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민주 한중연 연구원 조선 왕실 복식연구서에 나타난 ‘옷 짓는 여인들’
《 조선시대 임금이 정무를 볼 때 입었던 곤룡포. 가슴과 등, 어깨에 새긴 용무늬가 인상적인 이 옷을 입은 임금의 어진(초상화)을 보고 있으면 미묘한 차이를 발견할 수 있다. 태조의 곤룡포에 그려진 용은 몸을 뒤틀며 비상하는 비룡(飛龍) 또는 행룡(行龍)의 옆모습인 데 비해 영조의 곤룡포에 있는 용은 정면을 바라보고 있기 때문이다. 이런 차이는 과연 어디에서 유래한 것일까?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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곤룡포의 용무늬태조의 용은 몸을 비틀며 승천하는 비룡(飛龍), 영조의 용은 정면을 바라보는 모습이다. 각각 건국 초기의 역동성(태조)과 경제적 문화적 황금기의 안정감(영조)이 반영된 형상이라는 해석이다. 고종의 용도 정면을 보고 있지만 이금(泥金·아교에 갠 금가루)으로 그린 태조와 영조의 용과 달리 금실로 수를 놓았다. 옥대 위치와 소매태조는 옥대(허리 띠)를 배꼽 바로 아래에, 영조와 고종은 가슴께까지 올려서 찼다. 팔소매 모양도 태조는 좁고 긴 소매를 입은 반면, 영조와 고종의 옷은 폭이 넓은 두리소매로 차이가 있다. 왕의 체형이나 옷 취향에 따라 패션도 달랐던 셈이다. 곤룡포의 색 변화태조는 청색, 영조는 홍색, 고종은 황색으로 곤룡포의 색이 시대에 따라 다르다. 청색 곤룡포를 입은 왕은 태조가 유일하며 이후 조선의 왕은 홍색 곤룡포를 입었다. 태조의 청색 곤룡포는 오방색 중 동쪽을 뜻하는 푸른색 곤룡포를 입으라는 중국 명나라의 입김이 작용한 탓으로 보고 있다. 고종의 곤룡포가 황색인것은 대한제국 황제로 즉위하면서 오방색 중 중앙을 상징하는 황제의 색을 쓴 것이다. 이민주 박사 제공 |
최근 한국학중앙연구원(한중연)출판부에서 출간한 조선 왕실의 복식 연구서 '용을 그리고 봉황을 수놓다'(한국학중앙연구원출판부)에 그 답이 있다. 저자인 이민주 한중연 국학자료연구실 연구원은 "태조의 용이 조선 개국 초기의 역동성을 보여준다면, 영조의 용은 경제적 문화적 황금기에서 묻어나는 안정감이 반영된 모습"이라고 설명했다.
그렇다면 이런 왕실 의상과 신발, 장신구는 누가 어떻게 만들었을까? 상의원(尙衣院)과 제용감(濟用監)이란 기관에 소속된 침선장(針線匠)과 침선비(針線婢)가 만들었다. 상의원은 왕실 의상을 전담했고 제용감은 주로 관리의 의상을 만들면서 상의원의 업무를 도왔다. 원래는 둘 다 독립된 기관이었으나 조선 말기 육전조례가 만들어지면서 상의원은 공조, 제용감은 호조 소속 기관이 됐다.
침선장은 양민과 천민 출신의 남성 장인이었다. 상의원에 소속됐던 침선장만 68개 분야, 597명이나 됐다는 기록이 경국대전에 전해진다. 침선비는 바느질을 전담하는 침방과 수놓기를 전담하는 수방 소속 궁궐 나인을 뜻했다. 이들 중 누가 실제 의상디자인을 맡았는지에 대한 기록은 없다. 침선장에 대한 사료는 그 숫자 정도만 남아있는 데 비해 침선비에 대해선 숫자에 대한 기록은 없지만 그 역할에 대한 기록은 상대적으로 많은 편이다.
침선비는 7, 8세 나인 가운데 손재주가 야무지고 꼼꼼한 성격의 사람을 가려 뽑아 도제식으로 기술을 전수했다. 업무 강도가 높아 손가락에는 바늘에 찔린 상처가 아물 날이 없었지만, 바느질을 못하면 그 책임을 물어 투옥되기도 해 긴장을 늦출 수 없는 직업이었다. 침선비는 평소 옷을 짓다가도 궁중 연회가 열리면 춤과 노래도 담당했다. 침선비의 다른 이름이 '상방(상의원의 다른 이름)기생'이었던 이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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왕비는 이렇게 옷을 입었다왕비의 가례 때 옷을 입는 순서. 저고리 안에 받쳐 입는 속옷 삼아(杉兒)부터 가장 겉에 걸치는 적의(翟衣)와 각종 장신구에 이르기까지 무려 12단계나 되는 과정을 거쳐야 한다. 이민주 박사 제공 |
조선왕조실록을 보면 침선공 침선비에게 유독 상을 많이 내린 임금이 있었으니 폭군 연산군이었다. 여색을 밝힌 탓에 자신이 총애한 장녹수와 기생들에게 줄 선물로 옷과 옷감을 들이라는 명령을 수시로 내렸고, 상방기생으로 출연할 연회를 많이 연 탓 아니었을까.
의복의 세탁도 침선비의 몫이었다. 왕실의 옷은 비단 소재가 많아 세탁할 일이 많지는 않았다. 하지만 검소함을 중시한 중종과 영조, 정조 같은 임금은 제례복과 곤룡포 같은 법복 외에는 모시나 명주로 지어 세탁이 가능한 옷을 입어 백성의 진상 부담을 조금이라도 덜어주고자 했다.
왕실의 권위를 나타내는 색깔은 보라색과 빨간색이었다. 하지만 보라색 염료인 자초는 그 가격이 근당 쌀 5∼8말, 빨간색 염료인 홍화는 근당 쌀 10∼11말에 이를 정도로 비쌌다. 이 때문에 세종 때는 사간원이 "사치를 막아야 한다"며 왕실을 제외한 백성들이 이들 색깔의 옷을 입는 것을 금지해야 한다는 상소를 올렸다. 이민주 연구원은 "조선 중기 문헌에도 고위 관료 집안에서 홍화를 구입해 붉은 옷을 지어 입었다는 기록이 있는 것으로 보아 금지의 실효성이 높지는 않았던 것 같다"고 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