록 제조하는 것만 많다 하더라도 감당하여 이를 쓸 수 있는 자는 적습니다. 겸하여 또 쉽사리 부러져 췌손되니, 50부를 가지고는 소용되는 데 넉넉하지 못하여 신은 적이 민망스럽습니다. 이에 신은 감히 호소하며 삼가 성은을 바라오니, 불쌍히 여겨 수매할 때의 몫을 지난 해의 사례를 조사하고 그에 의하여 액수에 구애받지 아니하고 수매하도록 허락하여 군수를 넉넉하게 해 주소소. (중략)
<성종실록 11년 12월 9일 기사>

 상황이 이렇게 되자 이제 더 이상 물소 도입을 통한 물소 뿔 자체 생산을 할 필요성이 없어지게 되었습니다. 그러나 이제 또 다른 문제가 발생하게 되는데 다름이 아니라 이미 조선에 도입되어 정착한 물소들의 처리 문제였죠.

 이는 물소가 사람을 들이 받아 다치게 하는 등의 사고를 치면서 본격적으로 언급되기 시작합니다.

  제도 관찰사에게 하서하기를,
 "지금 수원과 남양에 물소를 기르는데, 사람을 받아서 상해하였다고 한다. 이는 소가 성질이 사나와서 그러한 것일 뿐만 아니라, 지키는 자가 상시로 마음을 더하여 길들이지 아니하고, 혹은 들판에 놓아두어서 들짐싱과 다름이 없게 되어 사람을 꺼리게 한 때문이다. 사람을 상해하는 것은 할 수 없이 죽여서 번식하지 못하게 하면 이것을 어찌 옳겠는가? 이 뒤로는 지키는 자로 하여금 아침 저녁으로 훈련시켜 길들이게 하는 것이 가하다."
 하였다.
<성종실록 24년 8월 20일 기사>

 승정원에 전교하기를,
 "내가 듣건대 수우가 날로 번식하나 늙어서 소용이 없으니, 민간에 나누어 주어 밭을 가는데 쓰게 하려고 하는데 어떻겠는가?"
 하니 승지들이 아뢰기를,
 "이 소는 성질이 본디 조급하여 밭을 가는 데에는 마땅치 못합니다. 마른 땅에는 빨리 달려서 밭을 가는 자가 미처 따라 가지 못하고, 습한 땅에서는 물러 서서 앞으로 가지 아니합니다. 이극배가 일찍이 하사를 받아서 수레에 메워 물건을 운반하였는데, 얼마 아니되어 병들어서 죽었습니다. 재상의 집에서도 오히려 기르지 아니하는데, 하물며 민간에서이겠습니까? 관부에서 기르는 것이 마땅합니다."
 하고 동부승지 권경우는 아뢰기를,
 "신이 일찍이 제주에서 사명을 받들고 가서 보니, 산 북쪽은 바람 기운이 춥고 세어서 초목이 쉽게 말라 죽고, 산 남쪽은 겨울에도 눈과 서리가 없어서 나뭇잎이 마르지 아니하며 말을 기르면 매우 살이 찝니다. 수우는 극심한 더위와 추위를 두려워하니 만약 전라도에 나누어 기르는 수우를 제주도 산 남쪽 땅에 옮기면 뒷날의 번식을 기약할 수 있습니다."
 하니, 전교하기를.
 "민간에는 과연 반사할 수 없다. 제주도는 땅이 따뜻하므로 번식할 수 있으나 다만 이 소는 성질이 조급하므로 배에 싣고 가면 경동하여 아마도 건너기가 어려울 듯하다."
 하였다.
<성종식록 24년 10월 4일 기사>

 처음 논의되기는 남은 물소를 농업에 이용해 볼까 하였으나 그 성질이 사나워 실패하였고 결국 따뜻한 남쪽의 제주도로 보내고자 하였으나 사나운 성질 때문에 결국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는 모습을 보입니다. 

물소의 성깔.jpg
< 물소가 한 성깔하긴 하죠 >

 처음 도입이 어려웠지 막상 도입이 성공하고 번식에까지 성공하고나니 막상 이제는 애물단지로 전락해 버리고 말았던 거죠.

 결국 물소에 대한 처리 논의는 중종 때 와 이익이 없고 오히려 백성들에게 피해만 준다고 하여 내다 버리자는 이야기까지 나오게 됩니다. 이에 중종은 원하는 인원에 따라 백성들에게 나눠주라고 명하죠.

  (중략) 각관에서 기르는 수우도 나라에 이익이 없고 백성에게 해만 있으니 또한 마땅히 버려야 합니다. (중략)
<중종실록 4년 5월 25일 기사>

 병조가 아뢰기를,
 "김수동 등의 의논이 물소를 민원에 따라 제급하는 것이 마땅하다고 합니다. 각 고을에서 나누어 기르는 물소를 백성의 청원에 따라 나누어 주어서 밭을 갈게 하되, 혹 죽거나 잃어버리더라도 죄를 다스리지 말게 하소서."
 하니 그대로 윤허하였다.
<중종실록 4년 11월 6일 기사>

 결국 성능 좋은 흑각궁에 필요한 물소 뿔을 한 번 자체 생산해 보자는 취지에서 처음 들여온 물소는 명나라로부터의 물소 뿔 수매 허락과 더불어 그 필요성이 사라지게 되었고, 이미 있는 거 밭갈이로라도 써보자는 계획은 그 성질로 인해 실패하면서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는 아무 필요없는 존재가 되어 버리면서 더 이상의 기록에서 등장하지 않습니다. 

 필요에 의해 기후에 맞지도 않는 곳에 와 고생한 물소도 불쌍하지만 필요하다고 들여올 때는 언제고 막상 필요성이 사라지니깐 버려버리자고 하는 인간의 이기적인 모습을 볼 수 있는 편이었는데요, 글을 작성하면서 뉴트리아가 참 많이 생각났습니다.

 고기맛과 모피로 인해 국내에 들여와서는 막상 사업이 실패하자 방치 또는 방생되었던 모습이 실록 속 물소의 모습과 많이 오버랩이 되어 글을 쓰는 내내 뭔가 좀 씁쓸하였던 편이었습니다.

 밖에 비가 하루 종일 내리는 걸 보니 본격적인 장마철 이긴 한가 봅니다. 비도 비이지만 날씨가 너무 습해서 죽겠네요.... 뭔가 하루종일 찝찝하고 끈적끈적한 느낌입니다...

 그럼 다음 편에서는 위에서 예고했던 바와 같이 코끼리와 닭의 내용을 가지고 내일 찾아 뵙겠습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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