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명(明) 왕조 멸망사 : 누르하치 라이징 - (9)
게시물ID : history_13571짧은주소 복사하기
작성자 : Belisarius
추천 : 23
조회수 : 2154회
댓글수 : 6개
등록시간 : 2014/01/15 16:24:30
 
 
- 누르하치 라이징 -
 
 
 
 
남은 것이라고는 '갑옷 열세벌' 과 조부와 아버지의 사망 위로금으로 이성량이 준 소량의 재물 밖에 없었던 누르하치에게 도움의 손길을 내민 후원자는 다름아닌 명(明)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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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동안 교창안과 탑극세는 뭇 여진족 추장들 가운데 거의 유일무이하게 명에 대해 협조적인 태도를 보인데다 거기서 비롯되어 명조(明朝)에 해준 일들이 제법 많았다. 더구나 그 최후까지 명조를 위해 싸우다 전사하기까지 했으니 그 공로를 무시할 수는 없는 노릇이었다. 그래서 그 후손인 누르하치에게 위로할 겸해서 여러 혜택을 베풀어 주기로 했던 것인데, 이는 곤궁했던 누르하치에게 상당한 도움이 되었다. 

 
명의 지원은 주로 이성량(李成梁)을 통해 이루어졌다. 이성량은 누르하치에게 조부와 아버지의 벼슬이었던 건주좌위(建州佐衛)를 잇게 하는 한편 직위로는 종 2품에 해당되는 도독첨사(都督僉事)로도 임명하여 자신의 도독부 부서를 관장할 권한도 부여한다. 또한 매년 중국왕조가 변방의 이민족들에게 내리는 세폐도 유독 누르하치에게는 전폭적으로 하사하고 조부와 아버지의 위로금 명목으로 내린 군자금과 물자까지도 넘겨주었다.
 
 
명 조정과 이성량이 이토록 누르하치에게 물심양면으로 지원을 아끼지 않은데에는 비단 교창안과 탑극세의 희생에서 기인한 죄책감(?) 외에도 나름대로의 계산도 포함되어 있었다.
 
 
건주여진(建洲女眞)이 여러 여진족 분파 가운데 가장 강성해서 이이제이의 도구로 점찍었다지만 상대적으로 다른 여진족들이 명에 대해 비협조적이었기에 건주여진을 택한 감도 있었다. 다른 두 부족인 해서여진(海西女眞)이나 야인여진(野人女眞)은 건주여진에 비해 명에 대한 악감정이 심했고 또 저들끼리의 내분으로 시끄러워 명에 협력해본들 별다른 도움도 되지 못했다. 이러한 성향은 명에 대해 협조적이었던 건주여진의 추장 교창안과 탑극세가 죽은 이후에도 변하지 않았기에 건주여진에 대한 후원은 유효했던 것이다.
 
 
특히 불과 26세의 나이의 젊은 지도자인 누르하치는 여러모로 쓸만해 보였을 것이다. 조부와 아버지가 다른 여진족들과의 싸움에서 죽은 일은 한창 혈기왕성한 젊은이의 다른 여진부족들에 대한 복수심을 불태우기 충분했을 것이며 이를 통해 개겨대던 여러 여진부족을 진압하는 충실한 도구로 삼기엔 안성맞춤이었다. 또한 부족의 존속을 위해 대국 명에게 대항않던 선조들의 노련함과 처세술은 스물 여섯의 누르하치와는 거리가 멀어보였고 그저 뭣도 모르는 어린 고아 놈 하나 좌지우지하기란 쉬웠을 것이다. 그러나 이것이 크나큰 착각이었음은 머지않아 드러난다.
 
 
이유야 어찌되었건 누르하치는 명의 전폭적인 지지를 토대로 서서히 세력을 불려나가기 시작한다. 군사를 모으고 말을 사들이며 병장기를 손질하여 불구대천지원수 명에게 복수하는 그 날만을 기다리며 꼬박 1년 동안 꾸준히 힘을 키워나갔다.
 
