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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도전에 나오는 이지란 알고보니 여말선초의 숨은 명장이었군요.
게시물ID : history_13618짧은주소 복사하기
작성자 : genesio
추천 : 10
조회수 : 5693회
댓글수 : 6개
등록시간 : 2014/01/19 13:14: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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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지란

[ 李之蘭 ]
 
 
본관은 청해(靑海). 초성은 퉁(佟), 초명은 쿠룬투란티무르(古論豆蘭帖木兒). 자는 식형(式馨). 남송 악비(岳飛)의 6대손으로, 아버지는 여진의 금패천호(金牌千戶) 아라부카(阿羅不花)이며, 이화영(李和英)의 아버지이다.
 
이성계와는 결의형제를 맺었고, 출신지는 북청(北靑: 靑海)이다. 첫째 부인은 함안군부인(咸安郡夫人) 혜안택주(惠安宅主) 윤씨(尹氏)이며, 둘째 부인은 태조비 신덕왕후(神德王后) 강씨(康氏)의 조카딸인 상산군부인(象山郡夫人) 곡산강씨(谷山康氏)이다. 아버지의 벼슬을 이어받아 천호가 되었으며, 1371년(공민왕 20) 부하를 이끌고 고려에 귀화해 북청에서 거주하며, 이씨 성과 청해를 본관으로 하사받았다.
 
1380년(우왕 6) 이성계의 편장으로서 황산에서 아지발도(阿只拔都)가 이끄는 왜구를 무찔렀으며(황산대첩), 1385년 이성계의 휘하로 왜구를 함주에서 격파해 선력좌명공신(宣力佐命功臣)에 봉해지고 밀직부사에 임명되었다. 1388년 위화도(威化島)의 회군에 참가해 1390년(공양왕 2) 밀직사가 되었다.
같은해 서해도에서 왜구를 격파해 판도평의사사(判都評議司事)·지문하부사(知門下府事)에 임명되었다. 1392년 명나라를 도와 건주위(建州衛) 여진추장 월로티무르(月魯帖木兒)의 반란을 정벌한 공으로 명나라에 의해 청해백(靑海伯)에 봉해졌다.
 
조선에 와서 이성계를 새로운 왕으로 추대한 공훈으로 1392년(태조 1) 참찬문하부사(參贊門下府事)에 오르고, 보조좌명개국일등공신(補祚佐命開國一等功臣) 청해군(靑海君)에 봉해졌다. 1393년 경상도절제사로 왜구 방어를 담당했고, 이어 동북면도안무사가 되어 갑주·공주(孔州)의 성을 축조하였다.
또, 위화도의 회군에 참가한 공훈으로 회군일등공신(回軍一等功臣)에 봉해졌다. 1393년 동북면도안무사, 1397년 동북면도병마사, 1398년 문하시랑찬성사(門下侍郎贊成事)·판형조사의흥삼군부사중군절제사(判刑曹事義興三軍府事中軍節制使)가 되었다.
 
같은해 제1차 왕자의 난에서 공을 세워 정사공신(定社功臣) 2등에 봉해지고, 1400년(정종 2) 제2차 왕자의 난 때에도 공을 세워 1401년(태종 1) 익대좌명공신(翊戴佐命功臣) 3등에 봉해졌다.
 
태조가 왕위에서 물러나자 그도 청해(靑海: 北靑)에 은거하면서 남정·북벌에서 많은 살상을 한 것을 크게 뉘우쳐 불교에 귀의했다 한다. 태조의 묘정에 배향되었다. 묘소는 함경남도 북청군 신북청읍 안곡리에 있다. 시호는 양렬(襄烈)이다.
[네이버 지식백과] 이지란 [李之蘭] (한국민족문화대백과, 한국학중앙연구원)
 
남송의 명장 악비의 후손에 여진족 출신으로 고려에 건너와
이성계와 함께 숱한 전투에서 승리하고
조선의 건국공신이자 청해 이씨의 시조까지 되었고,
나중에는 태종 이방원의 집권에까지 기여하게 되니
아마 그 당시에는 상당한 능력자가 아니었나 싶네요.
그동안 잘 알려지지 않았던 한국사의 숨은 명장을 이번에 알게 되었네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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