Q: 낙랑 목간은 낙랑군이 한반도에 있었다는 확실한 증거다??A : 목간 내용은 알고 얘기하는 거임? ▶낙랑목간 북한학자 의견 북한의 역사학자 손영종은 "력사과학" 198호(2006년)에 기 고한 "낙랑군 남부지 역의 위치"에 관한 글에서 목간에 나오는 인구를 분석하고, 또 그 현 중에서 위치가 요녕 지역이 분명한 탄렬(分錄山列水所出西至點禪入海行八百그十里), 패수(水西至增地入海), 함자(帶水西至帶方入海) 등이 들어 있으므로, 낙랑군 목간은 낙랑군이 천산산맥 서쪽에 있을 때인 기원전 45년에 요녕지역에서 낙랑군 인구조사를 한 것인데, 어떤 사유로 평양으로 이동되어 속리의 무덤에 묻힌 것으로 보고 있습니다.북한학계의 말도 자기들 논리에 맞는 것만 받아들이는 학계라서 .. 손영중의 논문은 개무시를 당합니다.그럼 낙랑 목간 내용 한번 들여다볼까요? ▶한사군 한반도론 최후의 보루 낙랑목간
- 정백동 364호분 출토 낙랑목간
- 초원4년현별호구부' 낙랑목간
강단사학은 이렇게 주장합니다.☞평양 일대 무덤들은 낙랑군 유적이 분명하다. 특히 1990년대 초 정백동 364호분에서 나온 기원전 45년 낙랑군의 현별 인구 통계를 정리한 목간은 낙랑군이 한반도에 있었다는 확실한 증거다
☞북한이 평양의 한 고분에서 발견했다며 2000년대 발표한 낙랑목간. 낙랑군 25개 속현의 호구 변화가 기록돼 주류 학계 통설을 뒷받침한다.
그러나 낙랑목간의 기록을 살펴서 지도를 만들어보면 ?
▶ 그나마 위조가능성이 높다.
1993년 정백동 고분에서 출토된 ‘낙랑군 호구부’는 평양이 낙랑이라는 강단사학자들의 유력한 증거물이다. 그런데 이 고분에서 출토된 유물은 매우 복잡하다고 문성재 박사는 말한다. 출토된 유물을 보면 ‘낙랑군 호구부’ 뿐 아니라 필기구로 추정되는 환두 도자와 관복에 사용될 띠걸이 그리고 무기류와 수레에 설치된 부속물, 여성용 장신구와 도끼, 낫, 굴착도구 등의 농기구 등이다. 고분에서 귀족이나 누릴 수 있는 위세품과 농민들이 사용하는 농기구가 동시에 출토될 수 없다는 게 문성재 박사의 설명이다. 지배층이었다면 농기구를, 농군이라면 지배층인 관리가 사용하는 필기구나 관복에 사용하는 띠걸이를 같이 넣어 묻었을 리 없다는 것이다.
또 ‘호구부’는 “보안 문서이기 때문에 개인의 무덤에 부장한다는 것 자체가 말이 안 된다”며 조작된 것이라고 말한다.
문성재 박사는 호구부의 조작의 근거로 몇 가지 근거를 제시했다. 한나라의 목각에 써 놓은 문서 규격들과 비교할 때, 목각 규격의 크기가 일정하게 맞지 않다는 것이다. 서체가 한나라 때 유행했던 예서체와는 상당히 다름 점도 위조의 가능성으로 제시했다.
호구부가 날조된 것이라고 보는 결정적인 근거는 ‘별’이라는 접두사 사용이라고 한다. 호구부의 첫 줄에 “낙랑군|초원사년|현별호구|다소□□(樂浪郡初元四年縣別戶口多少□□)”이라고 하였는데 ‘-별’은 ‘-군(君)’처럼, 19-20세기에 일본에서만 쓰던 ‘일본식’ 한자어라는 것이다. 문성재 박사는 묵독 “별 존재 자체가 유물이 위조품임을 스스로 증명하는 결정적 단서”라고 말한다.
바른역사아카데미 역사강좌](7번째)
*강사:문성재박사(우리역사연구재단 책임연구원)
*강좌명: 한사군은 중국에 있었다(강단의 고대사 왜곡 실태)