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팽성대전
게시물ID : history_13626짧은주소 복사하기
작성자 : Nardien
추천 : 12
조회수 : 2466회
댓글수 : 6개
등록시간 : 2014/01/19 16:23:19
팽성대전.png
팽성대전

春, 漢王部五諸侯兵, 凡五十六萬人, 東伐楚. 項王聞之, 卽令諸將擊齊, 而自以精兵三萬人南從魯出胡陵. 四月, 漢皆已入彭城, 
收其貨寶美人, 日置酒高會. 項王乃西從蕭, 晨擊漢軍而東, 至彭城, 日中, 大破漢軍. 漢軍皆走, 相隨入谷、泗水, 殺漢卒十餘萬人. 
漢卒皆南走山, 楚又追擊至靈壁東161)睢水上. 漢軍卻, 爲楚所擠, 多殺, 漢卒十餘萬人皆入睢水, 睢水爲之不流
봄에 한왕이 다섯 제후들의 56만 병사들을 통솔해 동으로 초나라를 공격하였다. 항왕이 이 소식을 듣고서 여러 장수들로 하여금 
제나라를 공격하게 하고는 자신은 정예군 3만을 이끌고 남쪽으로 진격해 노현(魯縣)을 지나서 호릉(胡陵)을 나왔다. 
4월, 한왕이 이미 팽성에 들어가서 그 재화와 보물 그리고 미녀들을 차지하고 날마다 주연을 베풀었다. 
항왕은 서쪽 소현에서부터 새벽에 한군을 공격하고 동쪽으로 진격해 팽성에 이르더니 정오 무렵 한군을 대파하였다. 
한군은 모두 도망치다가 곡수(穀水)와 사수(泗水)에 빠졌으며, 여기서 죽은 한나라 병졸이 10만여 명에 이르렀다.
한나라 병졸들이 모두 남쪽의 산으로 도망치니 초군은 또 추격해 영벽(靈壁)의 동쪽 수수(睢水)에까지 이르렀다. 
한군이 퇴각해 초군에 밀리게 되니 많은 병사들이 죽임을 당했는데, 한나라 병졸 10만이 모두 수수에 빠져서 강물이 흐르지 못하였다.
-사기 항우본기-


항우가 3만 정예병으로 56만에 달하는 유방의 제후 연합군을 기습한 전투. 3만명이 56만과 싸워 이기는 것도 대단한데 
말 그대로 박살을 내버려 수십만명을 강물에 처넣어 버렸다. 이 전투 한번으로 천하를 잡은 것처럼 보였던 유방은 
항우의 군대를 피해 도망다니는 신세가 되었고 제후들은 모두 유방을 등지게 되었다.


초의제.png
초나라 의제

義帝雖無功, 故當分其地而王之.
"의제께서 비록 황제라고는 하나 공이 없으시니,  그 땅을 나누어 왕이 되는 것이 마땅할 것이오."
-사기 항우본기-


1. 의제 참살과 제후들의 불만
일찍이 서초의 군주였던 회왕은 영을 내려 먼저 진나라를 쓰러뜨리고 함양에 들어가는 자를 왕이 되라고 한 적이 있었다. 
항우가 장한과 싸우는 사이 유방은 함양에 먼저 들어갈 수 있었다. 초회왕은 항우에게 약속을 지키라고 명했으나, 유방을 위험하게 생각했으며, 
또한 자신과 장한이 싸우는 틈을 타 어부지리를 얻었다 여긴 항우는 일단 초회왕을 의제(의로운 황제.... 처럼 보이나 실상은 가짜 황제라는 소리다.)
로 격상시켜 구색을 맞춘 뒤 "아무리 황제지만 공이 없잖아? 그니까 내가 알아서 내맘대로 땅을 나눌게."라며 자기가 멋대로 제후를 봉했다. 

그러나 이는 공평하지도 못했고, 항우가 자의적으로 내린 것이라 명분도 서지 않아 불만을 샀다. 
가장 공이 많았던 유방은, 위험하다는 이유로 서천의 벽지에 쫓아내 버렸다.(근데 그러면서 또 장량이 항백을 통해 한중땅을 달라고 하자 
기분 내키는대로 덜컥 유방의 영지에 포함시켜줬는데, 한중이 가지는 지리적 여건을 생각해보면 이는 중원으로의 길을 열어준 것이나 마찬가지였다.)
 진나라 지역에서는 신안대학살로 인해 원한을 많이 샀던 장한, 사마흔, 동예를 왕으로 봉하니 민심이 안정되지 못했다. 
가장 문제가 된 곳은, 제나라 지역으로 제왕을 쫓아내고 자신의 부하장수인 전도를 왕으로 세워 제나라의 실세였던 전영이 크게 불만을 가지게 된다. 
거기다 항우가 의제마저 참살하니 그 정통성이 땅바닥에 떨어져 버렸다.

