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릴때부터 꽤 오랜시간 먹어온 음룐데.. 서른 여섯에 어느 회사껀지 알았네요ㅎ 저같은분 또 계시려나요? ㅎㅎ
- 정식품 -
1937년 만 20세의 나이로 최연소 의사가 된 정재원 회장은 명동 성모병원 (현재 가톨릭대학교 의과대학 여의도 성모병원) 소아과 의사로 재직했다.
그러나 재직 당시 한 달에 수 차례씩 원인 모를 병으로 실려온 아이들이 사망하는 일이 벌어졌다.
치료법과 병명도 모르던 상황에 답답함을 느낀 정재원 회장은 약 20년 후 1958년 싱가포르에서 개최된 제1차 아시아 지역 소아과 국제대회에 참석하게 되는데 그것을 계기로 낙후된 소아 영양과 의료 시설에 눈을 돌리게 되고 곧바로 미국으로 유학을 떠났다.
미국 유학 중이던 1965년, 신간 의학서적에서 30년 전 모르던 병의 이름을 발견하게 되었다. 바로 <유당불내증> 이었는데 모유와 우유 속에 들어있는 유당성분을 소화하지 못하는 유아에게 발병한다는 사실과 이러한 아이들에게는 유당을 함유하지 않은 영양적 대용식을 먹여야 한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유당불내증>은 신체 내부에 유당을 분해하는 효소가 부족해 생기는 병으로 당시 아이들의 주식이었던 모유와 우유에 들어간 유당이 결정적인 원인이 된 것이다.
전문 지식이 부족했던 탓에 당시 아이들이 원인 모를 병에 지속되는 설사에 탈수 증세를 보이며 요절하는 일이 많이 일어났던 것이다.
그래서 시작된 것이 유당을 함유하지 않으면서도 3대 영양소가 균형 있게 들어 있는 콩을 이용한 대용식 연구인 것이다.
2년여에 걸쳐 콩을 갈아서 만든 두유를 가지고 동물사육실험을 실시하였고, 그 후 꾸준한 임상연구를 통해 베지밀 유아식의 기틀을 마련 하게 되었다.
정재원 회장은 어릴 적 어머니가 해주시던 콩국을 떠올리며 콩으로 된 유액을 만들어 유당불내증을 앓던 아이들에게 먹이니 효과가 나타나기 시작했다.
이 소문이 삽시간에 전국으로 퍼져나갔고 정재원 회장의 병원은 유액을 사러 온 부모들이 줄을 섰다.
넘치는 수요를 감당하지 못한 정재원 회장은 결국 1973년 경기도 용인군 신갈읍에 공장을 세우고 '베지밀'을 대량 생산하기 시작했다.
그러나 이 생산량으로도 수요를 감당하지 못해 1983년 충청북도 청주시에 새로운 공장을 세우고 1일 150만 개의 베지밀을 생산 및 공급하여 현재에 이르고 있다.
도시의 대형 할인마트부터 시골의 조그마한 슈퍼에 이르기 까지 어디서나 다양하게 볼 수 있는 <베지밀>은 정재원 회장이 소아를 위해 평생을 투자해온 그의 평생이 담긴 음료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