 
그리고 서기 1584년, 누르하치는 조부와 아버지의 원수를 갚는다는 명분 하에 니칸 와일란을 친다. 명이 아닌 니칸 와일란을 공격하니 좀 뜬금없어 보일지 모르겠는데 제아무리 누르하치가 힘을 키웠다 한들 곧장 대국의 명에게 덤비는 것은 계란으로 바위를 치는 격이었다. 본론에 들어가기에 앞서 마땅히 선행되어야 할 일은 분열된 여진부족의 통일이었다.
 
 
이는 누구보다 누르하치 본인이 제일 잘 알고 있었을 것이다. 당장 분열된 여진족도 통합하지 못한 마당에 명과의 전면전이란 자살행위나 다름없었다. 원수갚는 일을 보다 장기적 차원에서 고려할 필요가 있던 누르하치에게 니칸 와일란은 부조의 원수도 갚을 겸 마땅히 제거해야 할 적들 중 하나였고 니칸 와일란에게는 불행하게도 누르하치의 통일사업의 첫번째 희생자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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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 드라마에서의 니칸 와일란.
 
"성량성님.. 지는 형이 시키는 대로 했을 뿐이구먼유.. 좀 도와주시라요."
 
 
 
니칸 와일란은 사실상의 원인 제공자 이성량에게 도움을 요청하지만 이성량은 여진족 간의 일이라며 딱 잘라 거부해버린다. (토사구팽 마스터) 결국 물밀듯 쳐들어오는 누르하치의 병력을 막지 못하고 니칸 와일란 본인은 잡혀 죽임을 당하고 휘하 병력은 피박살이 나 와해되어버린다. 
 
 
니칸 와일란의 세력은 당시 다섯개로 나뉜 건주여진 중 한 부족이었다. 누르하치는 이를 시작으로 나머지 세 부족도 차례로 복속시켜 처음으로 군사를 일으킨지 5년만인 서기 1589년, 건주여진 통일을 달성한다.
 
 
건주여진의 통일은 누르하치에게 세력이 불어났다는 것 외에도 다른 이점을 제공했다. 당시 여진족은 종주국인 명과 활발한 무역을 벌이고 있었는데 그중 만주의 토착 생산품인 인삼, 모피, 진주는 명에서도 꽤나 인기 끌던 상품으로 여진족 상인들은 여기서 상당한 금액을 벌어들이고 있었다. 밑의 지도에서도 확인할 수 있듯이 그 중 명에 가장 인접해있던 건주여진의 땅은 상품이 유통됨에 있어 필연적으로 경유하는 곳이었고 그 유통로를 장악하게 된 건주여진 땅에는 상인들이 몰려들어 건주여진족은 그 중간에서 상당한 이익을 보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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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일 서쪽에 위치한 건주여진족.
 
명으로 가기 위해서는 건주여진 땅을 거쳐가야만 했다.
 
 
 
이렇게 축적된 막대한 부는 고스란히 때마침 건주여진의 주인이 된 누르하치에게로 넘어갔고 든든한 자금줄이 되어 성장의 밑거름 역할을 톡톡히 해낸다.
 
 
건주여진의 통일로 만주에서 무시못할 세력으로 급성장한 누르하치는 주위 세력에게 상당한 위협감을 심어주고 있었다. 다른 여진세력들도 그랬겠지만 누구보다 놀란 이는 여진족 감독관 이성량이었다.
 
 
한낱 코흘리개로만 여기던 차에 어느덧 건주여진을 통일하고 뭇 여진족들 가운데 군계일학으로 성장한 누르하치에게서 불현듯 과거 아골타(阿骨打)의 재림을 감지한 이성량은 경계심을 갖고 누르하치를 예의주시한다.
 
