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45년 8월 18일,
아버지께서는 광복된 조국에 김준엽 총장님, 노능서 선생님 그리고 이범석 장군님과 함께 미군 비행기를 타고 여의도 비행장에 착륙하셨다. OSS (Office of Strategic Services) 대원으로서 <미국 군사 사절단>의 일원이셨다. 죽음을 각오한 입국 이었지만 패잔 일군과의 분쟁을 원치 않는 미군의 결정에 의해 해방된 조국의 여의도 비행장에서 단 하루 밤만을 보낸 뒤 다시 중국으로 돌아 갈 수 밖에 없었다.
아버지께서는 그날의 일을 이렇게 말씀 하셨다.
“1945년 8월 20일은 이미 새고 있었다. 광복군도, 떳떳한 승리의 군대로 조국에 개선해서 발언권을 가지고 국내 치안을 주도해 보려던 꿈도 함께 잠들고 만 것이다.” - 돌베개 중에서-
그 후 아버지께서는 매년 8월 18일 김준엽 총장님과 함께 하셨다.
1975년, 광복 30주년,
아버지께서는 8월 18일 월요일 여의도 비행장 착륙 30년을 되새기고자 김준엽 총장님과 만날 약속을 하셨다. 하지만 하루 전인 8월 17일 일요일, 해방되었지만 해방되지 못한 대한민국에서, 광복된 조국을 다시 떠나야만 했었던 뼈아팠던 날을 하루 앞둔 채 아버지께서는 그리도 사랑하셨던 조국의 산하를 영혼에 새겨 두신 채 떠나셨다. 쉬흔 여덟, 민족 민주 투사 장준하의 꿈은 해방된 조국에서 채 피우지 못한 채 그렇게 지고 말았지만 나는 안다. 아버지와 함께 하셨던 그 분들이 계셨기에 오늘이 있을 수 있었다는 것을...
지난 7월 4일 <진실과 정의를 향한 과거청산 결의대회>가 국회에서 열렸다고 하니 이제 <제 2기 과거사 진상조사 위원회>가 곧 출범 하리라 생각한다. 다시는 내 아버지의 조국 그리고 내 조국에서 앞서가신 민족 민주 투사들의 뼈아픈 과거가 되풀이 되지 않으리라 굳게 믿어 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