열차가 멈췄다. 방송장비는 꺼졌고 가까운 곳에 확성기도 없었다. 동요한 승객이 유리창을 깨고 탈출하다 부상을 입었다. 열차 충돌이었다. 당시 3년차 KTX 승무원이던 이 아무개씨(30)는 담당 구역인 10호차에서 18호차까지 뛰어가며 소리쳤다. “열차가 탈선됐습니다. 18호차 쪽으로 오시면 하차 도와드리겠습니다!” 이씨는 열차 후미 문을 직접 열어 승객 대피를 유도했다. 1호차에서 9호차를 담당하던 동료 승무원도 같은 일을 했다. 2013년 8월31일 대구역 열차 충돌·탈선 사고로 시민 21명이 다쳤다. 그날 충돌한 서울행 KTX와 부산행 KTX, 무궁화호에는 승객 1366명이 타고 있었다.
이 KTX 승무원들은 사실 업무 매뉴얼을 어긴 셈이었다. 이들은 KTX를 운행하는 코레일이 아니라 코레일의 자회사인 코레일관광개발(이하 관광개발) 소속이다. 당시 관광개발의 ‘비상시 업무대응 매뉴얼’에 따르면, 열차 충돌·탈선 시 관광개발 승무원의 역할은 ‘안내방송’에 그친다. 출입문을 개방해 승객을 하차시키는 일은 코레일 소속 열차팀장 몫이다. 충돌·탈선뿐 아니라 독가스 살포·사상 사고 등 모든 비상 상황에서도 승무원의 임무는 ‘안내방송’과 ‘환승 시 승객 안전에 유의’가 전부이다. 응급구호 조치, 승객 대피 유도, 피해 상황 보고는 모두 본사인 코레일 직원이 담당하도록 되어 있다.
2013년 대구역 사고 당시 서울행 KTX에는 코레일 열차팀장 1명과 이씨를 포함한 관광개발 소속 승무원 3명(1명은 판매승무원)이 타고 있었다. 매뉴얼상 유일한 안전 책임자인 코레일 열차팀장은 수년간 현장에서 떨어져 근무하다가 8시간짜리 교육만 받고 사고 당일 대체 투입된 직원이었다. 열차팀장은 문을 여는 방법을 몰랐다. 승무원 이 아무개씨는 말했다. “팀장님은 아무것도 모르는 분이었고 관제에 보고하느라 바빴어요. 그런 상황에서 ‘저희 일은 안내방송인데요’라고 모른 척할 수가 없었죠. 코레일 소속 기장님에게 따로 ‘저 승무원인데 뒤쪽 승강문 수동으로 취급하겠습니다’ 무전으로 보고하고 문을 열었어요.”
비행기나 기차 등 다중이 이용하고 사고가 나면 대형 참사로 이어지기 쉬운 교통수단을 이용할 때, 승객이 생각하는 승무원이란 ‘서비스 제공자’보다 ‘안전 책임자’에 가깝다. 비행기를 탔을 때 스튜어디스의 주요 업무는 구명조끼 착용법을 알려주고 승객의 안전벨트를 점검하는 일이지, 면세품을 판매하고 기내식을 제공하는 일이라고 생각하는 승객은 그리 많지 않을 것이다.
‘안전업무’ 뺀 반쪽짜리 승무원
그런데 KTX는 다르다. KTX에서 만날 수 있는 승무원 넷 중 셋은 승객들이 으레 생각하는 ‘승무원’이 아니다. 코레일은 2004년 KTX 개통 당시부터 안전 관련 업무와 고객서비스 업무를 분리해, 고객서비스 업무를 자회사(홍익회→한국철도유통→KTX관광레저→코레일관광개발)에 위탁(외주화)했다. 이 업무 분리대로라면 KTX에서 만나는 승무원 대부분은 엄밀히 말해 ‘안전업무’를 뺀 ‘고객서비스 업무’만 맡은 반쪽짜리 승무원에 불과한 셈이다. 실질적으로 이 승무원들이 현장에서 수행 중인 업무 범위를 전혀 고려하지 않은, 비상식적 분리이다.