 
누르하치를 의심하는 이성량의 보고서를 받아본 명의 조정에서는 누르하치를 힐문하고자 사신을 보낸다. 조정의 사신이 직접 변방의 오랑캐 땅을 방문하리만큼 누르하치의 세력이 막강했음을 단적으로 보여주는 증거이기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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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것봐라? 너는 신하고 나는 주인이야. 그러니 얼른 충성인증 ㄱㄱ"
 
 
아직까진 그 역량의 차이를 인정할 수 밖에 없었던지라 예전부터 명의 심기를 건드리는 일은 최대한 자제해왔던 누르하치였다. 그러다 결국엔 노골적인 의심을 사게 되자 기왕 충성인증 하는거 그 후로는 의심조차 못하게 제대로 보여주자라고 결심하기라도 한 듯 서기 1590년, 누르하치는 직접 명의 도성 북경(北京)에 입조하여 조공을 바치고 감사를 표한다. 
 
 
이 반짝 이벤트로 명에서도 잠시나마 의심을 푸는 듯했지만 한번 시작된 의혹을 풀기란 그리 쉽지 않았다.
 
 
의심은 계속되어 서기 1593년, 명 조정은 이성량의 건의를 받아들여 누르하치에게 용호장군(龍虎將軍)이라는 직위를 내린다. 언뜻 보면 기존의 도독첨사에서 벼슬을 높여준 것처럼 보였지만 여기에는 여전히 누르하치에게 복속의 뜻을 보이라는 무언의 압박이 담겨있었다.
 
 
명의 관직하사는 누르하치가 여전히 명에 복속된 신하이며 또한 이에 상응하는 태도를 보일 것을 요구하는 암묵적인 표현이었다. 달리말하자면 한마디로 누르하치에게 명이 쫀 것이다. 명이 관직을 준 것은 무언의 압박으로 누르하치에게 여전히 명의 신하임을 상기시켜주고자 했던 목적도 있지만 또 한편으론 벼슬을 올려주어 회유하고자 했던 시도이기도 했다. 당근과 채찍, 이는 중화왕조의 대이민족 정책 기본이념이기도 했다. 
 
 
이후로도 누르하치는 계속해서 자신이 명의 충실한 신하임을 피력했고 명에서도 서서히 의심을 거두기 시작한다. 이때 누르하치가 써먹은 방법 중 하나가 바로 당시 1592년에 벌어진 임진왜란 참전건의다. 명이 베풀어준 하해와 같은 은혜를 갚고자 휘하의 건주여진을 이끌고 명을 돕겠다고 자청하고 나섰던 것인데, 이는 전쟁 당사자인 조선과 또 이를 꺼림직하게 여긴 명의 반대로 무산되기는 했으나 누르하치가 노린 효과는 들어먹혔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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만약 여진족이 출동한다면 어떨까? 여! 진! 족!
 
 
 
겉으로는 명의 신하임을 자처하면서 안으로는 장차 원수 갚을 일에 몰두하던 누르하치에게 이제 남은 것은 여진족 전체의 통일이었다. 복수를 위해선 마땅히 선행되어야 할 숙명적인 대업이었다. 하지만 이렇다할 명분도 없이 먼저 전쟁을 일으키기엔 명의 의심이 두려웠다. 가뜩이나 건주여진 통일만으로도 의심받는 판국에 여진전체의 통일이란 실로 많은 리스크를 감내해야만 하는 대업이었다. 그러나 기회는 머지않아 절로 굴러들어온다.
 
 
서기 1593년, 그동안 건주여진의 성장을 아니꼬운 눈길로 바라보던 해서여진을 필두로 한 아홉개 부(部)의 여진족이 합세하여 싸움을 걸어오는 일이 일어난다.
 
 
주모세력은 넷으로 쪼개져있던 해서여진 부락 중 제일 강력했던 예허부(叶赫部)였다. 누르하치의 성장도 아니꼽기도 했지만 그들이 전쟁을 일으킨데에는 지극히 기본적인 생존권과 깊은 관련이 있었다.
 
 
앞서 누르하치가 무역로의 중심에 위치한 건주여진을 차지하여 이권을 갖고 많은 이익을 보았음은 얘기했다. 무역의 중심이다보니 상인들이 몰려들었고 그에 비해 다른 여진부족 땅에서는 장사가 되질 않아 먹고살기 힘들어졌던 것이다. 
 
