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503년 6월 24일
덴마크에서 종교개혁이 일어난다
카톨릭 교회의 개혁을 요구하는 목소리가 곳곳에서 들려오고 있었다
하지만 이단은 과거에도 많았다
별 사건없이 지나가리라 생각한 통치자들은 신경쓰지 않았다
사보이 공작도 크게 신경쓰지 않고 추가 교회세를 걷고 있었다
롬바르디아 권역이 드디어 사보이의 손에 들어왔다
또한 공작은 지역민의 문화를 수용한다
그들은 이제 사보이의 지배를 거부하지 않을 것이다
공작은 이탈리아의 새로운 위협으로 부상할 스페인과 싸우고 싶지 않았다
스페인 역시 북이탈리아에서 제법 영향력있는 사보이와 척질 이유가 없었다
1504년 5월 28일
필립포 공작은 스페인에 왕실결혼을 주선한다
개혁이 오든말든 타락한 교황은 계속 욕심을 내고 있었다
교황은 이탈리아의 완전한 통치를 원했다
1505년 2월 2일
지역에서 모집하는 군대를 훈련시키는 것은 이제 효과가 없었다
공작은 범람하는 신식무기를 수용하고 상비군들을 훈련시키고 전문화 시키기로 결심한다
이를 위해 이탈리아 콘도티에리와 계약을 맺고 그들의 전투방식과 훈련을 배워오기로 한다
1585년 4월 1일
스페인은 사보이 공국에 동맹을 요청한다
이 동맹으로 튼튼한 지원군을 얻은 사보이 공작 입장에서는 환영할만한 일이었다
1505년 4월 8일
부르고뉴의 공작은 오스트리아의 팽창을 견제하고자 그들에게 전쟁을 선포한다
명분은 오스트리아가 합병한 지역들의 해방이었다
부르고뉴는 브라벤트,플랑드르,홀란드를 동군으로 연합한 강력한 나라였지만 이 전쟁은 그들의 큰 오판이었다
부르고뉴의 병력은 총 3만
모두 모여야 헝가리와 간신히 쌍벽을 이룰정도였지만
아쉽게도 오스트리아 연합의 병력은 그 배를 이루고 있었다
이는 큰 기회였다
공작은 기회를 놓치지 않고 부르고뉴 권역의 지방들을 빠르게 공격하기 시작했다
누가 봐도 결과는 뻔해보였다
이는 명백한 부르고뉴의 실책이었다
하지만 부르고뉴는 강대국이었고 그 힘을 무시할수만은 없었다
1506년 11월 22일
부르고뉴의 수도가 함락되고
그리고 다시 추가 전쟁세를 걷었다
부르고뉴의 권역은 거의 점령됬지만 저지대는 요새가 많아 공격이 힘들었다
1509년 3월 12일
전쟁을 버티지 못한 브르타니 공작은 오스트리아와 조약을 맺는다
전쟁이 시작된지 4년이 지났지만 오스트리아 연합은 아직도 저지대를 점령하지 못했다
1510년 1월 3일
길어지는 전쟁에 결국 공작은 프랑슈-콩테를 할양받고 전쟁을 멈추기로 한다
사보이가 프랑슈-콩테를 수복했지만 신성로마 황제는 이를 좋게 보지 않았다
그리고 점령지역을 제국에 반환하라고 요구한다
하지만 황제는 이탈리아에 아무런 힘이 없었다
이탈리아의 맹주라 불릴만큼 사보이 공국은 제법 큰 힘을 가지게 됬고
주변의 강대국들이 스스로 자멸하면서 어느정도 여유가 생긴 필립포 공작은 북이탈리아로 관심을 돌리기로 한다
전쟁이 끝난지 채 1년도 되지 않은 1510년 11월 7월
사보이 공국은 다시 밀라노를 공격한다 북 이탈리아의 모든 권역은 사보이의 것 이어야만 하기에
이탈리아는 사보이의 것이다!
사보이는 영원하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