2013년 대구역 사고 이후 이런 비상식적 업무 분리의 문제점이 드러나자, 관광개발은 매뉴얼을 바꾸었다. 사고 직후인 2013년 9월25일 매뉴얼 개정으로 ‘사상자 응급구호’ ‘승객 안전 대피 유도’와 같은 몇몇 항목이 관광개발 소속 승무원 업무에 포함됐다. 2015년 5월에는 코레일 소속 열차팀장에게만 주어지던 화재 진압과 비상시 문 개방을 포함한 대부분의 안전업무도 관광개발 승무원에게 추가됐다. 2017년 6월 현재 적용 중인 관광개발의 ‘열차승무원 비상대응 매뉴얼’을 보면, 관광개발 승무원은 코레일 열차팀장 유고 시 열차팀장 업무를 수행한다. 환자가 발생했을 때에는 열차팀장과 관광개발 승무원이 함께 응급구호 조치를 하고, 승객 안전 대피를 유도하며, 불이 나면 즉시 소화기로 진압한다. 4년 전과는 달리, 관광개발 승무원도 안전업무를 상당 부분 담당하게끔 바뀐 것이다.
그러나 아직까지 KTX 승무원의 업무 매뉴얼 곳곳에는 비상 상황과 어울리지 않는 단어가 있다. ‘협조’다. 현재 관광개발 소속 KTX 승무원이 안전업무를 담당하고 있느냐는 <시사IN>의 질문에 코레일은 이렇게 답했다. “철도공사(코레일) 직원인 열차 승무원이 안전업무를 담당하고, KTX 위탁 승무원은 열차 내 고객 안내 업무를 맡고 있으며, 이례 사항 발생 시에는 철도공사 열차 승무원과 위탁 승무원 간 상호 협조하고 있음.” 안전업무가 위탁 승무원의 본업은 아니지만 위급할 때는 ‘도와줄’ 수 있다는 것이다.
처음부터 그랬던 건 아니다. KTX가 개통한 2004년 코레일(당시 철도청)은 지금과 달리 외주 승무원이 안전업무를 담당하게끔 했다. 2004년 3월 코레일이 작성한 ‘KTX 고속열차 여승무원 업무 프로세스’에는 차내 화재 발생 시 여승무원(초기에는 여성만 승무원으로 모집했다)의 역할이 이렇게 쓰여 있다. “신속하게 소화기 등을 이용하여 초기 진화에 노력한다” “전 승무원을 동원하여 화재 진화에 노력한다” “대형 화재일 경우 속히 열차를 정차시키고 비상 유리창을 깨고 또는 비상 사다리를 통해 신속하게 대피시킨다”.
2004년 10월 코레일이 작성한 ‘이례 상황 시 열차 승무원의 조치’라는 자료는 현재 코레일과 관광개발로 이원화된 비상 매뉴얼의 전신이다. 이 자료는 코레일 열차팀장과 외주 여승무원을 “고속열차 승무원”이라 통칭한다. 자료에는 “화재 시 열차 승무원은 열차팀장의 지시를 받아 화재 진압 및 승객 대피, 보호 등에 참여”한다고 적혀 있다. 여승무원이 코레일 지시·보고 체계에 완전히 섞여서 일하는 구조다. 매뉴얼에는 터널 내 탈선 시 “승무원을 적정 개소에 배치하여 승객의 안전을 지키도록 한다”라고 쓰여 있다. 열차 운행 중 인명 사고가 일어났는데 공안요원(철도경찰)이 타지 않았을 경우에는 열차팀장이 “열차 운행 업무를 여승무원에게 인계 후 현장에 잔류하여” 사고를 수습한다고도 되어 있다. 매뉴얼은 일관되게 여승무원의 신속한 조치와 열차팀장에 대한 보고를 강조한다. 코레일 열차팀장과 여승무원이 유기적으로 협력하며 안전업무를 공동으로 담당하기에, 코레일은 이들을 직접 함께 교육하고 훈련시켰다. 업무 관리·감독도 했다.
이랬던 안전 매뉴얼이 싹 뜯어고쳐진 것은 2006년 KTX 여승무원 간접고용 문제가 불거지면서부터이다. “여승무원들의 고용을 책임지지 않기 위해 ‘서비스와 안전은 다르다’는 논리를 편 거죠. 그 과정에서 안전에 관한 여승무원들의 역할이 대폭 축소됐어요”라고 김영준 철도노조 비정규 조직국장은 말했다.