한신.png
한신

陳餘陰使張同、夏說說齊王田榮曰:「項羽爲天下宰, 不平. 今盡王故王於醜地, 而王其群臣諸將善地, 
逐其故主趙王, 乃北居代, 餘以爲不可. 聞大王起兵, 且不聽不義, 願大王資餘兵, 請以擊常山, 以復趙王, 請以國爲扞蔽.」
진여는 몰래 장동(張同), 하열(夏說)을 보내 제왕 전영에게 권하기를 “항우가 천하의 주재자(主宰者)가 되었으니 
이는 불공평한 일입니다. 지금 본래 왕이었던 사람을 나쁜 땅의 왕으로 삼고, 자기의 여러 신하들과 장수들을 
좋은 곳의 왕으로 삼았으며, 원래의 군주 조왕(趙王)을 쫓아내어 북쪽의 대(代)에 거하게 했으니, 
저는 그럴 수 없는 일이라고 생각합니다. 
듣건대 대왕께서 군대를 일으키시고 또한 불의를 따르지 않는다고 하시니, 원컨대 대왕께서 저에게 군사를 지원해주시어
상산(常山)을 공격하게 해 조왕의 원래 영지를 회복케 하시고 저희나라를 방어막으로 삼으시기를 청합니다.”
-사기 항우본기-


2. 제나라의 반란과 유방의 관중평정
전영은 반란을 일으켜 제왕으로 임명된 전도를 쫓아버리고 항우가 두려워 도망친 제왕 전시, 제북왕 전안을 죽이고 
삼제를 통합, 스스로 제왕이 되었다. 거기다 전영은 팽월에게 장수의 인을 주어 양땅에서 반란을 일으키게 하였고, 
진여와 손을 잡고 상산왕 장이를 쫓아버리고 대왕 조헐을 조왕으로 세우고 진여를 대왕으로 임명하였다. 
거기다 마침 이때 유방이 군대를 일으켰다. 잔도가 끊어져 방심하고 있던 장한을 한신은 샛길을 통해 기습, 
2번 싸워 패배시켰고 장한은 폐구에서 농성하는 처지가 된다. 장한을 폐구에 가두어 놓은 사이 유방은 
색왕 사마흔, 책왕 동예, 하남왕 신양을 모조리 격파하고 관중을 평정하였다. 이렇게 되자 항우가 세운 천하는 뿌리째 흔들렸다.

항우는 이에 군사를 일으켜 전영을 공격하였다. 사실 항우는 가볍게 제나라의 반란을 진압할수 있었다. 
항우와 전영의 능력은 원체 차이가 많이 났기에 성양에서 회전 한번으로 개박살내고 전영은 도망치다가 제나라 사람들에게 붙잡혀 살해되었다. 
그러나 항우는 제 분에 못이겨 항복한 군졸들을 생매장하고 제나라 성들과 민가를 불태우는 엄청난 막장짓을 해버렸다. 
이에 제나라 사람들이 분개하여 전영의 동생 전횡의 지휘 아래 다시 모였고, 항우는 이들을 공격했으나 함락시키지 못했다.

4월, 유방이 의제의 원수를 갚는다는 명분으로 제후연합군을 모집, 56만의 연합군을 이끌고 팽성을 함락시켜 버렸다. 
항우는 제나라에서 고전을 면치 못하고 있는데다 이미 그들의 수도를 함락시켜 버렸으며 56만에 달하는 연합군이 있는 상황. 
누가봐도 이미 전쟁은 끝난 것처럼 보였고 유방은 팽성의 재화와 미인들을 가지고 날마다 주연을 베풀었다.
하지만 이 모든것은 착실한 사망플래그에 불과하였다.

팽성대전2.png

3. 패왕의 귀환
비록 수도가 함락되었지만 항우는 제나라와 싸우고 있었기에 모든 전력을 돌릴수는 없었고 단지 3만의 정예군을 따로 추려내었다. 
그는 이 3만 병력을 이끌고 노현, 호릉을 지나 팽성의 서쪽인 소현에 도착했다. 
그리고 여기서부터 한군을 모조리 잡아죽이며 동쪽으로 진격하여 팽성에 이르렀고, 정오가 될 무렵 한군을 패배시켰다. 
하남왕 신양이 전사하였고 한군은 일부는 남쪽으로, 일부는 동쪽으로 도망쳤고 초군은 이를 추격하였다. 
동쪽으로 도망친 한군은 곡수와 사수에 가로막혔고, 여기서 초군에게 도륙당하여 10만명이 죽었다. 
남쪽으로 도망친 한군 역시 수수에 가로막혔고, 초군이 이를 공격해 또다시 한군 10만이 죽었고 
강물이 시체로 막혀 흐르지 않을 지경이었다. 