 
건주여진의 땅만 일부 할양해주면 연합군을 해산하겠다 (순순히 땅만 내놓으면 유혈사태는 벌어지지 않을 것입니다) 는 해서여진 예허부의 요구에 누르하치는 택도 없는 소리 말라며 전쟁도 불사할 것을 표명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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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통일전쟁의 시작이다."
 
 
 
아홉부의 연합군과 누르하치의 건주여진군 양군은 고륵(古勒)이란 곳에서 격돌했고 결과는 누르하치의 건주여진군의 승리로 매듭지어진다. 이 전투로 해서여진은 물론이고 기타 여진부족들은 큰 타격을 입었고 결국엔 누르하치에 의해 모두 복속된다.
 
 
여기서 이런 의문을 가져볼 법하다. 누르하치가 건주여진을 통일하는 것만으로도 신경을 곤두세우던 명의 반응은 어땠을까.
 
 
물론 반응하긴 했다. 누르하치의 건주여진족이 기세를 올리자 명에서는 이 새끼 그럴 줄 알았다라는 식으로 나와 그나마 건주여진을 상대할 만하다고 여겨지던 해서여진의 예허부를 적극지원하여 이번엔 반대로 건주여진을 찍어누르려 했다. (사실상 이때부터 누르하치와 명이 적대하게 되었다고 봐도 무방하지 싶다.) 이는 고륵에서의 전투 이후로도 계속되었지만 전세는 이미 기울대로 기울어있던지라 결국엔 구도를 바꾸지는 못했다.
 
 
게다가 마땅히 여진족간에 분란을 관장하고 중재해야 할 이성량도 말년에는 타락하여 사치나 일삼다가 부정부패로 고발당하여 파직당하기 일쑤였고 이성량의 후임으로 부임한 후임 요동총병들은 생판 모르는 현지에서의 문제에 우왕좌왕하다가 뻘짓이나 저지르다가 그래도 그만한 전문가가 없는지라 결국에는 이성량이 다시 부임하는 등, 파직과 재임을 반복하는 실정이었다. 
 
 
하지만 무엇보다도 당시 만력제(萬曆帝)의 삽질로 인해 기본적으로 동북방의 여진족에게 신경을 쓸 여력이 못되는 형편이었던 것이 컸다. 누르하치가 본격적으로 성장하는 이 무렵에는 한창 명의 관심이 임진왜란에 쏠려있었던지라 상대적으로 관심을 쏟지 못했던 것인데, 누르하치에게는 실로 행운일 수밖에.
 
 
이러한 배경 속에서 누르하치는 고륵에서의 전투를 시작으로 차례로 여러 여진부족들을 제압해 나갔다. 
 
 
서기 1594년, 해서여진의 호룬부(扈倫部) 4부 정복 후 병합.
 
서기 1599년, 해서여진의 합달부(哈達部) 정복.
 
서기 1607년, 휘발부(輝發部) 정벌.
 
서기 1613년, 최후의 항거세력 오랍부(烏拉部) 정복.
 
 
오랍부를 마지막으로 만주에서의 여진족 세력은 대부분이 누르하치 휘하로 들어갔고 그로부터 3년 뒤인 서기 1616년, 누르하치는 스스로 칸(汗)의 자리에 올라 국호를 금(金)이라 하고 자신의 족속명인 여진은 만주(滿州)라 칭하게 했으며 연호는 천명(天命)이라 하여 정식으로 건국을 선포한다. (지금까지는 편의상 지역을 지칭하고자 만주라했는데 사실 이때부터 만주란 말이 생긴 것이니 양해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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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7세기 말엽의 정세. (사실 저당시 후금의 영역이 저렇게 요동까지 뻗치고 그러진 않았음)
 
명(明)과 후금(後金)의 전쟁이 본격적으로 시작되는 때였다.
 
 
 
국호를 금(金)으로 정한 데에는 과거 12세기 무렵 선조들이 세운 금(金)의 대통을 잇는다는 뜻이 담겨있어 이는 곧 여진족으로서의 정체성을 확립하며 한족의 명(明)에 대응하겠다는 의지를 보인 것이었다.
 
 
 
그동안 별러오던 복수가 시작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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