2006년 3월 KTX 여승무원들이 직접고용을 요구하며 파업에 들어갔다. 승무원들은 자신들이 코레일 소속 노동자라고 주장했다. 형식적으로는 자회사에 고용됐지만 업무를 지시하는 사실상의 사용자는 코레일이라는 것이었다. 논란의 핵심은 ‘도급이냐 파견이냐’였다. 일을 시키는 것은 코레일인데 고용은 다른 회사가 하면 ‘파견’이다. 이에 코레일은 KTX 승객서비스 업무를 적법하게 ‘도급(외주)’ 주었다고 맞섰다. 도급은 어떤 일을 완성하면 그에 대한 보수를 지급하기로 하는 민법상의 계약이다(민법 제664조). 여승무원들은 ‘중간에 낀 자회사는 허울뿐이며 코레일 소속 열차팀장에게 지시를 받고 그들과 섞여서 업무를 수행’한다고 주장했다. 코레일이 KTX 승객서비스를 외주 주었다고 위장하고 있을 뿐 실상은 불법파견 또는 위장도급이라는 것이다.
3년 파업 끝에 이들은 2008년 소송을 제기했다. 2010년 8월 서울중앙지방법원은 여승무원들의 손을 들어주었다. 이들을 자회사가 아닌 코레일 소속 노동자라고 봤다. 중간에 낀 자회사는 노무 대행기관에 불과하다고 봤다. 코레일은 항소했지만 2011년 2심 재판부 역시 여승무원의 손을 들어주었다. 특히 2심 재판부는 승객서비스 업무의 특성상 열차팀장과 여승무원의 업무 영역이 혼재돼 있어 이 가운데 여승무원 업무를 분리해서 도급 형식으로 위탁할 수 없다고 봤다. 여승무원 업무에 승객 안전과 밀접하게 관련된 부분이 상당 부분 존재한다는 점이 주요 근거였다.
코레일은 상고했다. 적법한 도급임을 주장하기 위해 ‘열차팀장은 안전, 승무원은 서비스 업무를 수행하며 둘의 업무는 명백히 분리된다’는 논리를 폈다. 위기상황 시 승무원 역할은 안내방송뿐이라는, 현실과 동떨어진 매뉴얼은 그래서 나왔다. 이 논리로 코레일은 2015년 대법원에서 승소했다. 대법원은 코레일 소속 열차팀장의 업무와 여승무원의 업무가 각각 안전업무와 고객서비스 업무로 구분된다고 봤다. 화재 등 비상사태가 발생할 경우 여승무원도 열차팀장 지시하에 안전업무를 하지만, 이는 “이례적인 상황에서 응당 필요한 조치에 불과”하고 KTX 여승무원 업무에서 차지하는 비중도 낮다고 했다. 업무가 명확히 구분되므로 자회사의 독립적 역할도 인정된다고 봤다.
9년간 싸워오던 여승무원들에게 대법원 판결은 충격이었다. ‘승객 안전을 책임지는 승무원’의 정체성이 부정당했다. 길이만 400m 가까운 열차 안에 코레일 소속 열차팀장 1명과 승무원 3명이 탄다. 18량 KTX 열차 정원은 931명(KTX 산천은 8량이며, 좌석 정원 363명이다. KTX 산천에는 열차팀장 1명, 승무원 1명, 판매승무원 1명이 탑승한다). 사실상 제한 없이 입석을 받는다는 점을 감안하면, 열차 하나에 몸을 실은 승객은 최대 1000명에 이른다. 2인1조 철도경찰은 KTX 열 대 중 넉 대꼴로 취약시간대 열차에만 오른다. 지하철과 달리 KTX는 역과 역 사이 거리가 15분에서 20분가량 떨어져 있다. 역무원도 없는 선로에서 승객 1000명의 안전에 문제가 생겼을 때 기관사를 제외한 대응 인력은 단 4명. 대법원은 그중 3명을 안전업무의 책임자가 아니라고 판결한 셈이다. “안전과 서비스 업무를 분리할 수가 없어요. 그렇게 따지면, 열차 안에 불이 났을 때 우리는 그냥 승객들하고 같이 도망가면 돼요. 그런데 그게 아니잖아요. 열차에서 사고가 나면 승무원을 가장 먼저 찾는 게 당연한데….” 직접고용을 요구하다 2006년 해고된 KTX 여승무원 박미경씨(36)가 말했다.