유방은 이 싸움에서 죽을뻔했으나, 그를 그냥 놓아준 초나라 장수 정공, 그리고 수레를 모는 실력이 뛰어났던 하후영 덕분에 
간신히 살아 돌아올 수 있었다. (다만 이 두개의 전투가 동일한게 아니냐는 추측이 있다. 
사기보다 후대의 기록인 자치통감 주석에는 곡수가 곧 수수라고 기록되어 있는데, 이는 두 싸움의 전개 양상이 비슷한 것에 대해 
사마광이 의문을 품고 해석의 여지를 남겼다는 것이다. 실제로 전투가 이렇게 2곳의 추격전으로 이루어 졌다면 
초군은 고작 3만명이라고 보기는 어려울 것이다.)


4. 결과
(1) 어떻게 항우는 승리할 수 있었나?
첫째로, 지휘관의 차이다. 물론 한나라에는 항우보다 뛰어난 지휘관이라고 할 수 있는 한신이 있었지만, 
56만의 군대는 제후 연합군의 형태였다. 다른 제후들과 한왕과 깊은 유대감이 없는 이상 다른 제후들이 쉽게 지휘권을 넘기지도 않았을 것이며, 
통일되지 않는 지휘체계 속에서 그 움직임이 초군에 비해 떨어질 수밖에 없었다. 실제로 항우는 상대의 예측을 벗어나 
빠른 시기에 빙 돌아 서쪽의 소현에서부터 기습을 가했고, 퇴로가 막힌 연합군은 말 그대로 학살당했다.

둘째로, 병사들 개개인의 능력의 차이다. 초나라군은 진나라의 명장 장한이 이끄는 군대와 싸워왔으며,
거록에서의 혈전, 제나라 전역 등 수많은 전투경험을 가지고 있었다. 거기다 그중에서 항우는 또다시 가려뽑은 병력을 데리고 왔다. 
반면 제후 연합군은 나름대로 전투경험이 풍부하다고 주장할 수 있을지 모르지만 항우의 군대를 제외하곤 장한의 진나라군과 
제대로 싸워본 이들은 거의 없었다. 거기다 연합군의 형태였기에 제후들은 항우 이후에도 앞으로의 전쟁에 대비하여 
손쉽게 그들의 정예군을 내주기 보다는 그저 겉체면상 숫자 채우기 식으로 보냈을 거라는 추측도 가능하다. 

셋째로, 전투지역이 초나라 땅이었다는 점이다. 항우가 돌아왔을때는 유방이 팽성을 점령한지 얼마 되지 않은 시점이었고 
이들을 쉽게 장악하지 못했던 것으로 보인다. 실제로 전투 이후 추격전이 2곳에서 이루어졌다는 점, 이후 초나라와 한나라의 전투양상을 보면 
항우는 빠르게 초나라 지역을 다시 회복한 것으로 보이고 병력충원을 손쉽게 이루어 낼수 있었을 것이다.

(2) 한나라의 위기와 극복
팽성대전의 가장 큰 의의는, 반란을 일으킨 제후들에게 아직 중국 최강의 사내가 누군지 보여주었다는 점에 있다. 
새왕 사마흔은 다시 초나라에 투항했고, 위왕 위표는 자신의 영지로 돌아가서 항우와 손을 잡는다. 
또 대왕 진여, 조왕 조헐은 상산왕 장이를 유방이 죽이겠다는 약조를 받고 연합군에 참여했었는데, 장이가 살아있다는 소식을 듣고 역시 등을 돌린다.
그리고 폐구에 갇혀 있었던 기습덕후장한은 유방이 동쪽으로 떠나자마자 성문을 열고 한군을 기습, 포위를 풀어버리고 인근의 땅을 약탈해 
식량과 장정을 거두어 들인뒤, 한군이 돌아오자마자 도로 폐구로 돌아가 버리는 깽판을 쳐버린다. 
벌써 열달째나 농성을 하고 있었으니, 만약 항우가 다시 처들어 온다면 이는 큰 화가 될수 있었던 문제였다.

이에 장량이 계책을 내어 항우와 갈등을 빚던 구강왕 영포를 포섭, 반란을 일으키게 하였다. 
비록 용저에게 패배하지만 영포는 한군이 방어를 견고히 할 시간을 벌어주었고, 그동안 소하는 관중에서 군량과 병력을 보내주었다. 
거기다 번쾌가 위수의 물길을 돌려 폐구성을 침수시키는 극단적인 방법으로 써서오오 번쾌 오오 장한은 자결하였고 관중을 완전히 평정된다.

그리고 한신이 3만의 병력을 데리고 북진을 시작하는데, 이것이 전설로 남은 한신의 북벌. 
고작 3만의 병력으로 2년만에 5개의 나라를 무너뜨리고 두명의 왕을 사로잡고 한명의 왕을 참살하여 
천하의 대세는 다시 한나라에게 기울어지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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