해고 여승무원 남소영씨(38)는 ‘이례적인 상황에서는 안전업무를 하지만, 안전이 승무원의 업무는 아니다’라는 대법원 판결문이 무슨 뜻인지조차 혼란스럽다. 남씨는 “말 자체가 모순이라고 생각해요”라고 말했다. 안전업무는 원래 만에 하나 있을지 모를 이례적인 상황에 대비하는 일이다. ‘만에 하나’인 상황에서 안전업무를 한다면, 그게 ‘안전업무 담당’이라는 말과 무엇이 다른지 남씨는 납득하기 어렵다. ‘만에 하나’에 대비해 시간과 비용을 들여야 한다는 사실은 세월호 참사로 한국 사회가 뼈아프게 얻은 교훈이다. 해고된 여승무원들은 이 교훈이 왜 KTX에는 적용되지 않느냐고 되묻는다.
대법원 판결로 코레일은 관광개발 승무원이 수행하는 안전업무를 ‘협조’라 부르며 간접고용을 유지할 수 있게 됐다. <시사IN>이 안규백 더불어민주당 의원실로부터 받은 코레일의 ‘고속철도 대형사고 위기대응 실무 매뉴얼’은 위기상황 시 승무원 수를 5명으로 상정했다. 지난해 9월 국정감사 때 승무원 수가 현실과 차이가 크다는 안규백 의원실 지적에 코레일은 위기상황 시 승무원 인원을 4명으로 고쳤다. 코레일 소속 열차팀장 1명과 외주 승무원 3명을 뜻한다. 코레일은 외주 승무원을 매뉴얼상으로는 비상시 대응 인력으로 간주하면서도 안전업무는 협조만 한다고 주장하는 것이다.
불법파견을 쉬쉬하는 현장에서 안전은 뒷전이 되었다. 현재 코레일 열차팀장과 관광개발 승무원은 합동 훈련을 의무적·주기적으로 하지 않는다. 이따금 3년에 한 번 정도 사고가 터지면 코레일이 열차팀장을 교육하는데, 그때 관광개발 승무원이 끼어서 같이 훈련받는 정도다. 그마저도 시간을 내어 자원하는 일부 승무원에 한해서다.
관광개발 소속 8년차 KTX 승무원 이 아무개씨(35)는 지금까지 이런 훈련을 딱 세 번 받았다고 말했다. 그 가운데 비상 사다리를 직접 손에 잡아본 건 한 번뿐이다. “근무시간에 안전 교육에 참여하면 자회사(관광개발)에서는 그 시간만큼 임금을 주지 않아요. 노조에서 교육 시간 임금 지급을 요구하자 자회사는 직접 만든 동영상·사진·문서로 형식적인 교육을 하고 있어요. 고객 안전을 투자가 아니라 비용으로만 보는 거죠.”
신입 중에는 비상 사다리나 소화기를 직접 설치하거나 사용해보지 않은 이도 적지 않다고 한다. 관광개발에서 소방기관에 의뢰해 심폐소생술 등 일부 교육 프로그램을 마련하지만 8년차 승무원 이씨는 부족하다고 느낀다. “시설 사용이나 전문성을 생각하면 원청인 코레일에서 우리를 교육해야 하지만, 그렇게 하면 우리가 안전업무를 한다는 걸 인정하는 꼴이 돼요. 그럼 불법파견, 직접고용 소송에 휘말릴 수 있으니 그렇게 하지 않는 거죠. 안전업무에 대한 권한이 애매하니 승무원들도 소극적이 될 수밖에 없어요. 당장 소속과 권한이 다르니까 책임 회피 문제가 생겨요. 열차팀장과 유기적 협조를 하기 힘들어요.”
세월호 참사에서도 얻지 못한 교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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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혜원 기자 [email protected]
출처 | http://v.media.daum.net/v/20170620161802947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